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17. 03:32

이사야 강해 제7(1:17-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614(주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과 거절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저주(1:17-20)

 

첫째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주 쉽게 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2)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3)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16-17). 그 문장은 위와 같이 세 단락으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묵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악한 행실이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 습관이 되어 있는 잘못된 버릇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살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서로 옳다고 변호해주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허다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비추어보아 자신들의 통념이나 관념 그리고 관습 등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을 버리고 생각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버리고 나면 다시는 그러한 관념과 습관을 쫓아서 악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행악을 그친다는 의미입니다.

(2)  흔히 사회적으로 정의를 구현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회정의구현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사야 선지자가 먼저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행’(善行, 선을 행함 곧 생명을 살림)입니다.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것인데 사회생활은 그 반대로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 남과 다른 많은 사람까지 살리고 돌볼 수가 있겠습니까? ‘적자생존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하는 용어가 더 익숙한 사회에서 참으로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배워야만 합니다. 인간세상에 없는 이야기이니까 더 열심히 배우고 실천에 힘써야만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구해야만 됩니다. 한 마디로,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려운 일을 역사 가운데 유일하게 완전 실천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평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스승의 행적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3)  사회는 경쟁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종의 제로섬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입니다. 권력과 재화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더 적게 가지게 되는 사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결국에는 첫째, 학대를 받는 자 둘째, 억울하고 원통한 자, 셋째, 먹고 살 방도가 사라진 사람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생명구원의 차원에서 그들을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모세오경을 원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나 노예처럼)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伸寃,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어줌)하며 과부(寡婦, 남편이 죽고 재산이 없는 여인)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17b). 참고로, 모세오경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10:18-19).

둘째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 두 가지가 임합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공존공영의 은혜입니다(1:18b-19).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지 아니하게 되면 전쟁으로 망하게 됩니다(1:20). 반드시 인류의 역사가 그렇게 전개된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걸고서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1:18a). 여기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두 가지의 은혜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주홍 같은 죄가 눈같이 희어지고 진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같이 희어질 것”(1:18b)이라고 이중적인 미래형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래형으로 표현이 되고 있는 이유는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장차 입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와 같은 풀이가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과 히브리서 저자의 설명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7-29),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7:27-28),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2)  단지 붉은 색을 말하고 있는 주홍’(朱紅, scarlet)보다는 완전 빨강을 말하고 있는 진홍’(眞紅, dark red)이 더 나중에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표현기법으로 볼 때는 강조용법입니다. 그런데 눈과 같이 희어지고 양털같이 희게 된다는 이중적인 표현은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평생 흰 눈을 본 적이 없지만 새하얀 양털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뉴질랜드 북섬(north island)을 생각하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흰 눈은 영하의 날씨를 가진 지역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얼지 아니하는 땅이라고 하더라도 양을 키우고 있으면 새하얀 털은 구경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은 참으로 자상하신 하나님의 설명임을 잘 드러내고 있는 문장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실천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또 다른 은혜가 다음과 같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1:19). 경쟁사회에서 원치 아니하는 낙오자가 되고 있는 자들이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들입니다. 그들을 모두 먹여 살리자면 재화가 부족합니다. 식량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두 가지 의미의 축복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첫째, 풍작이 든다는 것입니다. 둘째, 나누어 먹기에 넉넉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마치 치유가 급속하듯이 엄청난 풍년이 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만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사야의 증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20). 여기서 거절하여 배반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단순하게 따르지 아니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나아가서 하나님까지 버리게 되면 그 땅에 대한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당장 역사적인 심판은 전쟁의 참혹함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덤에서 잠자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모두 깨워서 영원한 벌에 처하게 됩니다(5:29). 그와 같은 종말론적인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이사야는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20b)는 구절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의 능력은 우주를 창조하는 한편 생사를 주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 종말론적인 심판을 포함하는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3, 4:4).

결론적으로, 생명과 사망 그리고 복과 저주 가운데 생명과 복을 선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성도의 삶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부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답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즐겨 순종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언자적인 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나아가서 여호와가 제사장나라의 주인 되심을 부인하고 있는 동족들의 참혹한 미래가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의 대선지서를 적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