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2강(사2:5-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6월 19일(금)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 백성들의 구체적인 잘못에 대한 이사야의 지적(사2:5-9).
첫째로, 이사야는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야곱 족속’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사2:5a). 그것은 수백의 세상족속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별 볼일이 없는 족속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야곱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야곱 족속’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불러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려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위대한 열두 지파를 낳은 자랑스런 신앙의 승리자 ‘대 족장’의 칭호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창32:28, 35:10, 48:22). 그러나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지를 못하기에 그냥 ‘야곱 족속아’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사야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2:5b)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의 외침은 세 단계를 밟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신앙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고 있는 타락한 모습에 대한 지적입니다. 둘째, 하나님신앙을 회복하지 아니하고 계속 그대로 살게 되면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셋째, 하나님신앙을 회복하게 되면 얻게 되는 새로운 축복입니다. 그렇게 현실진단, 심판예고, 회개와 회복이라는 순서로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신앙회복과 축복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2:5)라고 먼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전한 다음에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 백성들이 행하고 있는 불신앙에 대하여 현실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 백성들의 구체적인 잘못에 대한 이사야의 지적이 다음과 같습니다(사2:6-9);
(1)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풍속이 가득하며”(사2:6a); 유다 왕국의 가까운 동방에는 암몬, 모압, 에돔 등이 있습니다. 그들의 우상문화가 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가 특별히 동방풍속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앗수르 제국의 영향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주전 733년에 아람왕국을 점령하고 그 왕도 다메섹에 거대한 제단을 만들었을 때에 유다 왕 아하스가 그것을 보고 좋아하여 예루살렘에 도입을 합니다(왕하16:9-18). 그때부터 동방풍속이 과거 솔로몬 왕 때에(왕상11:8) 이어서 무분별하게 유다 왕국에 다시 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왕조의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어 보이는 제국 앗수르를 두려워하며 대신 섬기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2)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을 치며”(사2:6b); 지중해연안의 나라들에게 있어서 해변의 땅은 중요합니다. 세 가지의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어업과 무역업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둘째, 강의 하류이므로 비옥합니다. 셋째, 해변 길은 천연의 통행로입니다. 특히 애굽과 해변 길로 교역을 하고 있는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에 있어서는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길의 대부분이 블레셋 족속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자연히 두 나라 사이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국들의 점치는 문화가 블레셋을 통하여 유다 왕국에 들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의 점치는 문화에 대해서는 그 옛날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나고 있을 정도입니다(창44:5).
(3)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사2:6c); 유다 왕 아하스는 주변국들의 침략을 받자 앗수르의 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왕하16:7-9). 그 덕택에 당장의 외침은 물리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호랑이를 가까이 불러들인 모양새가 되고 맙니다. 주전 722년에 형제국가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남조 유다 왕국마저 점령하고자 획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신앙을 떠나서 이방인의 나라 앗수르와 군사동맹을 맺은 다윗 왕조의 잘못을 이사야가 질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4)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사2:7); 신앙인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면 세상적인 황제의 논리를 따르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다윗 왕조의 왕들에게 있어서는 더 절실한 기로입니다. 아하스 왕은 철저하게 후자를 선택한 인물입니다. 오죽이나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국가의 안전을 얻고자 하였으면 자신의 아들을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겠습니까?(왕하16:2-4). 그래 보아야 앗수르 제국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는 2등국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대목의 표현은 일종의 냉소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5)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며”(사2:8); 이 대목은 아하스 왕 통치기간 16년 동안의 타락의 모습을 그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온 나라에 우상이 가득하였으며 백성들이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왕하16:3-4)
(6)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사2:9); 다윗 왕조의 왕과 귀족들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떠나서 이방의 제국 앗수르를 부러워하고 그 힘을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누리고 형통의 복을 얻기 위해서는 우상에게 절하고 강대국에게 머리를 숙이는 데 있어서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이유가 전혀 없는 나라와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사2:9b)라고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은 반대해석이 가능합니다; 그의 내심은 분명히 “영적으로 너무나 타락되고 처참한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있는 철부지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저의 동족을 회개시키고 고쳐서 다시 사용해주십시오, 한번만 더 용서를 해주십시오!”라는 눈물 어린 호소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웃시야 왕의 번성과 물질적인 성공으로부터 요담 왕을 거쳐서 아하스 왕에 이르게 되면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이상하게 변모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앗수르의 군대를 의존하여 외침을 막아내고 있는 별 볼일이 없는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내적으로는 우상을 좋아하며 흥청망청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국가적으로 망조(亡兆, 망할 조짐)가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동시에 동족을 사랑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가 견딜 수가 없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는 동족들이 철저히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하루 속히 돌아오기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표현이 “빨리 돌아오지 아니하면 용서함을 받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눈물겹게 엿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성도들도 너나없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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