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16. 02:46

이사야 강해 제5(1:10-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6 12()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행하고 있는 선민들의 종교생활을 이사야가 질타하다(1:10-15).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1:10).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종교적인 행사만 요란하게 행하고 있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듣고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기본인데(15:6-10, 26:39) 그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 왕조와 선민들이 행하고 있는 종교적인 활동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가 달라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세상에 자랑하고 있는 선민의 특권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1:11),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는 것(1:12-13a),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전에 분향을 할 수가 있다는 것(1:13b), 월삭과 안식일에 성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1:13c-14),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수 있다는 것(1:15) 등이 이제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도리어 선민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1). 속죄의 제사나 화목의 제사는 모두 죄를 범한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먼저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마련된 제사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스스로 율법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자칭 의인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18:11-12, 1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자신들이 의인임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함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불행의 씨앗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상습적으로 드리고 있는 제사를 기쁘게 받으실 이유가 하등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천하만물과 만민이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데 구태여 가축의 일부를 창조주 하나님께서 탐을 내실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1:12-13a).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지도 아니하고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마치 선물을 들고 오듯이 생색을 내면서 제물을 가지고 옵니다. 제사가 백성들을 위한 것이듯이 제물도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사자들이 하나님께서 제물을 필요로 하시는 가난한 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드리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온 세상만물을 소유하고 계시는데 그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선민들은 세상만물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서 어른 대접을 해주고 있으니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는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일찍이 카인이 자신의 제물을 물리치신 하나님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한 것과 꼭 같습니다(4:5). 그 잘못된 마음가짐을 아시고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불편한 마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지고 오지를 말라!”(1:13a).

(3)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1:13b). 성전에서 하나님이 임재를 하시는 장소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법궤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지성소입니다. 평상시에 그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기체인 분향의 연기입니다. 가루향을 태우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를 성스럽게 여긴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생명의 주인으로 그리고 인생길을 인도하는 아버지로 여기지도 아니하면서 연기만 피우고 있으니 그것이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4)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노라”(1:13c-14). 선민 유대인들은 절기를 깍듯이 지키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회라고 하여 빠지지 아니하고 참석을 합니다. 한 마디로,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출석율과 인위적인 열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내적인 마음의 상태, 곧 하나님과의 교제를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는 신앙심이 더 먼저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마음으로 참석을 하고 어떤 뜻을 따라서 열심인지가 중요합니다. 자주 다음과 같이 스스로 자문을 해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생명의 아버지이며 주인으로 알고서 진심으로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제물을 받고서 재앙을 거두어가고 잘 보이면 자신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성공과 복을 주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여기면서 그저 겉으로만 두려운 척 섬기고 있는가?

(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1:15). 먼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유대교리를 보전하고자 합니다(11:49-50). 유대교의 교리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죄 없는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수호해야만 하는 가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천하만물과 사람들이 서로 생명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시고서 심히 좋다!’(very good!)고 이미 평가를 하셨기 때문입니다(1:31).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9:5-6). 그러므로 약하고 무죄한 자를 희생시키고 강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사회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6:1-7, 15:16).

  결론적으로, 창조주께서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신실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12:2).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성에 젖은 종교생활이 아니라 매일같이 말씀을 보면서 기도로써 그 뜻을 깨달아 적용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법을 고쳐나가는 성화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12:1-2). 그것이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2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