이사야 강해 제32강(사6: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7월 13일(월)
이사야가 처음으로 바라본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사6:1-5)
몇 가지 깊이 묵상을 해보아야만 하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본문에 대하여 한국어성경과 영어성경을 가지고 비교검토를 하면서 머리 속으로 그림을 명확하게 그려가며 동시에 풀이를 하고자 합니다. 한국어성경은 개역개정판이며 영역본은 오늘날 영미의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입니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In the year that king Uzziah died, I saw the Lord seated on a throne, high and exalted, and the train of his robe filled the temple),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Above him were seraphs, each with six wings; With two wings they covered their faces, with two they covered their feet, and with two they were flying),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Holy, holy, holy is the Lord Almighty; the whole earth is full of his glory).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At the sound of their voices the doorposts and thresholds shook and the temple was filled with smoke). (5)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woe to me!’ I cried. ‘I am ruined! For I am a man of unclean lips; and I live among a people of unclean lips, and my eyes have seen the king, the Lord Almighty’)”(사6:1-5).
첫째로, 이사야는 하나님 여호와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사6:1a). 그의 눈으로 보았을 것으로 지레짐작을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진면목을 보는 자는 모두 죽고 말기 때문입니다(출33:20). 그러므로 그 대목은 이사야가 영적인 믿음의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는데 그것이 육신의 눈으로 본 것만큼이나 생생한 체험이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더 알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풀이를 할 수 있는 근거 몇 가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을 호위하고 있는 스랍들이 자신들의 날개로 자기의 얼굴과 발을 먼저 가리고 있습니다(사6:2). 그 이유는 창조주의 진면목을 아무리 높은 신분의 영적인 천사들이라고 하더라도 직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육신한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의 질문에 답변을 하시면서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요14:9). 그리고 그것은 큰 은혜라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메시아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였지만 그 복을 얻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히11:13, 26). 하지만 천국과 변화산상에서는 모두가 그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마17:1-3, 요8:56-58).
(3) 예수님은 도마처럼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고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후세대들에게 복이 있다고 언급을 하시고 있습니다(요20:29). 영적인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경우가 직접 육체적인 눈으로 본 것보다 더 확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도 부활하신 주님을 생전에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고전15:8).
둘째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강림하여 임재하신 모습을 이사야가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옷자락이 성전을 덮고 있으며 하나님의 보좌를 쳐다볼 때에 그것이 한없이 높으며 하늘로 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따름이라는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가 ‘a throne, high and exalted’(사6:1b)에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 위를 감히 스랍들이 날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호위를 맡고 있는 높은 신분의 천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스랍들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대목이 언약궤의 뚜껑에 해당하는 속죄소의 모형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설명할 때입니다(출25:17-21). 하나님께서는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 안 언약궤와 속죄소에서 모세와 대제사장을 만나고 말씀을 전하고자 하십니다(출25:22).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소의 모형 그대로 스랍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 주위를 호위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호위하고 있는 스랍들이 그 위를 날면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창조주의 영광과 진면목을 함부로 보거나 침범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섯 개의 날개 가운데 네 개를 사용하여 최대한의 겸손과 숭배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두 날개로 자신들의 얼굴을, 또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사6:2a). 그 다음 나머지 두 날개로 보좌 위를 날면서(사6:2b) 호위와 더불어 하나님의 시중을 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모세는 창세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창17:1). 그 의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만 한다면 그 인생을 책임져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의미는 좀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선민사상이 반영되어 있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의 통념에 따르면, ‘만군의 여호와’(the Lord Almighty, 사6:3)라는 의미는 다분히 군사적인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무력으로 선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관념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용어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을 해보아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오로지 그렇게만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요?
(1)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호위병정도로 여기고 있는 잘못된 신앙행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더구나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인생살이 가운데 한 평생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있는 주인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란 하나님의 종이며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선민들의 관념이란 것이 하나님께서는 단지 적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만 충실하게 수행해주시고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뜻대로 행할 터이니 부디 입을 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엇나간 신앙의 태도입니다.
(2) 이스라엘의 자손을 출애굽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방세계에 하나님신앙을 전하기 위함입니다(출19:3-6, 욘1:2, 3:2). 그런데 그 일을 내팽개치고서 오로지 선민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욘1:3, 4:1-5). 이방세계를 정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방인들이 선민을 섬기도록 역사를 섭리해달라고 하는 것이 선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요컨대, 군사적인 성격의 ‘이스라엘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원하고 있으니 그 신앙의 뿌리가 완전히 썩어 있다고 하겠습니다(사5:24).
다섯째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게 되면 피조물인 인간은 죄인의 신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입장은 본문을 참조하면 이중적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리고 비록 개인적으로 의롭다고 하더라도 단지 죄인의 사회에 속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부정한 자라고 이사야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흔히 자신은 잘못을 행하는 사람이 아닌데 단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죄악을 행했다고 변명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려고 무던히 노력을 하는데 이웃과 사회가 구조적으로 부패하여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갔을 뿐이라고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변명이 이사야의 고백에 따르게 되면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강림을 바라보며 그 임재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육체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 영혼의 심판과 영원한 자아의 소멸까지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마10:28). 그러한 경우를 이사야가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창조주 앞에서 자신이 부정한 자이며 타락한 유대인사회의 일원이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죄인의 신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이사야가 선지자로 택함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자격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타락하고 있는 사회에 속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용서를 바라는 기도를 올려야만 할 것입니다(눅18:11-14). 아울러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각오를 밝혀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으로 나아가는 방법임을 본문이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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