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8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30. 19:27

로마서 강해 제83(12:14-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24()

 

복음의 빛을 드러내는 성도들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12:14-18);

 

박해하는 자들을 성도들이 저주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점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먼저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한번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보시는 눈과 피조물인 사람들이 다른 창조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 다릅니다. 안목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고 창조주이시지만 사람들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1)    창조주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을 평등하게 대하십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창조물이며 아끼고 보살피는 대상들입니다. 필요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한다면 진작에 토기장이의 주권을 행사하시듯이 그렇게 부수어서 완전히 없애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18:4-6, 9:19-20). 지금도 피조물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창조주께서 보시기에 여전히 나름대로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    피조물인 인간들은 창조주처럼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란 본래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그저 그렇게 던져져 있어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만큼 그렇게 소중한 존재들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한정적인 가치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이 없으며 모두에게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한적인 시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우선순위가 다음과 같이 정해집니다; ①첫째가 자신 자신입니다. ②둘째가, 육신적인 피를 함께 나눈 가족입니다. ③셋째가 자신에게 익숙한 친지들과 골육인 동족들입니다. ④넷째가 자신들에게 이익을 주고 있는 기타의 다른 족속들입니다.

3)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적인 생각을 초월하십니다. 시공간에 갇혀서 사고를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계십니다; ①첫째, 이기심과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뛰어 넘으십니다. ②둘째,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피조세계가 지니고 있는 재화의 제한성이라고 하는 구속도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정된 재화를 서로 차지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살기다툼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③셋째, 나아가서 시간적으로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고자 고심하고 있는 사람들의 학문과 지혜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시면서 현재의 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4)    위와 같은 차이를 집약하여 하나의 용어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공의’(righteousness)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공의라고 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피조물인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정신은 정의’(justice)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집단이기주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집단 내에서 이익이 되고 옳은 것이면 정의로운 것으로 인정이 됩니다. 예를 들면, 사회가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합니다. 사회의 규약에 맞으면 정의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법정에서 옳다고 판정이 되면 그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요컨대, 그러한 인간의 법정에서는 자기 중심적이고 집단적인 이익만이 가장 큰 가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타 집단에 대해서는 불이익과 불의가 되고 맙니다.

(2)  둘째,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집단 이기주의에 입각한 정의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현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만민과 만물을 창조주 아버지의 따뜻한 눈으로 다시 바라볼 때에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서 그렇게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 자가 이 세상에 있을까요?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자가 오직 한 사람이 있다고 성경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1)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창조주의 공의를 이 세상에 보여주신다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1-5).

2)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인 자신의 사명이 다음과 같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2-17).

3)    특히 선지자 이사야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계십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4-49).

(3)  셋째, 후속사도인 바울은 온 세상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으며 무덤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3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신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고전15:8). 그 이유는 랍비 사울이었던 자신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가지시고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22:6-21).

2)    영적으로 바울에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으로 전하라고 하시는 그 사명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은 그 속에 사람들의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정의가 아니라 창조주의 안목으로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전부 구원하고자 하는 공의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3)    그에 따라 사도 바울은 사탄과 악한 영들은 미워해야 할 원수들이지만 사람들은 결코 원수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요컨대 사람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사랑하고 구원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기본적인 인식이 본문의 말씀을 들여다볼 수 있는 관건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2:14);

(1)  이 세상에서 박해가 나타나는 이유는 서로 생각과 의식과 문화가 다르며 이익이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유대교가 주장하고 있는 선민구원사상과 나사렛 예수가 주장하고 있는 만민구원사상이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유대교인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처형함으로써 유대교의 분열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합니다(11:49-50).

(2)  선민 유대인들은 이웃 이방나라에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그 이유는 종교가 다르고 민족적인 이익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이방인들은 선민임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을 멸시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회만 있으면 유대 땅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선민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그들 주변의 이방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겨우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고찰할 때 도저히 선민 유대인들은 주변의 이방인들을 축복할 수가 없습니다. 미운 털이 박힌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해주고 싶지가 않습니다(1:1-3).

(3)  그와 같은 역사를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말씀의 뜻이 원수를 미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사도 마태가 주후 60년대에 그와 같은 내용의 예수님의 교훈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3-48).

2)    풀이를 해보자면, 예수님께서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해석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뜻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에 모든 민족과 백성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며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선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원수같이 여기고 미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아니라 선민 자신들의 정의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대교지도자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나사렛 예수의 주장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사살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4)  주후 60년대에 사도 마태가 예수님의 교훈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기 전에 적어도 5년 이상 앞서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실천하라고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2:14). 바울이 그와 같이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환상 가운데 영적으로 만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이 진리이며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면서 예수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희생하여 실천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이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2:30-31). 따라서 사람을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뜻이 아닙니다(12:14).

둘째로,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말라”(12:15-16); 어떻게 하면 이방인들까지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을 사도 바울이 여기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2:15)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첫째, 서민들과 마음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12:16a);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그 속에 들어가서 보면 사람들의 삶은 비슷비슷합니다. 서로 집단적인 이익이 충돌하여 적과 아군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 그 개인적인 삶이란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똑 같은 인간이라는 평등함을 받아 들이고 서민들의 애환에 대하여 공감을 해야만 합니다. 일반백성들이 즐거워하는 일에 대하여 성도들도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슬퍼하고 고민할 때에 그 슬픔과 고민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피조물들을 돌볼 수 있는 하나님의 청지기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입니다.

(2)  둘째, 높은 신분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12:16b);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들이 어째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러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몸소 체험하고자 하십니다(2:5-8). 그래서 독생자의 성육신과 공생애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자랑하기에 앞서서 죄인들의 애로가 무엇이며 그 갈등이 무엇인지를 먼저 그들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이해를 해야합니다. 나아가서 원수의 처지와 형편까지 헤아리는 긍휼함이 필요합니다.

(3)  셋째, 그리스도의 지혜보다 더 고상한 지혜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말라”(12:16c); 그리스도는 몸소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죄와 사망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참상을 불쌍하게 여기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그 연결고리를 끊고자 하신 것입니다(8:2). 그러므로 그 십자가 희생이 가장 미련해 보이지만 가장 확실한 구원의 방편이 되고 있습니다(고전1:25-27). 그러한 의미에서 성도들이 다른 방법으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지혜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에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맡길 따름입니다(22:42. 고전1:28-31).

셋째로,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2:17-18);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2:17); 악은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 사랑의 방법론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그 사랑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선을 행해야 하며 원수라고 하더라도 결코 그 생명을 죽이는 악을 행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12:17).

(2)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2:18);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는 두 가지의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이 대속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의인이 되고 성도의 거듭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5:1, 10).

2)    둘째,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골고다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속량을 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의 일꾼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6:13). 이 세상을 구원하자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원수를 용서하고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 그리고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19:6, 1:8, 5:15). 그것이 진정한 사람들과의 화목입니다(12:18).

결론적으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은 창조주 여호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민을 구원한다고 하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적인 좁은 의미의 정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선민 이방인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전부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좁은 사랑과 미움의 개념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창조주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성도들이 살아가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2:14-18).

본문의 뜻을 되새기시면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결단하시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께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이 각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