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0강(사1:29-3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6월 17일(수)
사람들이 자랑하던 조상, 살기 좋은 땅, 그리고 강한 자가 맞이하게 되는 부끄러운 역사와 그 허무한 종말에 대하여 이사야가 예언을 하다(사1:29-31).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좁게 보면, 주전 8세기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앗수르 제국의 침략이나 100여년 후에 도래하는 제사장나라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와 적용에 있어서는 후세대와 만민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길이와 넓이가 확장이 되고 있는 이유는 이사야가 메시아의 오심을 염두에 두고서 예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시대로부터 700년이 지나서 선민들의 사회에 오시게 되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선민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이방족속들은 어떻게 되는지를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특히 본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사1:29-31). 문장을 살펴보면,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구체적인 것 같으나 사실을 굉장히 추상적이고 상징적입니다. 둘째, 그 때문에 유대인들의 역사에도 맞아지고 이방인들의 역사에도 적용이 가능해집니다. 셋째, 세상문명의 끝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과연 그러한지 이제부터 함께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상수리나무와 동산 그리고 강한 자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요?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상수리나무는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자 한 지역이 세겜입니다. 당시의 세겜은 가나안 땅의 중심이었으며 상수리나무가 많았습니다(창12:6). 그리고 아브라함이 헤브론 땅에 오래 거주하였는데 그곳에도 상수리나무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창14:3). 더구나 후에 ‘이스라엘’로 불리게 되는 야곱도 상수리나무와 인연이 깊습니다. 그는 세겜을 떠날 때에 상수리나무 아래에 이방신상을 묻어버립니다(창35:4). 그리고 ‘벧엘’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그곳 상수리나무 아래에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를 장사 지냅니다(창35:8).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뻐하던 상수리나무’(사1:29a)는 자랑스러운 조상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은 언덕에 집을 짓습니다. 동양사회에서는 ‘배산임수’(背山臨水, 뒤로는 산이 있어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는 강이 있어 물 걱정이 없는 좋은 지형)의 지형을 찾아서 언덕에 마을이 형성됩니다. 물론 고대 농업사회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를 조금이라도 아끼고자 하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고대 목축사회에서도 그러합니다. 언덕이나 동산에 올라가야 양떼의 움직임을 단숨에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산이 없으면 망대라도 지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택한 동산’(사1:29b)은 마을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강한 자’(사1:31)는 말 그대로 세상임금과 귀족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 있어서는 종교지도자들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어째서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시들어지고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1)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속까지 투시하고 있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는 것이(삼상16:7) 영 불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인생을 살게 되면 혼자서 손해를 보게 되는 것만 같습니다. 요컨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심성과 애초부터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분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을 떠나려고 합니다.
(2) 그런데 유대교적인 말씀의 해석이 그 명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율법준수만 잘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외형적인 조건만 만족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절기를 잘 지키고 각종 제사와 종교행사에 빠짐없이 참석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타의 율법은 사람들 보기에 잘 지키면 그만입니다. 그리하면 선민 이스라엘에게 형통의 복이 주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유대교적인 말씀의 해석이 잘못되어 있다고 선지자들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사야가 부르짖고 있는 내용도 그것입니다. 그래도 시정이 되지를 않습니다. 마치 ‘포도원 농부’의 행태와 같습니다(마21:33-41).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습니다. 농부들은 아예 포도원을 자신들이 완전히 차지하고자 주인의 상속자를 죽여버립니다. 그 결과 유대교지도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하나님의 조치 곧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를 줄지어다”(마21:41)는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선민구원에서 이방인구원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입니다(마8:10-12).
셋째로, 메시아의 오심으로 세상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 것일까요?
(1) 조상 잘 둔 덕택에 그 동안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행세하던 유대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그 영향력이 왜소해지고 맙니다(사1:29a, 30a). 마찬가지로 집안자랑, 가문자랑, 신분자랑의 사회가 만민평등사회로 바뀌게 됩니다. 나아가서 진심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상의 역사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2) 선민들이 택한 동산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서 예수님이 배척을 당하게 됩니다. 그 결과 복음이 이방세계로 먼저 넘어가게 됩니다.
(3) 세상임금이 쫓겨나게 됩니다(사1:31, 요12:31, 16:11).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 예언이 예루살렘과 남조 유다왕국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사1:1). 그런 측면에서는 임박한 앗수르의 침공, 그리고 100여년 후의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살해를 당함으로 선민구원사상이 만민구원사상으로 바뀌게 되는 큰 변화가 도래합니다. 그 결과 종말론적인 세상심판에 있어서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피해갈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개인이거나 민족이거나 모두 메시아의 깃발 아래 새로운 인생과 역사를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 이사야의 기록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사1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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