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7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8. 03:01

로마서 강해 제79(12: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20()

 

성도의 삶의 기본인 영적예배와 하나님의 뜻 분별에 대하여(12:1-2)

 

사도 바울의 로마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①첫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 제11장까지의 내용이 그러합니다. ②두번째 부분은 복음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두번째의 서술이 제12장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참으로 친절하게도 제12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인 제16장에 이르기까지 기술할 내용에 대하여 성도들이 알기 쉽게 먼저 제12장이 시작되는 첫머리인 본문에서 요약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사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크리스천의 명심보감과 같은 것입니다. 워낙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선 그 내용이 무엇인지부터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12:1a);

1)    하나님께서는 선지서에서 기록이 되고 있는 그대로 토기장이의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30:14, 18:4-6, 9:20-21). 그러므로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그릇에 대해서는 부수어 버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오래 참고 관용하시고 긍휼을 베풀고자 하십니다. 그 이유는 피조물을 하나같이 아끼시고 자식과 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서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청지기의 직분을 감당해야만 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의로운 종이며 대속의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입니다. 만약 그러한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 성격대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2)  둘째, 과연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인생 가운데 실천하신 분이 있을까요? 그 모범적인 사례를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을까요? 선례를 발견할 수 있다면 복음을 생활화하기가 참으로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해보라고 성도들에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희생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깊이 묵상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살아가야만 합니다(12:1b).

(3)  셋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리는 대속의 삶과 희생적인 성도의 삶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이 세상의 풍습과 습관을 따라서 사고하고 행동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변화가 자신에게 이루어지도록 성령님의 임재를 아버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해야만 합니다(12:2a).

(4)  넷째, 진리의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게 되면 예수님의 교훈과 그 일생의 의미가 깨달아지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평생동안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헌신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12:2b). 유한한 재화를 서로 차지하고자 살기다툼을 일삼고 있는 인간사회에서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가 아니한 그 세가지의 하나님 뜻이 벌써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모범적으로 수행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님의 복음적인 삶의 모범을 따라서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복음적인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12:1a);

1)    먼저 여기서 그러므로라고 하는 용어는 그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11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과 그 의미에 대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그 하나님의 복음을 어떻게 하면 생활화할 수가 있는지 그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의미로 접속사 그러므로가 사용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사도 바울이 작성하고 있는 로마서는 제일 먼저 여집사 뵈뵈를 통하여 로마시에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전달이 될 것입니다(16:1-2). 그리고 그 사본은 로마제국의 전 지역에 형성이 되어 있는 모든 초대교회에 회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라고 호칭하고 있는 대상은 로마시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당시의 모든 초대교회의 성도들입니다.

3)    그들은 남녀노소의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들을 한 마디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두가지라고 하겠습니다; ①첫째, 남자를 부를 때 사용이 되는 형제들이라고 하는 말이 고대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여자분들까지 그 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로서 그 집안을 대표한다는 관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    ②둘째, 초대교회에서 이방인 사도로서의 특권을 지니고 있는 바울이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고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뜻은 같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평등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복음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높낮이나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요청이 되고 있는 평등한 삶의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2)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12:1b);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복음을 생활화할 때에 가장 먼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9:22-23). 만약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아니한다고 하여 피조물들을 마치 토기장이처럼 그 자리에서 모두 부수어 버리신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9:19-21) 그와 같은 즉결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가지고 결코 복된 좋은 소식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창조주를 의식하지 아니하거나 제대로 섬기지도 아니하면서 제 뜻대로 고집스럽게 살아간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소멸이 될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3)  너희 몸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2:1c);

1)    하나님의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은 인생에 있어서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성도로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그 기간입니다. 육신을 입고서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그 기간이 바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 있는 때입니다(1:23-24). 만약 육신을 입고 있는 인생이 지나가 버린다면 다시는 천국에서 현세로 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2)    그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16:19-31). 지옥의 불길 가운데 고통하고 있는 그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거지 나사로를 자신의 5형제들에게 보내어 부디 지옥의 불길 가운데로 들어오는 삶을 청산하라고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16:27-28). 그러나 아브라함이 거절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3)    그 이유는 히브리정경에 적혀 있는 글을 읽고 깨닫거나 아니면 육신을 입고 있는 선지자들로부터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6:29-31).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기회가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서 만민구원에 적극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6:13).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서 실천하는 성도의 대속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12:1, 고전6:19-20).

(4)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d);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생활화하는 삶을 영적 예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뜻은 한 마디로, 사람들이 육신적인 삶으로써는 하나님의 복음을 실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8:2-8);

1)    성도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혈기가 왕성한 육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면 결코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12:1b). 그저 제 성질대로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것은 전부 저주하고 부수어 버릴 따름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자식과 같은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그 생명을 하나같이 아끼고 살리고자 하시는 그 공의의 정신을 온전히 실천할 수 없는 마음가짐입니다.

2)    그러므로 복음적인 삶이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우선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그 제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신앙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간구와 겸손한 자세가 흐트러져버린다고 하면 복음을 실천하는 영적인 삶이 아니라 제 혈기대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세상적인 타락과 실족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12:2a); 성도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자신의 세대의 구원을 책임지면 됩니다(18:23-32, 20:7, 23:6). 그러므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그 이웃을 살피고 돌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1:8). 그리고 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해야 합니다(19:6). 또한 죄를 범한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갈 때에 이 세대의 구원을 책임질 수 있으며 이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아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12:2b);

1)    성도는 육신을 입고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길러내는 것이 중차대한 주님의 지상명령이기는 하지만(28:18-20) 그것을 성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실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24:49).

2)    그러므로 승천하시기 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당부하신 말씀 그대로 성령님의 임재를 기도하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마치 오순절의 그날처럼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성도들의 속사람과 그 심령속에 내주하여 역사하시게 되면 그때부터 온 세상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힘있게 전할 수가 있게 됩니다(1:8).

3)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보여줄 수 있도록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그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복음을 생활화하는 거룩한 삶 곧 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12:2b).

(3)  하나님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c);

1)    부자청년인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구원을 얻는 방법을 묻고자 합니다. 그는 겸손하게 길가에 꿇어 앉아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질문을 시작합니다(10:17, 18:18). 그 모습을 보시고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고 답변하십니다.

2)    그 말씀의 뜻은 모든 생명을 돌보고 전부 살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은 오로지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도록 성도들은 간구를 해야만 합니다. 모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생명을 살리는 능력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3)    만약 그러한 간구가 없이 인간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크게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생명을 죽이는 일을 행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거짓선지자와 적그리스도가 행하는 사탄적인 행위인 것입니다(8:44).

4)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대해서는 이미 제1절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이웃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그러한 성도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지 아니하고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반대로,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성도의 헌신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그 온전한 보상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인과응보의 철칙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충분한 보상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한 안목으로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온전한 보상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욥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6)    욥은 동방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그리고 의인으로 살아가면서 이웃의 칭송을 받는 부자입니다(1:1-3). 하지만 원인도 알 수 없는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발생합니다. 모든 재산과 자녀가 한꺼번에 사라집니다(1:15-19). 몸에는 질병이 찾아와서 괴롭힙니다(2:7-8). 욥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심히 괴롭습니다. 그 이유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면 편히 눈을 감고자 합니다. 그 참상을 보고서 아내는 그만 여호와 하나님을 욕하고 그 진노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라고 권유합니다(2:9). 절친 3명이 멀리서 찾아와서는 숨긴 죄를 회개하고 편히 눈을 감으라고 설득합니다(4-25).

7)    하지만 욥은 결단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인인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시는 그것이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보상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십니다(38-41). 그리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바닷물이 땅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섭리하고 계심을 설명하십니다(38:11). 하늘의 천체도 반드시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38:32-33). 그리고 이 세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괴물도 제어하신다고 하십니다(40:24, 41:1). 그런데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깨닫는 의인이 없다는 뜻을 비추십니다(38:3-4, 40:7-8).

8)    그 말씀 앞에 욥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있습니다(42:1-6). 자신의 가족만을 위하여 평생 제사장 노릇을 한 자신의 그 좁은 의로움을 내려놓고 있습니다(1:5, 42:10).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모든 생명을 용서하고 살리고자 하시는 그 큰 뜻을 좁은 자신의 안목으로 판단하려고 한 그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비난했던 원수와 같은 친구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고 죄사함의 기도를 드립니다(42:7-9).

9)    그때 자칭 의인이며 제사장인 욥의 신원이 하나님의 의인이며 제사장으로 회복이 됩니다(42:10-17). 그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10자녀를 생각하면서 다시 주신 10자녀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녀 차별하지 아니하고 귀하게 양육하게 됩니다(42:13-15). 요컨대, 욥이 깨달은 하나님의 보상이란 영원한 것이며 완전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그 보상은 영광 가운데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성도의 거룩한 삶과 관련하여 기독교가 실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세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①첫째,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②둘째,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기 위하여 성도들이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③셋째, 그렇게 헌신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온전하신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생명을 죽이고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희생이 아니라 남의 희생을 강요하는 종교생활을 해서도 안됩니다. 이 땅에서 모든 수고와 헌신의 보상을 받겠다고 하는 현세구복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해서도 안됩니다.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 아니하기 위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묵상함으로써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영적인 삶이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