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9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6. 22:24

로마서 강해 제96(15:4-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4 6()

 

히브리정경은 위로와 소망을 주며 그리스도는 신앙생활의 본이 된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하여(15:4-6);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신앙의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주전 8세기 말에 선지자 이사야가 장차 오시는 여호와의 의로운 종에 관하여 말하면서 메시아가 대속의 제물이 되는 삶을 선택하여 평생을 살아가지만 세상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배척하고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53). 그와 같은 예언의 원형을 시편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주전 10세기에 다윗왕이 시편 제69편과 110편에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 시편 제69편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69:7-9). 그 내용의 일부를 사도 바울이 인용을 하면서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멸시와 비방을 받게 되었다”(15:3)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이기적이고도 집단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이기적인 풍조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배척을 받거나 비방을 받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2)    반면에 그리스도의 믿음의 본을 따라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거나 모든 피조물과 이웃의 생명을 살리고자 애를 쓰게 되면 배척과 비방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3)  셋째, 그런 줄 번연히 알면서도 사도 바울은 어째서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기쁨이나 유익을 먼저 구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웃의 생명을 구원하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할 수 있을지 그 일에 전념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1)    첫째, 히브리정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메시아의 오심에 관한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믿음의 열조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소망하면서 인내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11:13-16). 장차 메시아가 오시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하는 그 예언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큰 위로를 얻고 있는지 모릅니다(15:4). 히브리정경에서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둘째, 이제 히브리정경의 예언대로 메시아가 오시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초대교회시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본을 받아 자신의 세상적인 기쁨과 유익을 내려놓고 죄인을 구원하는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15:5).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비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성도의 삶입니다(15:3).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믿음의 성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길이기 때문입니다(15:1-2).

(4)  넷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신앙공동체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6-7).

1)    풀이를 해보자면, ①무엇보다도 교회는 한마음과 한 뜻으로 성도들이 신앙고백을 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그리스도와 같은 삶으로 영광을 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15:6). ②한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서로 마음이 맞고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끼리 신앙공동체를 구성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2)    그것은 믿음이 약한 자를 받아들여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양육하는 그러한 신앙공동체를 말하고 있습니다(15:7). 특히 사도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초대교회에 대하여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15:8). 그 점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선민과 이방인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께서 할례까지 받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선택의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 번 강해로 미루어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글을 작성하여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읽게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글이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히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 자신의 영적인 체험과 이론적인 고찰은 오늘날에도 성도들에게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인내로써 믿음의 성숙을 이루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히브리정경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15:4a);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서를 작성하고 있던 시점은 주후 50년대와 60년대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1)    이 세상에 공관복음이 주후 60년대에 나타났다고 한다면 50년대에 작성이 된 사도 바울의 글은 공관복음 이전의 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초기서신과 로마서 등 교리서에 속하는 글들을 작성하여 초대교회에 회람하고 있을 때에는 이 세상에 히브리정경만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로마서 본문의 글을 기술하고 있는 시점에 있어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15:4aa)는 히브리정경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사도 바울은 히브리정경에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메시아의 복음사역으로 집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성도로 모여 있는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히브리정경이 교훈을 주고 있는 기록입니다;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15:4ab). 그러한 맥락에서 로마서 이전에 쓰여진 사도 바울의 서신서도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2)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b); 어떠한 교훈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히브리정경에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찾아내어 그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직이 율법선생인 랍비였기에 바울은 히브리정경에 정통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에 관한 예언에 대해서도 박식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히브리정경을 연구하여 많은 교훈을 얻고 있는 것일까요?(15:4a) 그리고 그 교훈이 어째서 성도들에게 인내 위로소망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15:4b) 그 이유는 메시아에 관한 그의 관점이 다음과 같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1)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형상으로 만나기 이전에는 히브리정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에 관하여 달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유대인들의 오랜 소원을 성취해주는 그러한 정치적인 메시아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는 다윗 제국을 재건하고 선민 유대인들의 영광을 사해에 떨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외세인 로마와 헤롯 왕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것입니다. 그러한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하면서 히브리정경의 예언들을 공부하였기에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2)    그런데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만난 이후에는 거듭난 인생 곧 이방인 사도인 바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에 관한 그의 개념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단지 선민 유대인들의 독립과 영광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까지 만민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의 구원을 누리게 해주고자 이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히브리정경에 풍부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눈에 그동안 그러한 하나님의 진리와 역사섭리가 가리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의 이기적인 신앙생활과 현세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뜻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며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3)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제 자기 눈에 씌워져 있던 가리개를 벗고서 히브리정경에서 메시아를 다시 발견하고서 많은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교훈을 묵상하면서 인내의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성숙이 무엇인지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매우 함축적인 간증이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제 인내위로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15:5);

(1)  이 세상에서 3 6개월을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기간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많은 시험과 비난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음모로 불법적으로 체포를 당하시고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하나님 참람죄로 전격적으로 정죄가 됩니다. 사형집행권을 가진 로마총독에게 넘겨져서는 유대교지도자들의 거짓고발로 로마황제에 대하여 반역을 도모하는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 처형에 처해집니다. 여기까지가 자기를 부인하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고난의 일생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2)  사도 바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 다음에 예수님에게 발생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3일 후 무덤속에서 부활하십니다. 40일 후에는 베다니에서 승천하십니다.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온세상에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그 길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입니다.

(3)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그때까지 계속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을 바라보면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끝까지 인내하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끈질긴 인내의 기도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끝까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것이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28:18-20, 15:5).

셋째로,한마음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15:6); 모두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사도 바울이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으로 발생한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그러하듯이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하여 다시 역동적인 성장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성도의 사명이며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모든 초대교회가 예루살렘교회나 시리아의 안디옥교회의 거룩한 모습을 본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신앙공동체의 귀감이 되고 있는 그 두 교회의 모습을 다시 음미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3,000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2:41-42),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6-47),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1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5-26),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2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13:2-3).

그러므로 아무쪼록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공동체가 초대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처럼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함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믿음의 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