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8강(사1:21-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6월 15일(월)
이사야 당시 타락한 예루살렘의 모습(사1:21-23)
선지자 이사야는 타락한 예루살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영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일목요연(一目瞭然, 한 눈에 뚜렷이 알 수 있는 것)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2)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서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뿐이로다. (3)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4)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사1:21-23). 과연 그러한지 네 가지 측면에서 한번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신실(信實)하다는 것’과 ‘창기(娼妓)와 같다는 것’은 영적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표현입니다(사1:21). 왜냐하면, 신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받들어서 함께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소위 ‘일심동체’(一心同體, 한 마음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 사상을 그 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창기는 남편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한 몸을 이루는 외도(外道, 바람을 피우는 것)를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을 창세기에서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제2장 말미의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2-25). 부부가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일심동체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 monogamy) 가정제도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결코 서로 딴 곳을 쳐다보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신실하다는 의미입니다.
(2) 그래서 그런지 이사야는 하나님과 예루살렘을 부부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사62:4-5). 그리고 예수님도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구원과 영생을 얻는 길임을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1-24).
(3)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부부관계 일부일처제의 가정이 힘있는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영적인 신실함이 사라지고 용사들이 제멋대로 아름다운 여인을 모조리 차지하게 되는(창6:2) 이른 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 polygamy) 및 외도가 허용되는 문화가 온 사회에 만연하게 됩니다. 그렇게 육신적인 삶으로 타락하게 되자 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사회에 거하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버리고 떠나버립니다(창6:3). 그 결과 홍수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4) 참고로, 창세기 제6장의 관련구절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하나님신앙을 가진 가정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하나님신앙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혼혈로 태어난 기골이 장대한 용사)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6:2-4).
둘째로,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서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뿐이로다”(사1:21b)는 대목은 타락한 예루살렘 사회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금 설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신앙이 살아 있는 사회는 정의와 공의가 충만합니다. 정의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백성들이 노력합니다. 정치적 권력과 법제도를 공정하게 사용하여 사회정의를 확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살기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낙오자, 생존의 위기에 처한 자, 억울하고 원통한 자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를 살펴서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라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2) 그런데 이사야 당시에 예루살렘 사회가 타락하여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뒤를 잇는 므낫세 왕의 시대가 되면 약자와 무죄한 자의 피가 예루살렘에 흘러 넘치게 됩니다(왕하22:16). 사회정의조차 구현이 제대로 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살인자들의 거리가 되고 말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사1:21b).
셋째로, 선지자 이사야는 경제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1:2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화에 이어서 은화는 귀한 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에서는 황제의 초상이 들어간 은화 데나리온을 발행한 흔적이 있습니다(마22:19-21). 로마제국에서는 속국 백성들의 인두세를 1데나리온으로 정했는데 그 금액이 예루살렘에서는 장정의 하루치 품삯에 해당이 되고 있습니다(마20:2).
그렇지만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에서는 은화를 만들지 아니하고 그냥 금과 은을 화폐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금과 은의 무게를 나타내고 있는 달란트, 세겔 등의 단위가 돈의 단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타락하게 되면 금과 은의 순수함량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찌꺼기를 섞은 것 곧 함량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속여서 통용을 시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포도주의 도수(度數, percentage or degree)도 속여서 판매를 하게 됩니다. 요컨대, 경제적으로 부정직한 사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넷째로, 정치적으로 타락하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사1:23). 그렇게 정치적으로 타락한 사회의 모습은 앞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사회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7).
(1) 선행 곧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구현하는 것이 나라의 정치입니다. 그런데 왕과 귀족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나아가서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패역입니다. 그 이유는 권력을 이용하여 재물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둑과 같습니다. 부자들이 권력자와 결탁을 하고 있습니다. 뇌물을 주고서 부당이득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2) 그 결과 사회에서 부당한 학대를 받는 자, 억울하고 원통한 고아와 같은 자, 살 길이 막막한 과부 등이 권력자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 길이 열리지를 않습니다. 선물 곧 예물을 들고 가지 아니하면 아예 만나주지도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백성과 유리된 국가는 체질이 허약해지고 맙니다. 그 결과 외침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이사야의 경고 그대로 몇 년 가지 아니하여 앗수르 산헤립 군대의 내침으로 전국이 적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겨우 예루살렘 성만이 남아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게 됩니다(사36:1-3).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을 떠나게 되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하더라도 별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타락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타락을 초래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신앙을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비로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살 길이 열리게 됩니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이 살 길과 남북통일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신앙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대동단결이 먼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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