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3강(사2:10-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6월 20일(토)
교만(驕慢)한 자와 거만(倨慢)한 자와 자고(自高, 자신을 스스로 높임)한 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사2:10-17).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합계 66권의 책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 처음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모세오경이라는 율법서입니다. 그리고 율법서의 첫 머리가 창세기이고 그것이 전체 성경의 서론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이 배열이 되어 있는 이유를 잠시 본문과 관련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모세오경이라는 율법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창조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서 내려와 동족들에게 전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그대로 지키기로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본질은 (1)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2) 이미 언약을 했으므로 백성들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삼아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하며, (3) 스스로 종의 위치를 떠나거나 말씀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성경의 첫머리인 창세기에서 충실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창세기를 포함하는 모세오경만 잘 지켜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요셉 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지를 못하다는데 비극의 씨앗이 숨어 있습니다. 그 타락의 과정을 창세기가 역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에서 유다 왕국의 타락과 관련하여 좀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왜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할까요? 먼저 창세기 앞부분을 참조하면 다음 세 가지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처럼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창3:5a). 둘째, 하나님만큼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창3:5b). 셋째, 객관적인 자기보다 주관적인 자기가 더 대단하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5). 그 말은 하나님 앞에 선 자신보다 사람들 앞에 서있는 자신이 더 진정한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타인의 평가보다 스스로 평가하는 자신이 더 옳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이 그렇게 대단하게 평가해주지를 않으면 그 평가가 틀렸으며 자신이 스스로 믿고 있는 그 높은 평가가 더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길게 설명을 하고 있는 이유는 본문 특히 이사야 제2장 제12절에 등장하고 있는 세 가지 용어의 구별이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 거만한 자, 그리고 자고(自高)한 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그 용어의 뜻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교만한 자’는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입이 크고 귀가 작습니다. 즉, 말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지혜를 엄청나게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세상살이에 있어서 더욱 적합하기 때문에 구태여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과 태도가 그러하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나고 있는 애굽의 황제 바로의 완악함이 바로 교만에 해당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삼국지에 나타나고 있는 재상 조조가 전형적으로 그러한 인물입니다.
(2) ‘거만한 자’는 다른 사람을 모두 종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만 합니다. 자기는 제일 나중에 인사를 하거나 받아주면 됩니다. 연회석상에서도 제일 상석이 자신의 자리여야만 합니다. 공식행사에 있어서도 제일 나중에 거드름을 피우면서 등장을 하는 자입니다. 모두가 자신을 기다려주어야만 하는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기에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괴리감만큼이나 자신을 알아주지 아니하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화를 내고 있습니다. 삼국지에 등장하고 있는 동탁이 그러한 인물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3) ‘자고한 자’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보다도 자신의 평가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은 50점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평가는 그보다 훨씬 높습니다. 예를 들면, 카인이 자신이 바친 제물을 하나님이 퇴짜를 놓자 그것을 인정하지를 못하고 화를 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평가가 더 맞고 소중하므로 객관적인 사람들의 평가나 유일하신 창조주의 평가조차 아랑곳하지를 않습니다. 삼국지를 보면, 스스로 천하제일의 지혜를 가졌다고 자신하고 있던 주유가 제갈공명을 만나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탄을 하고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과 같습니다.
(4) 세 가지의 모습은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인 종으로 창조가 된 인간들이 스스로 창조주가 되고자 합니다. 그 욕심이 발현하여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교만, 다른 모든 사람이나 피조물들의 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만함, 그리고 스스로 창조주처럼 평가하고 있는 자고의 성향을 낳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 가지의 속성이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 백성들의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유다의 백성들만 그러할까요? 이사야는 그러하지가 않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사2:12). 좀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 민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는 산이 북방에 있습니다. 바산 땅의 헬몬 산입니다. 높이가 백두산만큼이나 되는 신령스러운 산입니다. 그곳에서 눈이 녹아 흘러서 요단 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헬몬 산 주위의 상수리나무를 비롯한 산림자원이 이스라엘의 허파 구실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와 같이 높은 산을 신령하게 여기고 있는 모든 민족들이 하나같이 창조주 하나님의 높으심을 잊어버리고 있다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사2:12, 13b, 14a).
(2) 레바논은 사라진 페니키아인들의 고향입니다. 시돈은 어업의 중심지였으며 두로는 천혜의 무역항입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육지에서 800미터 떨어져 있는 큰 바위섬에 철옹성의 항구를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두로의 백향목은 각종 건축물의 최고의 목재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그 나무로 지어졌습니다. 그 나무로 단단한 배를 건조하여 페니키아인들은 서쪽 유럽의 끝 스페인의 다시스 항구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무역을 석권했습니다.
(3) 페니키아인들은 무역대국이 되어 경제적 번영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존재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우상을 조각하여 예술품으로 온 지중해 연안국가에 팔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은 잘못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사2:13a), “모든 견고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사2:15b-17).
(4) 기타 주변의 목축국가들에 대해서는 “모든 솟아오른 작은 언덕과 높은 망대와”(사2:14b-15a)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열방과 민족들에 대해서 동일한 죄를 범하면 동일한 처벌이 임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사2:10-11).
끝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은 심판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일까요? 겉으로 보면, 단호한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하시는 구원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 근거는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본체가 나타나는 것을 피하여 생명을 구하라!”는 지시가 먼저 선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2:10). 출애굽기 제33장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2-23).
결론적으로,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야만 합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으면 여호와가 임재할 때에 그 체질이 녹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유일하게 죽음을 피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는 것입니다. 산 자가 바위 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가리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토에 숨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죽음의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잠을 깨우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성도는 육체를 벗고 부활을 몸을 입고서 천국에 들어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인생을 교만하지 아니하며 거만하지도 아니하고 자신을 높이지도 아니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만을 높이며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 마디로, 성도의 평소 신앙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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