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7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6. 16:42

로마서 강해 제76(11:25-2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17()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얻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구원에 대하여 우둔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라는 사도 바울의 주장에 대하여(11:25-29);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이 정말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 점에 대하여 먼저 살펴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까지 선민 이스라엘에 대하여 더러는 우둔하게 만들어버렸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11:25). 그것이 만민의 구원을 바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섭리라고 사도 바울의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일방적인 논리이며 충분한 설명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당시 초대교회에서 선민 유대인들보다는 이방인들이 더 많이 회개를 하고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사도 바울 나름대로 히브리정경을 살펴보고 그 이유를 찾아서 그러한 논리로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다음과 같이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그토록 사랑하시더니 이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그들 선민의 상당수를 우둔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방인 구원하겠다고 선민들을 잘라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가 안되는 설명입니다”.

참감람나무의 원가지인 선민들이 찍히어 나간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의 가지인 이방인들이 회개를 하자 이제는 곁가지로 접붙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을 사랑하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진짜 사랑하는 선민들을 상당수 버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정말 만민을 모두 자식처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택일까요? 그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기에는 역시 설명력이 부족합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그러한 설명의 근거를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서부터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을 때에 그에게 여호와께서 선민들에게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을 예언으로 전한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영적으로 우둔하게 되어 깨닫지를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언제까지 그러한 무지몽매한 신앙상태가 지속이 될까요?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타날 때까지 라는 것입니다”(6:9-13).

그것은 참감람나무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에 회개한 이방인들과 선민들이 다시 접붙임을 받게 되는 그때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순서를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회개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시기하고 있는 선민들의 회개와 접붙임의 순서라고 로마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11:11-24).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설명들이 상식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납득하기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히브리정경에 잠깐 언급이 되고 있는 토기장이의 절대주권에 대하여 먼저 언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9:19-24).

그렇다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지혜의 비유를 하나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15:11-32);

(1)  첫째, 차남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서 한번 자기 뜻대로 살아보고 싶어합니다(15:12-13). 그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정반대입니다(12:1-4). 그런데 꿈을 펼치자면 재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상속분을 미리 달라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순순히 허락을 합니다. 그리고 차제에 장남에게도 미리 재산상속을 해주고 있습니다.

(2)  둘째, 각각 자신의 기업을 얻게 된 두 아들입니다. 차남은 자신의 소망대로 재물을 가지고 세상의 대도시로 나아가서 흥청망청 탕진을 하고 있습니다(15:13-14). 반면에 장남은 아버지 집에 함께 살면서 자신의 몫으로 받은 논밭을 가꾸면서 재산을 늘려가고 있습니다(15:25, 29). 겉으로 보면, 장남이 효자이고 차남이 탕자입니다.

(3)  셋째, 그러한 세상적인 상식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그 비유 가운데서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탕자가 도시에서 살길이 막막해지자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올 때에 탕자와 아버지 그리고 장남과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그 깊은 내막이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탕자는 사실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자신의 분깃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서 도시의 향락을 즐기다가 전부 탕진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15:17-19). 살길이 막막해지자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하여 부유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들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아버지 집에서 일하면서 살 수 있도록 사정을 하고 있습니다(15:21). 그렇게 후회하면서 회개하고 있는 차남의 모습을 보고서 아버지께서는 그를 다시 아들로 맞아 들이면서 동네잔치를 하고 있습니다(15:22-23). 그때 아버지의 말씀이 아들을 되찾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4).

2)    둘째, 밭에서 종일 일을 하고 저녁에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있던 장남이 동네 어귀에서 떠들썩한 잔치소리를 듣게 됩니다. 틀림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선뜻 들어가지를 아니하고 종을 불러서 확인을 합니다(15:26). 자신의 재산을 미리 상속을 받아서 대도시로 나갔던 동생이 거지꼴이 되어서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탕자가 무엇이 그렇게 예쁘다고 아버지께서는 엄청 환영을 하고 동네잔치까지 베풀고 있다는 설명입니다(15:27). 그 소리를 들은 장남은 화가 납니다. 대도시로 나가지 아니하고 지금까지 나이 드신 아버지를 잘 모신 자신에게는 조그만 잔치도 베풀어준 적이 없는 부친입니다(15:29-30). 그런데 얼토당토아니하게 아버지의 재산을 축내고 세상 재미를 실컷 보다가 이제 거지신세가 되어 돌아온 탕자에게는 큰 잔치를 베풀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처사가 잘못 되었다고 따지고 있는 장남입니다.

3)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가운데에는 사실 섬뜩한 진리가 다음과 같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①첫째, 차남이 이방인이라면 장남이 선민입니다(4:22). ②둘째, 돌아온 탕자가 이방인 성도라면 자신이 노쇠한 아버지를 부양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장남이 이상한 율법생활을 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4)  넷째,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장남에 대하여 음미를 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1)    첫째, 아버지가 장남과 차남에게 이미 상속을 마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장남이 아버지 집에서 머물면서 자신의 재산관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장남이므로 평소 그 은혜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재산도 미리 상속해주시고 아버지 집에서 함께 공짜로 살 수 있게 해주셨으니 그 은혜가 큰 것입니다.

2)    둘째, 그러한 이치를 장남이 모르고 방자하게도 반대로 생각하면서 고약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논밭에서 종일 일을 해서 아버지를 봉양하고 있는 것으로 사고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를 모시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 아버지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장남에 해당하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착각은 엄청 분수를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지인 처지에 자신이 뿌리를 보전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착각이며 억지스러운 주장입니다(11:18).

3)    셋째, 대도시에서 전 재산을 탕진한 차남이 아버지 집을 찾아서 돌아온 그 이유가 이방인들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멋대로 한번 살아본 결과 그 영혼이 피폐하고 구원에서 한참 멀어진 비참한 몰골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떠나 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호흡이 끊어지고 육신적인 삶만을 영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영적인 죽음이 이제는 육신적인 죽음으로 엄습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육간의 죽음의 위기에서 차남은 아버지 집의 풍성함을 깨닫고 회개를 하고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아들을 아버지께서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회개한 이방인 성도들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5)  다섯째,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비유 가운데 장남일까요? 아니면 차남일까요? 그 대답은 한 마디로, 장남도 차남도 아니십니다. 흔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장자이며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17, 고전15:20, 23). 그렇지만 그것이 그리스도가 탕자의 비유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장남 곧 선민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한 위격을 가지신 독생자께서(1:1-3, 14) 그 창조주의 영광을 잠시 내려놓으시고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이 성육신의 비밀입니다(2:5-8). 사람의 육신을 입고서 태어나셨기에 그 신분이 여호와의 의로운 종이며(53:11)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시고 있을 따름입니다(6:37-40).

(6)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역할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선민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아들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하나의 모형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 두가지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1)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고 생색을 낼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다는 그것이 사실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민들을 보호하고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1:18).

2)    또 하나는, 선민들에게 기대하시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 곧 무신론자와 범신론자들에게 창조주의 살아 계심과 만민구원의 뜻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 주어야만 합니다. ②둘째, 자신의 뜻이 아니라 인생이란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애와 대속의 죽으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남에 해당하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뜻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민구원에 있어서 오히려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이방인들이 창조주의 살아 계심과 자신들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서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민들보다 먼저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와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나무에 접붙임을 받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11:25);

(1)  사도 바울은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기본 명제는 사람의 지혜로써는 하나님의 신비를 다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로 그 신비의 일부를 깨닫게 된 바울이 자신이 깨달은 것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해주고자 합니다. 그러한 취지를 담고 있는 말이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11:25a).

(2)  그리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신비라고 전제하면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11:25).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말은 잘못 이해하게 되면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이 담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외면하고 배척한 것이 이방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가져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에게 팔아넘김으로써 가룟 유다가 마치 예수님께서 제 때에 대속의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크게 도왔다고 하는 역설적인 주장과 같은 것입니다.

(3)  요컨대, 사도 바울의 설명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우둔하게 되고 복음을 배척하게 된 것은 선민들만의 잘못이 아니고 여호와의 역사섭리의 필요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가지 점에서 성립되기가 힘든 이야기입니다;

1)    첫째,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을 먼저 회개시키고 구원하시는 한편,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그들을 모두 회개의 마당으로 불러내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마치 세상의 패권국이 두 군데의 국지전을 한꺼번에 수행할 수가 없어서 이른바 스윙(swing)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상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윈윈(win win) 전략을 구사하고도 남을 정도로 그 능력이 전능하십니다.

2)    둘째, 출애굽 당시에 벌써 하나님의 의중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애굽제국의 황제인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여호와의 뜻에 완강하게 저항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책임도 들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8:15, 19, 32, 9:12 35, 10:20).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대속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십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그리스도가 지게 하심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잘못 만드신 책임을 다 지시고자 하십니다. 그 대속의 희생 다음에는 어떤 순서의 책임이 있을까요? 그때부터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이치가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11:26-27, 27:9-13, 59:20-21);

(1)  선민 출신인 사도 바울의 관심사가 그 옛날 선민 출신인 선지자 이사야와 비슷합니다. 바울 역시 친족인 골육 곧 동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언제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실 것인가요? 그 해답을 구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선지서에 기록한 내용을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원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먼저 이사야 선지자의 기록을 옮겨봅니다;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서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받아 광야와 같은 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그 나뭇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 하시리라.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 그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27:9-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9:20-21).

(3)  요약해보면 다음 두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 있지 아니하고 폐허로 변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하고 처형한 선민 유대인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2)    둘째, 그 다음에는 온 세상에 흩어진 마치 남은 자와 같은 선민들의 자손들을 이방인처럼 회개시키고 구원의 자리로 모아 들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대대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그러한 역사의 섭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또한 성령님의 역사로 선민들에게 있을 것임을 일찍이 이사야가 위와 같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또한 이사야의 기록을 원용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11:26-27). 한 마디로,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아무나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철저하게 불신앙에 대한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그와 같은 이치가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동일하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추궁과 논공행상에 공의로우신 창조주 하나님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견이 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11:28-29); 사도 바울 역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생각을 닮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의 글이 그러합니다. 그는 냉정하면서도 정확하게 평가하고 기록을 하고자 합니다. 그 결과 두가지의 경우를 분리하여 각각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를 두고서 생각해보면, 분명히 선민 유대인들의 큰 잘못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자 스스로 독생자의 영광을 내려놓고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 공생애를 살아가고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그들의 유대교리 곧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선민우월사상 그리고 선민만의 구원사상에 어긋난다고 하여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유대교에 대한 이단으로 정죄하고 로마총독의 정치적인 도움을 받아서 그만 십자가 형장의 제물로 삼고 맙니다. 그러한 선민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은 이방인 성도들이 볼 때에 복음의 원수이며 그리스도의 대적에 불과합니다.

(2)  둘째,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 또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믿음의 조상들로부터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시고 그들을 이방 땅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파송하십니다. 그리고 신실하게 선지자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가는 곳마다 모든 족속들에게 하나님의 큰 복을 전해줄 것이라고 약속을 주십니다(12:3, 22:18, 28:14). 하나님의 택하심과 언약 주심과 그 축복이 선민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3)  그 결과 선민들의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시고 공생애를 살아가십니다.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 아래 무덤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십니다. 결국 선민 유대인들의 땅에서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복음이 선포가 되고 부활의 증거자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온 세상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믿고 신앙고백한 사도와 제자들에 의하여 발생한 하나님의 큰 복입니다.

(4)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 앞에 얕은 인간의 지혜와 이성의 잣대를 들이댄다고 하는 것이 불경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인상적인 사도 바울의 결론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11:28-29);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제11장의 말미에서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참다운 역사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그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3-36).

사도 바울의 글을 다시 음미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경륜을 깊이 생각하시는 성도님들의 인생관과 역사관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