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9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4. 17:54

로마서 강해 제92(14:13-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4 2(주일)

 

자신의 애로사항을 하나님께만 직접 고하고 사람들에게는 고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건설하고자 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하여(14:13-17);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창세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요셉의 이야기가 참으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17세의 요셉이 이복형들의 배신으로 노예가 되어 이웃나라 애굽의 수도로 팔려가 권력자 집안의 종으로 살아가게 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발견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감으로써 형통의 복을 받아 30세에 애굽 제국의 총리로 세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가 피붙이 하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애굽 제국에서 갑자기 종의 신세로 살게 된 17세의 청소년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이복형들을 애굽에서 원망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문물과 문화가 완전히 다른 이국 땅에서 남의 노예가 되어 홀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되는 자신의 처지가 막막합니다.

그때 요셉은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됩니다. 17세의 청소년 요셉이 객지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발견한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오로지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동아줄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한 요셉은 모든 일을 여호와께 보고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살아가고자 결심합니다. 그러자 요셉 앞에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이 되고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국 땅에서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합니다. 따라서 요셉은 모든 원한을 조상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맡겨드립니다. 그리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말씀 따라 살아갈 것이니 자신에게 이국 땅 애굽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형통함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이 가나안과 애굽 양국의 문물을 모두 섭렵하고 가장 빠른 시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을 받게 되는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그러한 모습의 비밀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나가는데 있어서 모든 애로사항을 하나님께만 직접 고하고 사람들에게는 곧바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14:12). 왜냐하면, 가장 큰 애로사항이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여쭈어보지 아니하고 바로 말하게 되면 형제들과 서로 부딪히게 되고 비판을 주고 받게 될 것입니다(14:13).

(2)  둘째, 청년 요셉은 고향 가나안 땅에서 익힌 문물과 생활방식을 애굽의 수도에서 애굽의 것과 상호비교를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서로 부정을 탄다고 하여 멀리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서로의 편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43:32, 7:5, 10:14-15). 그와 같은 입장이 사도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14).

(3)  셋째, 훗날 요셉이 자신을 미워하여 상단에 노예로 팔았던 이복형들을 용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7-8).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으로 사도 바울과 성도들의 거듭난 인생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식단문제로 형제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관용함으로써 함께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14:15).

(4)  넷째, 그 어떤 세상적인 가치체계가 창조주께서 원하시는 생명구원과 공의의 정신을 해치거나 방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최고의 가치를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함께 들어가는 그 일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6-17).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4:13);

(1)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제12장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12:18)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가 있을까요? 두가지 사실을 명심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①첫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너희로서는의 의미입니다(12:18). ②둘째,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복음으로 전하시고 모든 병자와 장애자 그리고 백성들의 약함을 고쳐 주신 분입니다. 자신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을 물리치거나 비판하지 아니했습니다(6:39). 오로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했을 뿐입니다.

(2)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다음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4:13). 사랑과 희생으로 형제를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잘못을 비판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한다면 역효과가 날 뿐입니다. 그 옛날 수많은 선지자들을 파송하여 후자와 같이 사역하게 했지만 선민들의 마음이 돌아서지를 아니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희생했을 때에만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서 하나님께 나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지적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14:14-15);

(1)  먼저, 사도 베드로가 어째서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방문할 수 있게 되는지 그 대목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첫째,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는 로마의 총독이 해변도시 가이사랴에 살면서 그곳에 로마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습니다(10:1). 그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로마인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습니다(10:2). 그는 하나님 사자의 말을 듣고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해변도시 욥바를 방문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를 청하고자 사람을 보내고 있습니다(10:5-8).

2)    둘째, 베드로는 선민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선민 유대인들에게만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상 가운데 깨달음을 주십니다. 부정한 것들이 담긴 그릇을 하늘에서 땅으로 베드로 앞에 내려 보냅니다(10:11). 그리고 그 부정한 것들을 먹으라고 합니다(10:13). 베드로가 거절하자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0:15).

3)    셋째,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인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때 맞추어 그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10:17-18). 그리고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들을 따라 가서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10:20).

4)    넷째, 사도 베드로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하고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죄 사함과 화평의 복음을 전하자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이방인의 가정에 성령세례가 임하고 있습니다(10:45-46).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 가족들에게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고 있습니다(10:47-48).

(2)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받아 들이고 회개함으로써 성령의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이 그들의 율법에 비추어 이방인들은 그 식단에서부터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문제이지 이방인들의 구원에 하등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14). 더 이상 식단의 율법이 구원의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이방인들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율법에 따른 식단이라는 걸림돌을 그들에게 부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만민을 구원하고자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형제를 미워하여 율법의 의무를 강제하여 믿음에서 넘어지게 만들고자 하는 악한 계교입니다. 그와 같이 분석하면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형제사랑과 믿음의 의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14:15).

셋째로,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평강희락이라”(14:16-17);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4:16); 모세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선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33:19),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사역과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믿는 자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선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이 그 일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사역을 통하여 생명을 살리고 있는 그 일에 있어서 인간의 생각으로 부정하다고 하거나 누구는 신앙공동체에 받아 들일 수가 없다고 제한을 두는 것은 금물입니다. 만약 성도가 다른 형제에 대하여 그러한 제한을 둔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선한 역사를 비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14:16).

(2)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14:17a); 사도 바울의 표현이 명쾌합니다. 그렇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생명력을 확보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는 그러한 육신적인 먹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신앙공동체에서 자꾸만 먹는 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이방인들의 부정한 음식이므로 율법에 비추어 그것을 금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처사입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먹는 것의 부정과 정결함에 의하여 좌우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이상한 신앙 태도입니다. 참고로, 창세기 제6장에서 노아의 방주와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노아의 방주에 타고 있는 그 많은 육식동물들이 방주 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식물성 먹거리 만으로 1년 이상을 버티고 있습니다(6:19-22). 그 방주 안에서는 힘센 짐승이 약한 짐승을 잡아먹는 정글의 법칙이 성립이 되지를 못합니다(6:11-13). 하나님의 영생의 능력이 숨을 쉬고 있기에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오직 성령 안에 있는 평강희락이라”(14:17b); 이제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옳다고 시비를 가릴 일이 아닙니다. 서로가 합심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나가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신앙공동체에서는 서로 믿고 의지하며 격려와 사랑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작업은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공동체에는 사도 바울이 세가지가 넘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평강희락”(14:17b)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제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5:2-3). 이 땅에서는 아무리 입어도 영적으로 마치 벗은 자와 같다는 사도 바울의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들이 구원의 받아 겨우 의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신앙 공동체이므로 불완전하고 서로 비판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얼마나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고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게 되면 평강희락이 회복이 됩니다(14:17b).

그와 같은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창조의 능력을 바라보고서 오늘도 형제사랑에 나서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넘치는 신앙공동체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