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9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4. 03:31

로마서 강해 제90(14:5-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31()

 

사도 바울의 엄숙한 질문, “나는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주님처럼 살아가고 있는가?”(14:5-9)

 

사도 바울이 죽기 살기로 이방인 사도의 삶을 끈질기게 살아가면서 과연 그는 무엇을 얻기를 원하고 있는 것일까요? 모든 것을 떠나 보내더라도 그가 마지막으로 끝까지 붙들고 그로 말미암아 얻고자 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3:7-16).

당시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 바울의 처지와 형편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는 초대교회의 분규의 와중에서 결코 그 심정이 편하지 아니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서의 발걸음을 조금도 늦추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결코 손에서 놓을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드디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입을 열고 있습니다(14:5-9). 그런데 그 설명의 방법이 상당히 독특하며 그 속에 심오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차후 분석적인 강해에 도움이 되도록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끊임없는 시비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 공생애 당시의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조건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3 6개월간 공생애를 함께한 남자제자여야 합니다(6:65-69, 1:21-23). 그런데 전혀 공생애를 함께한 이력이 없는 바울이나 바나바가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4:36-37, 8:1-3) 그것은 정통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비판이 초대교회에서 널리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렇지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의사 누가가 자신이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사도라고 불러주고 있습니다(13:46, 14:3, 5, 14, 26). 그리고 사도행전이 정경상 유일한 초대교회의 역사서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시비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섭리를 통하여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받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신 것일까요? 그 의도가 궁금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을 해봅니다;

1)    첫째, 바울이 사도로 불리게 됨으로써 오늘날 성도들이 큰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만나고 공생애 당시에 제자로 끝까지 따라다닌 사도는 12명에 불과합니다(6:66-67). 그것은 엄청난 특혜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서 제자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의 제자들은 사도가 될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초대교회가 출범한 이후 성도들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옛날 선지자와 같은 복을 벌써 누리고 있습니다(13:1, 15:32, 21:10). 더구나 오늘날에도 주님의 지상명령을 신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28:18-20, 1:8).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여 선교사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일이 사도 바울과 동일하므로 영적인 의미로서는 사도라고 부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 바울만큼 히브리정경에 밝아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하여 철저하게 규명하고 기록으로 남겨준 사도가 없습니다. 예수님 생전의 12사도 가운데 정경에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자는 사도 마태와 요한 그리고 사도 베드로 등 3사람입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요한1,2,3서와 요한계시록, 베드로전서와 후서 등 도합 8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서신이 총 13권입니다. 기록상으로 보아서도 바울이 사도로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3)    셋째, 바울이 선교한 유럽지역에서 훗날 로마교황청이 발생하고 그것이 기독교역사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융성했던 예루살렘교회, 시리아의 안디옥교회, 애굽의 알렉산드리아교회 등이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로마교회만은 교황청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으며 오랜 세월 기독교를 파수하고 있습니다.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마치 유대교인들이 히브리정경을 오래 보전하고 파수하여 기독교인들에게 구약으로 넘겨준 것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가 그 속에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3)  하지만 바울이 활동하고 있던 당시에 있어서는 그가 그러한 사도의 인정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스스로 그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칭하고 있지만(1:1, 고전1:1, 고후1:1, 1:1) 그 사도의 권위 자체가 시비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후속 사도라고 말하고 있는 의사 누가의 기록도 편파적인 것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 누가는 사도 바울의 열렬한 팬이기 때문입니다;

1)    누가는 바울의 선교여행에 주치의로서 참여하고 있습니다(4:14, 딤후4:11). 그리고 누가는 시리아 안디옥 출신이며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11:25-26, 13:1-3). 더구나 바울과 누가는 헬라의 철학과 학문에 밝으며 유대교에 대해서도 정통하고 있다고 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사 누가는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하면서 마치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는 자입니다.

2)    그러한 누가가 이왕 초대교회의 형성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바울만한 선교사가 없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초대교회의 역사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결론을 맺을 수가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사도 바울의 회심의 독특성에 기초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간증과 교훈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3)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생전의 12사도들이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이야기를 바울이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박해한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8:3, 9:1-2, 22:3-4, 딤전1:15). 당시에 그는 바리새인이며 랍비인 사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보시기에 사울은 참으로 고약한 죄인입니다. 그러한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환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4)    그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자신을 사울이 핍박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9:4-5).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랍비 사울은 오랜 묵상의 시간을 가집니다. 아라비아 하나님의 산 호렙도 방문하고 고향 다소성에서 수년간 히브리정경을 다시 공부하고 메시아에 관하여 묵상을 합니다(1:11-2:1). 그 결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가 전하고 있는 바와 같은 하나님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①첫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②둘째,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3 6개월간 제자들과 함께 복음사역을 하면서 공생애를 사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십니다. ③셋째,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무덤속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십니다. ④넷째, 아버지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자리를 함께하시고 지금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성령님을 통하여 인도하십니다. ⑤다섯째, 승천하신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종말심판과 하나님나라의 완성이 그때 이루어질 것입니다(고전15:24). ⑥여섯째, 주님께서 오시는 날 성도들과 함께 부활과 영생에 참여하기 위하여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 남은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5)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 랍비 사울은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후속 사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면서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 확신하게 됨으로써 이제는 여러 성도들에게 자신처럼 영적으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제자로 살아가면서 이방인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14:8, 고전11:1, 3:16).

(4)  둘째, 또한 바울은 초대교회 여러 파벌 간의 충돌과 갈등의 와중에 휘말리고 있어 그 심정이 심히 괴롭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아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수장으로 부르면서 교회내에 바울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고전3:4). 성도들이 교회내에서 할례와 율법도 온전히 지켜야만 한다는 유대주의자, 베드로가 정통이라고 하는 베드로파,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처럼 헬라식으로 복음을 해석해야 한다는 아볼로파 등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분규가 두가지 이슈입니다; ①하나는 율법에 따른 유대인들의 식단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주의자의 주장이 강경하기 때문에 주후 49년경 예루살렘 총회가 소집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꼭 필요한 제약 외에는 강요하지 아니하기로 결론이 나고 있습니다(15:19-21). ②또 하나는 전통적인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안식일에도 예배를 드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에도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문제입니다(2:1, 41-42, 46, 20:7, 고전16:2).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사실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14:5);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14:5a); 초대교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안식일을 중시하고 있는 유대주의자와 그렇지 아니한 유대인 성도들 및 이방인 성도들의 견해의 충돌과 갈등입니다; ①유대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토요일이 안식일이므로 그날 예배를 드리고 떡을 떼는 성찬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②그 반면에 이방인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날 곧 안식 후 첫날에(28:1-10) 예배를 드리고 떡을 떼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20:7). 그리고 일부 유대교성도들이 그 의견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날 성령님의 강림과 성도들에게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2:1, 41-42). 그날이 두번째 초실절이며 토요일 안식 후 첫날입니다. 유대주의자와 유대주의자가 아닌 성도들 사이의 견해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요?

(2)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14:5b); 사도 바울의 견해가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그 제3의 사람과 같은 의견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떡을 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예배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취지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면 성도들이 로마서 제12장에 기록된 영적 예배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거듭난 성도가 남은 세월을 전부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어느 날을 중하게 여기고 다른 날을 덜 중하게 여길 이유가 하등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다 함께 모여서 일주일 가운데 하루나 이틀 공중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가지는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배인생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3)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14:5c); 성도의 마음속에 누가 계시는 것일까요? 성도들은 각각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서 한번 생각해보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리하면 성도들의 심령속에 내주하여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답변하실 것입니다. 하루나 이틀이 아니고 언제나 함께 동거하시고 동행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답은 종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목숨을 걸고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그 모든 날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고 한다면 각자 자신들의 신앙 양심에 비추어 믿음의 분량대로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여운을 남기면서 사도 바울이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14:5c)고 온유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14:6);

(1)  성도들은 거듭난 그 순간부터 사실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 전에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죄인들이었지만 더 이상 그러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어서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은지 또는 어떠한 식단의 음식을 먹는 것이 좋은지는 그 결론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공생애 기간의 예수님처럼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시면 됩니다.

(2)  참고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전체 기간이 복음사역의 날입니다. 매일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치유의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하신 예수님 앞에서 성도들이 안식일 예배가 옳습니다또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주일이 더 낫습니다라고 서로 논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에서 정한 식단이 옳습니다 라고 강변할 수도 없습니다. 이방 땅에 전도를 나가신 예수님께서 식사만은 율법에 따라서 그대로 하셨다는 구절이 복음서에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중요했다고 하면 복음서의 저자들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꼭 그대로 기록을 하라고 역사하셨을 것입니다.

(3)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내려놓고 오로지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세명의 사도가 변화산상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듯이(17:1-8)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14:6); 조금만 설명을 덧붙여 봅니다;

1)    사도 바울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며 또한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은 인생을 오로지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삶으로 일관하고자 합니다.

2)    그와 같이 사명이 분명하므로 매일 모든 일들이 주님의 뜻을 성취하는 그것으로 기쁘고 만족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특정한 날과 식단이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어떠한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만약 그것이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사명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그 일에 매어 달려서는 아니될 것입니다”(14:6 의역).

셋째로,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7-8);

(1)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이제 주님의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따라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뜻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제12장 첫머리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2)  간략하게 풀이합니다; ①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②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생명살림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이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③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영생구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세적인 셈법으로는 완전한 보상이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그에 따라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희생하고 봉사한 그 모든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3)  요컨대, 성도들은 거룩한 산제물로 대속의 삶을 살아가신 주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진작에 사도들에게 제자의 길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그 말을 구체적으로 잘 풀이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설명이 위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7-8).

넷째로,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14:9);

(1)  그리스도께서 왜 모든 성도들의 주인이신 주님이 되셔야만 하는 것일까요? 환언하면 모든 성도들은 어째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방법이 아니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벌써 로마서 제1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그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람들이 율법을 온전히 실천하게 되면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민 유대인들도 자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2)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속죄하며 의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을 이 세상에 알게 하십니다. 선지자들이 히브리정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오심이 그것을 위한 것입니다.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십니다.

3)    셋째,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4)    넷째,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 성도들이 남은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5)    다섯째,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성도들의 거듭난 삶 그 영적인 삶이 바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  한편, 공생애를 통하여 복음사역을 열심히 하시던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시자 그를 추종하던 제자들과 백성들이 모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 3일만에 무덤에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자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대속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 일부 성도들이 다시 율법으로 구원의 의를 완성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 언약이 아니라 옛날의 언약으로 되돌아가자고 하는 사상입니다.

(4)  요컨대,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희생을 통하여 일구어 낸 구원의 길을 감히 막아 서고 있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성도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14:8-9).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모든 시시비비의 종착역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권위있는 해석과 최종결정이 전부 주님에게 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하여 어떻게 복음사역을 하셨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속에서 시시비비에 대한 정답이 발견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듭난 성도의 인생에 있어서 그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맡기신 그 사명에 교회내의 여러가지 논쟁이 어울리는 것인지를 먼저 점검해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단순한 지엽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사도 바울의 권면을 되돌아보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