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8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3. 15:53

로마서 강해 제89(14: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30()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14:1-4)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은(14:1-4) 그 의미에 있어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12:31, 12:5, 10). 그리고 사도 바울의 로마서보다 약 35년 후에 저술이 된 것으로 보이는 사도 요한의 제4복음서 제6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그 맥이 통하고 있습니다(6:37-40). 먼저 그 두가지 사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도가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민과 만물을 모두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끔찍이 사랑하십니다. 더구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여 그 청지기의 일을 맡기고 있습니다(1:26-27).

(2)  둘째, 성도가 자신의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창조물의 죄를 속죄하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1:29. 3:13-17). 성도들은 그리스도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자신의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고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이익을 부인하고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16:24, 12:30-31).

(3)  셋째,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자신처럼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과 생명살림의 일생을 본받고 있는 제자로서 성도들은 만민을 사랑하고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하기 위하여 헌신해야만 합니다(28:18-20, 21:15-19). 따라서 당장 자신이 속하고 있는 신앙공동체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지역공동체에서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고 그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4)  넷째, 공생애를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37-40).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1)    첫째, 성도들은 형제와 이웃을 해쳐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자신에게 보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처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2)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어 주신 형제이며 이웃들이므로 그들을 돌보고 그 생명을 구원하여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3)    셋째,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 나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귀한 생명들임을 한시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채소만 먹느니라”(14:1-2);

(1)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은사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이 벌써 제12장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12:3-8). 여기서 사도 바울이 은혜은사라고 하는 두가지 용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다음과 같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1)    첫째, ‘은혜는 모든 사람과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5:45).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를 보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동일하게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10:9-13). 그와 같은 기준으로 모든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님으로 믿고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2)    둘째, 그러나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지체에게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12:3). 그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각 지체들이 맡고 있는 기능과 역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이 달리 주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12:4-5). 예를 들면, 누구나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분량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합니다(12:6).

3)    셋째, 만약 믿음의 분량이 예언을 할 정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예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도 바울은 그 위험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마디로, “믿음의 분수를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12:6). 하나님께서 그 믿음의 분량을 보시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하게 자신의 욕심으로 다른 높은 믿음의 분량이 요구하고 있는 일을 하려고 달려 들었다가는 지체 간의 융화와 질서를 해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미리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2)  각 지체가 수행해야만 하는 기능에 적합한 믿음의 분량이 주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의 직무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직무와 상관없이 사실 성도의 믿음이란 성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가 처음 신앙공동체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 믿음의 수준이 연약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공동체 내에서 함께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믿음이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직분을 맡아서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14:1-2).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3)  먼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14:1)는 구절은 일반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신앙공동체에서 함께 생활을 하게 된 성도는 아직 믿음이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익히고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와 같은 초보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를 예수님의 제자로서 잘 양육하는 것이 신앙공동체에 주어지고 있는 책무입니다. 그런데 종종 그러하지를 못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의 행동을 보고서 그 의견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기가 쉽습니다.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두가지의 뜻을 어기게 됩니다; ①첫째, 그 초보적인 성도를 그 신앙공동체에 보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6:38-40). ②둘째,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그 믿음이 연약한 자를 잘 양육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송하여야 하는데 그 일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입니다(10:1, 28:18-20, 1:8, 13:2-3).

(4)  사도 바울은 당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초대교회 내의 갈등 하나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채소만 먹느니라”(14:2);

1)    그 갈등은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깨끗한 음식만 고집하느냐? 아니면 일찍이 사도 베드로가 그러한 것처럼 주님의 뜻을 따라 이방인의 음식까지 믿음으로 먹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느냐?의 문제입니다(10:10-20). 전통적인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선민우월사상만 고집하게 되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으로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어느 이방인이 자신의 전통과 생활양식을 모두 버리고 유대인처럼 되어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2)    그러므로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 선민구원사상과 율법의 의를 강조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믿음의 의를 말하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그 핵심을 파악하고 있습니다(10:2-10).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토록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믿음의 의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4:3-25).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식사를 하실 때에 결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당한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15:2, 7:2).

3)    그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이방인들에게 나아가는 믿음의 의를 말씀하십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를 고수하고자 하는 자들은 마치 채소만을 먹고 있는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4:2b). 그리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믿음에 대하여(10:10-48)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14:2a).

둘째로,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14:3); 초대교회 내에서 크게 보아 두 파가 나타나 갈등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구원을 받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유대인들처럼 할례와 율법을 모두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소위 유대주의자들입니다. ②또 하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믿고 그 제자로 살아가면 구원받은 자가 된다고 하는 이방인 성도들과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도들입니다. 이방인 사도인 바울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습니다;

(1)  바울의 의견은 한편으로는 양비론’(兩非論, 둘 다 틀렸다고 하는 견해)이며 또 한편으로는 양시론’(兩是論, 둘 다 맞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14:3a)는 구절이 양비론에 속하고 있는 반면에,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14:3b)는 구절이 양시론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지 그 근원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사도 바울은 이방도시를 처음 방문하게 되면 먼저 유대인들이 모여서 안식일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포들의 회당을 찾아 갑니다(13:14, 14:1). 그곳에서 유대인 교포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 결과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성도가 발생하게 되면 별도로 성도들의 가정에 초대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는 이방인성도들도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 경우에 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이 함께 음식을 먹는 문제입니다.

(3)  같은 성도라고 하더라도 교회 내에서 유대인들의 식사와 이방인들의 식사가 많이 다릅니다. 선민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여전히 히브리정경에서 말하고 있는 식단을 고집하고 있습니다(11). 그리고 그것을 믿음의 분량이 큰 것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방인 출신 성도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히브리정경에서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식단을 생활화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그들은 졸지에 유대인 성도들로부터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놀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억울한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적인 시각에서 사도 바울도 유대주의자들의 의견이 극단적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4)  따라서 사도 바울은 율법에 따른 식단으로 식사를 하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믿음이 연약하거나 크다고 말하거나 비판하지를 말라는 것입니다(14:3a). 그 이유는 선민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식단에 상관없이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는 그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14:3b). 그 의미는 세상에는 민족에 따라 채식주의자도 있고 육식주의자도 있으며 그들의 전통에 따라 식단이 다를 수가 있음을 아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것에 개의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14:4); 성도가 신앙공동체 내에서 서로 자신의 믿음의 분량이 더 크다고 자랑하거나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비판해서는 안되는 이유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14:3b)고 앞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믿음이 크다고 자랑하는 자는 주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자와 같습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14:4a). 왜냐하면, 그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신앙공동체에 받아들이고 앞으로 믿음이 성장하도록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받아들이시고 종으로 훈련시키고 있는 그 성도에 대하여 함부로 비판하게 되면 그 멸시와 비판이 누구에게 돌아가게 될까요? 일단은 주인이신 주님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믿음이 크다고 자랑하고 있는 그 자도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뜻을 저버린 잘못을 범한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둘째,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모두 주님의 제자이며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이 세상에 복음전파자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이든지 믿음이 장성한 자이든지 모두 주님께서 적재적소에 사용하십니다. 비록 시행착오는 있을지라도 성도들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더 크게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이 연약하고 실족하고 있다고 하여 극단적으로 비난하고 멸시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고쳐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서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14:4b).

(3)  셋째,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주인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주님께서 그 종으로 사용하시는 성도나 목자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난할 것이 아닙니다. 그 인사권과 궁극적인 치리권은 피로 그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14:4c).

결론적으로, 한가지 예화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사무엘상 제24장과 제26장에 두 차례나 비슷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사울 왕에게 쫓겨서 고달픈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는 다윗 장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앞에 사울의 목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두번이나 주고 있습니다. 호기를 만난 부관들이 다윗에게 사울 왕의 목을 칠 수 있도록 즉시 명령을 내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젊은 장군 다윗이 끝내 반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종의 목을 사람이 함부로 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삼상24:2-7, 26:2-12).

주인이신 주님의 허락이 없는데 종이 또다른 종의 목을 쳐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종에 대한 인사권자는 주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치가 된 다윗 왕의 신앙 자세이며 마음가짐입니다(13:22). 그러므로 아무쪼록 주님이시며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권한을 인정하고 함부로 침범하지 아니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