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1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18. 09:07

이사야 강해 제11(2: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618()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의 본래 취지가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드러나다; 이기적인 선민구원사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 만민구원사상(2:1-4).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두 차례나 부르짖고 있습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1: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2:1).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입니다. 그는 적어도 아버지 아모스 때부터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에 살고 있는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유대교리에 물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교의 특징은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그들의 선민우월사상을 가지고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서 말씀과 율법의 본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6:3-13). 그것은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기적이고 외형적인 모습의 종교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은 선민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선민만을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백성을 죄와 사망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영생의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을 동족들에게 먼저 전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전하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 둘째,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의 속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하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나라가 되라. 셋째, 인간의 이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쫓아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라. 넷째,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그 뜻을 어기는 외식적이고도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유대인들이 망할 것이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버릴 것이다. 구체적으로 본문에서 그러한 내용이 어떻게 기록이 되고 있는지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2:2).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들은 출애굽의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노예로 삼아 100년 넘게 압제를 했던 이방나라 애굽 제국을 강력하게 징계하고 자신들에게 해방의 은혜를 베푸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을 유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결과 아버지가 항상 자식을 보호하고 그 편을 들어주듯이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는 항상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그 이유를 묵상해보면 자연히 본문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1)  모세오경의 첫 머리에서 선언이 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 그리고 모든 인류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며 아버지가 되십니다. 모든 세상만민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느냐 또는 그 뜻을 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가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광야생활을 통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을 시킨 이유는 열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집단적 이기주의와 선민이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만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어버리고 말씀과 율법을 독점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방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시온의 영광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3)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다윗 대왕의 시대에 제국을 형성한 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시절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후손이 다시 유대인들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메시아의 신위적인 능력에 의존하여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고 시온의 영광을 온 세상에 떨치기 위함입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와 같은 선민사상에 동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적인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려버리고 온 세상과 열방에 새로운 성전을 세울 것입니다. 그것이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대목에 대한 묘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2:2). 그 뜻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덮으며 메시아의 깃발 아래 열방과 모든 민족이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2:3). 선민 유대인들은 허물과 공로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민의 특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말씀과 율법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변질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허물입니다. 반면에 하나의 공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2)는 것입니다. 똑 같은 시각에서 벌써 이사야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2:3). 그러므로 열방과 만민 가운데서 하나님신앙을 가지게 되고 예수님의 복음을 믿게 된 성도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히브리사상을 연구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지고 역사를 꾸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영적인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15:27). 단지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올바로 해석하고 적용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되지만 그들이 아전인수격으로 말씀을 왜곡한 것은 반드시 복음으로 바로 잡아서 적용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2:4). 이사야의 예언은 메시아의 탄생과 그가 건설하는 나라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제9장과 제11장이 대표적인 기술입니다. 그런데 그 원형’(原形. 원시형태, prototype)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두 가지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상의 왕이 아니고 메시아가 직접 다스리는 세상이 임한다는 것입니다(2:4a). 둘째, 그 나라에는 전쟁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2:4b).

그 대목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입장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다윗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사야 제9장의 다음 내용이 입맛에 맞을 것입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5-7). 한 마디로, 선민들의 메시아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9장의 진정한 내용이 드러나게 되는 제11장의 내용은 다릅니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5-9). 종말론적인 세상의 심판 후에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리스도가 건설하시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이 예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종말론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상세는 요한계시록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의 예언은 신기하게도 66장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앞부분 39장은 역사적이며 구약적인 모습으로 기술이 되어 있고 뒷부분 27장은 복음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특징이 제2장 본문에서부터 엿보이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이방인을 바라보고 있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에 입각하여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윗의 후계자인 메시아가 장차 이 세상에 와서 이스라엘 제국을 다시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라를 세우게 되면 다윗 제국의 패권 하에 이방나라와 민족들이 속국이 되고 종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진정으로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으로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예루살렘 성입니다(21:2).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고 다시 등장하는 그 성전은 열방의 산 위에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나라로서 건설이 될 것입니다(2:2, 17:21, 4: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