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9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7. 03:49

로마서 강해 제97(15:7-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4 7()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할례도 받으시고 이방인들도 긍휼하게 여기신 그 뜻을 기억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하여(15:7-9);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님께서 받으신 할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5:7-9).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과 관련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근원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피조세계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의 세상구원의 뜻을 실천하고자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그러므로 그와 같은 관련성을 먼저 다음과 같이 살펴봄으로써 본문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하고자 합니다;

(1)  첫째,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 세상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정의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고 또한 제한적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은 자신과 가족, 나아가서 친지와 자기 민족에 대한 것으로 국한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폭넓게 자신과 똑같이 사랑할 수는 결코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정의라는 개념은 자신들의 집단 내에서 자신들에게 공통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을 옳다고 판정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시기에 여호와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을 하나같이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개념입니다. 그와 같은 폭넓은 사랑은 창조주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구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3:13-17).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1-2).

(3)  셋째, 그렇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할례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개념이 무엇일까요?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숨쉬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긍휼하게 여기시고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는 선민과 이방인 그리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그 지극하신 피조물 사랑의 표현입니다(8:14-22).

(4)  넷째, 하나님의 긍휼과 할례가 어떤 사람들에게 먼저 미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1)    먼저 긍휼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하나님의 복음은 선민 유대인들의 땅에서 먼저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헬라인들을 비롯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를 하는 자들, 곧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을 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긍휼을 입는 자들은 이방인들이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처형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후에 선민들의 자손까지 구원하시고자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1:29-31).  

2)    다음은 할례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할례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먼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할례에 들어 있는 하나님신앙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할례는 육체적인 선민의 표징에 머물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과 의식은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고 믿음의 자손을 이 땅에 탄생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자신들의 뜻과 능력으로 자손을 탄생시키고 이 세상을 경영하고 있는 줄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할례의 정신을 잊어버린 결과 입니다(10:16). 그 결과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서 할례에 깃든 정신을 뒤늦게 깨닫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가 먼저 임하고 있습니다.

(5)  다섯째,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비록 역사적인 순서에 있어서는 선후가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를 긍휼하게 여기시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과 세운 언약에 따라 비록 선민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같은 조건이 구비가 되면 언제라도 만민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이미 허용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6)  여섯째,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할례에 대하여 좀더 생각을 해봅니다;

1)    첫째,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방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먼저 주어지고 있습니다(17:9-11). 아브라함의 아들 8명의 자손들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소속이 되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17:12-14).

2)    둘째,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 일부를 난 지 8일만에 잘라내는 것입니다(17:12, 21:4, 4:25). 어째서 남자의 생식기의 일부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남자의 허리에서 자손이 나타난다고 하는 표현과 같이(35:11) 그 생식기를 통하여 자손이라고 하는 생명이 하나님의 씨로서 이 세상에 오기 때문입니다(15:3).

3)    할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시는 시드’(seed)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자손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생각하고서 여호와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언약의 조상들입니다(17:5-6, 25:21, 30:2).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자식을 낳았다고 여기고 있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속에 그 할례의 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창세기에서 더 시원적(始原的, 더 오랜 근원에 대한)인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4:1),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5-26).

(7)  일곱째, 그와 같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 할례의 정신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할례를 받고 계십니다(15:8). 그리고 그 할례의 정신이 하나님의 복음으로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15:9). 하나님께서 축복의 언약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자손들이기에 그들을 모두 자식으로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며 빠짐없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도들은 신앙공동체에서 다른 형제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용납해야 합니다(15:7).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식들이며 긍휼과 구원의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할례의 정신을 이해하고 있는 성도들의 마음가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

(1)  첫째, 그리스도께서 선민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도 회개하는 자를 성도로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두가지 증거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는 히브리정경에서 그러한 사실을 메시아사상과 관련하여 이미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봅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9: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1-5),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11:10).

2)    부활 승천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지상명령이 만민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2)  둘째,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누구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믿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남은 인생을 성도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만민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자를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성도로 받아 들이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지상명령을 수행하게 하시고 하나님 자녀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15:7a).

(3)  셋째,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기관입니다. 교회 안에는 선민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물론 이방인 출신 성도들도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제자답게 이 세상에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서로를 용납하고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주어야 합니다(15:1). 서로를 도와주고 섬겨줌으로써 안으로는 믿음의 성숙을 함께 이루고, 밖으로는 전도와 선교의 열매가 풍성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b).

둘째로,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15:8);

(1)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가운데 만민구원과 관련이 되는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아브람)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 “또 네(아브라함)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22:18), “(이삭)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26:4-5), “땅의 모든 족속이(야곱)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28:14).

(2)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큰 복을 전해주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있습니다(19:4-6). 그것은 참으로 좋은 취지입니다. 그 취지의 선함을 아시고 그 일을 이루고자 예수님께서 할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15:8a).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만민구원에 나서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그 선민의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3)  그것은 육신의 징표에 불과한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하는 할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할례라고 하는 것은 할례의 뜻을 내면화하고 만민구원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15:8b). 그 개념을 모세오경에서 벌써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신의 할례를 자랑하지 말고 할례의 정신을 기리고 실천하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10:16). 참고로, 마음에 할례를 한 자들이 창세기에서 벌써 밝히고 있는 내용 그대로 만민에게 구원의 복을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는 선민”(22:18, 26:4-5)이며 오늘날의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15:9);

(1)  선민들에게 육신적인 할례의 징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은 그 할례의 표시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손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그 이유와 목적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    선민으로 택하여 삼으신 이유는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평생 이방인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가나안과 블레셋과 애굽의 땅에서 수많은 족속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2)    선민으로 삼으신 목적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큰 복을 전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육체적인 할례의 표시만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례의 의미를 잊어버린 선민들이 구원에서 멀어지고 그 대신에 할례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사실을 앞절에서 말하면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15:9); 그 의미를 풀이해봅니다;

1)    첫째, 이방인들이 구원의 복을 받아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겉으로 보면 선민들이 할례의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반사적인 이익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은혜와 긍휼이 만민에게 골고루 미치고 있는데 그것을 이방인들이 늦게 깨닫고 있을 뿐입니다. 뒤늦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서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15:9a).

3)    셋째, 이제는 육체적인 할례가 있고 없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로지 누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와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 곧 성도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    넷째, 선민과 이방인이라고 하는 인위적인 구분을 뛰어넘어 온 세상에서 주님의 성도들이 성공적으로 만민구원사업을 전개한다는 예언을 시편에서 다윗 왕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18:49). 그 내용을 사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15:9b);

결론적으로, 성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따르면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몸인 성도와 교회가 거룩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한 성도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습니다(9:12-13, 18:14).

거룩하지 못한 자를 목자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시고 성화의 과정을 거치도록 조치하셨기에 믿음이 강한 성도들이 믿음이 약한 자를 보호하고 말씀으로 믿음의 성숙을 이루도록 도와 주어야만 합니다(15:1).

그와 같은 일을 담당하라고 사도 바울은 과거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선민으로 선택이 되었고 이제는 이방인들이 성도로 부름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만민을 사랑하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공의의 정신의 발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그 뜻을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신앙공동체를 운영하라고 거듭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함께 믿음의 성숙을 이루고 만민구원에 최선을 다하시는 성도님들의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