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8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1. 17:45

로마서 강해 제85(13: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26(주일)

 

악을 행하는 자를 징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동원하시는 세상적인 권력자들에 대하여(13:1-4);

 

사도 바울의 로마서 제13장은 짧지만 그 풀이가 쉽지 아니한 글입니다. 잘못 해석을 하게 되면 불필요한 논쟁 가운데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아 두가지 논쟁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그리스도인과 세상권세와의 관계에 대하여(13:1-7) 사도 바울이 과감하게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3:1)고 전제하면서 기술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잘못 이해를 하게 되면 마치 사도 바울이 로마제국의 권력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이 글을 적고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과연 그럴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와 같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이 과연 무엇일까요?

(2)  둘째, 구원의 때가 가까워졌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대목에 있어서도(13:11-14)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성도의 삶이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진행이 되고 있다고 한다면 현재 성도가 누리고 있는 구원이 영 불완전한 것이 아니냐?고 하는 의구심과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게 됩니다. 과연 그렇게 불완전한 구원을 얻고서 성도들이 이 땅에서 복음사역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역시 깊숙한 성찰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여기 본문과 관련하여(13:1-4) 먼저 다음과 같이 사도 바울이 무엇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적고 있는지 조금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세계선교에 나서는 주후 47년경 로마의 황제는 클라우디우스(재위 AD 41-54)입니다.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는데 있어서 친구인 헤롯 아그립바1세가 큰 기여를 합니다. 따라서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립바1세에게 유대 땅과 그 주변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고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호의적입니다. 하지만 로마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여러 번 폭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유대교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유대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성도들을 핍박하고 또한 제국을 경영하고 있는 로마인들과도 잘 어울리지를 못한 결과입니다. 이에 따라 40년대 후반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로마시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내고 맙니다. 때마침 로마제국에 큰 흉년이 들어 인심마저 흉흉해지고 있어 그러한 강력한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2)  둘째, 주후 50년대초에 그리스의 고린도를 방문한 사도 바울이 로마시에서 쫓겨나 고린도에서 천막을 짜는 업을 영위하고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18:1-4). 그들 부부로부터 로마시에서의 유대인들의 삶과 로마교회의 사정에 대하여 듣게 됩니다. 그들 부부는 로마의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가 주후 54년에 서거하고 네로가 즉위하게 되자 추방령이 풀리게 되어 로마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때쯤 사도 바울이 그들 부부에게 안부도 전할 겸 로마서로 알려지고 있는 이 서신을 작성하여 뵈뵈 편으로 로마교회에 전달하고 있습니다(16:1-3).

(3)  셋째, 로마서를 작성하면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면 로마교회에 다시 돌아간 유대인 성도들이 로마인 성도들과 잘 어울려서 지낼 수 있을지에 대하여 무지하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 성도들이 로마시에 살고 있는 유대교인들과도 잘 지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자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1)    첫째,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인들과는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달라야만 합니다. 할례와 율법을 강조하는 선민우월의식을 가지고 로마인 성도들을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많은 내용이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둘째, 로마시에서 유대인들이 다시 폭동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 성도들이라도 본문에서와 같이 부디 로마의 권력자들에게 순종하면서 잘 어울려서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에게 부디 사도 바울처럼 친지와 골육인 유대인들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이 모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중보의 기도를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핍박한다고 하여 유대교인들을 원수같이 여겨서는 결코 안됩니다.

(4)  넷째, 사도 바울의 권면이 크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1)    로마시로 되돌아간 유대인 성도들과 유대교인들이 세월이 지나자 다시 다투게 됩니다. 주후 60년대가 넘어서자 유대인 성도의 수가 유대교인들보다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자 로마인들의 눈에는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이 마치 폭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비치게 됩니다.

2)    참고로, 주후 54년에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인 네로가 제5대 황제가 되자 그는 처음에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추방령이 풀리고 유대인들이 로마시로 되돌아오지만 그것을 규제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골적인 기질의 유대인들이 서서히 눈에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황제숭배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3)    그러한 로마권력자들의 의중을 모르고서 로마시에서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이 신중하지 못하게 행동합니다. 수가 많아지자 득세를 하고서 이제는 유대교인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64년경 로마시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합니다. 그러자 네로 황제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것이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의 고의적인 방화라고 모함을 합니다. 그 결과 끔찍한 기독교인 박해가 로마시에서 발생합니다. 학자들은 그때 사도 바울이 체포를 당하고 65년경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5)  다섯째, 마치 10년 후에 발생할 그와 같은 훗날의 역사를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얼마나 로마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비록 세상권력자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무시하고서 신중하지 못하게 처신을 한다면 커다란 불행을 자초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째서 그러한 세상권력을 하나님께서 허용하고 계시는지를 깊이 생각해보라는 당부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13:1);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13:1a); ‘위에 있는 권세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사회나 국가의 조직체계에 있어서 상위권력을 말합니다. ②또 하나는 영적인 악한 영을 말하고 있습니다(2:2, 6:12). 그 가운데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전자라고 하겠습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로마서가 아니라 에베소서에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마음에 들지 아니하더라도 상관의 명령에 복종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3:1a).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2)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13:1b); 신통치 아니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러한 사람을 국가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상위직에 임명하고 있는 것은 국가권력이나 사회권력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시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의 견해는 선지자 다니엘과 같습니다;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2:20-21). 겉으로 보면, 하자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도 바울은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13:1b)라고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의중이 궁금합니다. 두가지로 추측을 해봅니다;

1)    첫째, 상급자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고 악한 세력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반대를 하고 나서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자신의 희생이 큰 반면에 그 문제의 해결은 늦어집니다(14:3-12, 23:6-12). 그럴 때에는 하나님께 호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관을 위하여 오히려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 두가지가 있게 되면 숯불을 그 머리에 쌓게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적극 개입하실 것이므로 문제가 생각보다 빨리 해결이 됩니다(12:19-21). 그리고 그 상관에게도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12:14).

2)    둘째, 상관에 대한 판단은 사람인 부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자신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단정하고 재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권력자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들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각 국가나 사회에 있어서 지도자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함부로 반대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는 결과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권력자와 지도자를 달라고 간구할 때에 반드시 나 자신을 변화시켜서 그러한 좋은 상관에게 어울리는 자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변화가 바로 권력자의 변화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울리는 성도의 처신이라고 하겠습니다.

(3)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13:1c); 권세에는 반대의 측면이 있습니다. 그 권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권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의무를 이행했는지 그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1)    만약 저울에 달아서 자질이 부족하고 추가 기울어진다고 하면 권력의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다니엘 선지서가 벨사살 왕의 경우를 가지고 그러한 내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5:25-31). 모든 권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고라처럼 분수에 넘게 큰 권세를 탐내는 것은 삼가해야 합니다(16:3, 7-11, 32-33).

2)    오히려 5달란트가 아니고 2달란트를 맡겨 주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5달란트를 돌보고 그 만큼의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2달란트를 활용하여 2달란트의 이문만 남기면 되는 것이니(25:20-23) 그만큼 여유가 있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큰 권세를 가진 자를 부러워할 일도 무작정 반대할 것도 아닙니다. 그 큰 권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그것이 관심사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그 의무이행에 대하여 따지시고 계산을 철저하게 하실 것임을 재삼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自取, 스스로 취하는 것)하리라”(13:2);

(1)  세상권세와 하나님의 명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서 권세에 복종하라고 무조건 강변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12:31-32).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임금은 권좌에게 쫓겨나도록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자들이 선한 권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쫓겨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3:2)고 버젓이 권면할 수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아직 이 세상에 온전한 하나님나라가 도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파가 되고 구원 받기로 예정이 된 자들이 모두 십자가 앞으로 나아올 때까지는 어차피 과도기입니다(24:14). 과도기에 있어서는 선한 권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상임금이 여전히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당장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겠다고 해방신학자들처럼 총칼을 들고서 일어나는 것은 능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휘두른 사도 베드로와 같습니다(26:52). 권력자들의 일에 대해서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듯이 그렇게 맡겨야만 합니다(12:19). 그 방법이 어리석은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개입을 간구하는 것이기에 더 빠르고도 근본적인 해결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셋째로,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13:3);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13:3a); 한가지 예화를 들어봅니다. 교통순찰차의 소리가 두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는 교통법규를 어겼을 경우입니다. 만약 교통법규를 전혀 어긴 적이 없다고 한다면 순찰차의 소리가 두려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는 권력자들도 백성들이 나라의 법규를 잘 지키고 있을 때에는 입을 대거나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법규를 어기고 있을 경우에는 그 악한 일에 대하여 엄격하게 지적하면서 그 범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행합니다.

(2)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13:3b);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그 절대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라의 법규를 잘 지키고 왕국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좋은 양민으로 살아가게 되면 권력자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됩니다. 국가가 부과하는 세금을 꼬박꼬박 제 때에 잘 내고 있습니다. 국방의 의무도 충실하게 이행합니다. 지역사회의 발전에도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모범이 된다고 칭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13:4);

(1)  위의 구절에서 백성들이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을 나라의 법을 잘 지키고 모범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의미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이제 이 구절에서는 한 차원 높게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손발이 되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뒷받침을 세상적으로 해주시는 것일까요?생명을 돌보고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실천하는 성도들을 도와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자들도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그러한 목적으로 동원이 되는 세상의 권력자들을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3:4a).

(2)  예를 들면, 신바벨론 제국을 주전 539년에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준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인 고레스 황제가 그러합니다(44:28, 45:1-4, 1:1-4). 고레스 황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던 나라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주전 586년에 무너뜨리고(왕하25:1-7) 그 백성을 포로로 끌고 온 악한 제국 신바벨론을 무너뜨리게 하신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45:1-4). 그가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대선지서 이사야의 예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자 즉시 여호와의 뜻을 받들어 유대인들을 자유민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에 의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13:4b).

결론적으로,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세상임금들이 쫓겨나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한 성도들이 부활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22:28-30, 12:31-32). 그러나 그때까지는 과도기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자들이 성도들이 아닌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권세에 대하여 성도들은 어떻게 처신해야만 할까요?

사도 바울은 육신을 입고 있는 성도들이 여전히 세상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자들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의인이며 거룩한 자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불완전하듯이 그들 권력자들 역시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모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할 대상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제12장 말미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 말씀이 성도들의 명심보감이 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 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17-21).

아무쪼록 사도 바울의 위와 같은 권면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