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74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5. 16:13

로마서 강해 제74(11:15-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15()

 

히브리정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말씀의 본래취지가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선민사상이 아니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는 복음사상임을 밝히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11:15-18)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제8장에서와 같이 본문에서도 히브리정경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본래취지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의 실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8:26-30, 11:15-18). 그것은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편파성을 가지는 선민사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과 만민 곧 모든 피조물을 공평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8:18-22). 따라서 복음은 인류의 경우에 있어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8:23-25, 11:15-18).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뿌리이며 그와 같은 정신으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겠다고 맹세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버리고 자신들만의 현세적인 이익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들을 돌이키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와 메시아까지 제거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버림을 받고 하나님의 복음은 이방 땅에서 회개와 구원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11:15a).

하지만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방인 구원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수순은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11:15b). 그들의 처음 신앙을 회복시키시고 히브리정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보게 만들 것입니다(11:16).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11:15b)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스라엘 회복의 수순이 남아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이방인 성도들이 함부로 선민 유대인들을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정경을 파수하여 온 자들은 역시 선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접붙임을 당한 가지가 원가지와 뿌리를 멸시할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11:17-18).

그와 함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엄청난 지혜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생전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해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에 대하여 깊이 묵상을 하면서 그것을 그가 잘 알고 있는 히브리정경에 비추어서 재삼 묵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사상들이 본문에서 그 선을 미리 보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①첫째, 탕자의 비유(11:15, 15:12, 24) ②둘째, 유월절과 포도나무 비유(13:2, 15:1-8, 11:16) ③셋째, 접붙임 비유(11:17) ④넷째, 뿌리와 그루터기 비유(6:13, 11:18) 등이 그러합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선민)들을 버리는 것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1:15); 이 구절이 누가복음에 실려 있는 탕자의 비유와 닮아 있습니다. 그 점을 먼저 생각해보고 그 다음에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 가운데 말씀 한 자락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4). 그 내용이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1:15). 묘하게도 닮아 있습니다.  그 점에 관하여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수 많은 예수님의 교훈과 일화를 4권의 복음서가 각각 다른 측면에서 나름대로 수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의사 누가는 탕자의 비유를 독점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15:11-32).

2)    주후 60년대에 의사 누가가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그 근원부터 살펴서 다른 복음서와는 차이가 나게 기술하고자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1:3). 그러한 의도로 누가복음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의사 누가는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말을 그 역시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1:4),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1:11).

3)    참고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저술하여 그것을 서신으로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여집사 뵈뵈 편으로 전달하고 있는 시점이 주후 55년경으로 보입니다(16:1-2). 그 시점은 누가복음의 작성보다 빠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주치의로서 그의 선교여행에 동행하고 있는 의사 누가는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듣고 있습니다. 로마서에 기록이 되고 있는 바울의 견해도 의사 누가가 먼저 듣고 있는 것입니다.

4)    의사 누가는 그가 먼저 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하여 풍성하게 수집한 자료를 분류하고 또한 발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복음을 바라보고 있는 사도 바울의 생각과 의사 누가의 생각이 상당히 닮아 있다고 하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5)    어쨌든 주후 60년대에 이 세상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공관복음과 주후 90년대에 나온 요한복음보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이 더 빠른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사상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해석은 복음서의 저자들에게도 은연중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선민)들을 버리는 것세상의 화목이 되거든”(11:15a); 세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①첫째, 선민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민족만 사랑하신다는 이방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불공정성과 편파성에 대한 시비를 제거할 수 있는 방편이 된다는 것입니다(11:15a). ②둘째, 세상에 나가서 한번 소신껏 살아보고 싶으니 자신의 상속분을 미리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차남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집안의 화평을 위해서 타당하다는 것입니다(15:12). ③셋째, 선민을 버린 경우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버린 경우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버린 경우에는 하나님과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구원의 방법론이 되고 있습니다(5:10-11). 위의 세가지 경우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 보고자 합니다;

1)    먼저 첫번째의 해석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언약의 백성인 선민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을 때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그 앞길을 인도해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직한 신앙의 자세인 믿음의 의가 아니고 자신들 고집대로 율법의 의를 이루고자 외식적인 신앙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10:2-3).

2)    그것은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자기들끼리 서로 의롭다고 추겨 세우고 있는 이상한 종교 행위입니다. 마음속으로 사람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무시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눈을 속일 수가 있으면 하나님의 눈도 속일 수가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은 창조주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과 비교하여 별로 나은 점이 없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혈통적으로 믿음의 조상들의 후손이라고 하여 무조건 편파적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서 한참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버리고 있습니다(11:15a). 그것이 이방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편이 됩니다.

4)    사실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의 만민과 만물을 모두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범한 선민들을 버리고 징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그것이 세상의 화목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5)    다음은 두번째의 해석과 관련하여 짧게 살펴봅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재산을 반드시 자식들에게 상속해 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는 그것이 관행이므로 죽은 다음에 그 재산을 유산으로 상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부친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서 살아 계시는데 재산을 먼저 상속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불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차남뿐만 아니라 장남에게도 사전상속을 해주고 있습니다.

6)    어째서 그러한 결정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①하나의 이유는 아버지가 재물보다는 자식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아끼다가 자식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②또 하나의 이유는 차남이 재산을 얻지 못하고 가출을 해버릴 경우에는 대처(大處, 큰 도시)에 나가서 고생길이 훤하기 때문입니다. 그 고집을 꺾지 못할 바에는 재산이라도 떼주어서 보내어 주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차남에게 재산을 주는 김에 집에 남아 있는 장남에게도 공평하게 재산을 떼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7)    끝으로 더 깊은 이유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의 이치를 훤히 알고 계십니다. 차남이 하는 모양을 보니 재산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더라도 탕진을 할 것이 뻔합니다. 그러면 그때에는 회개를 하고서 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15:17-20). 그렇게 허망한 세상의 낙을 누리다가 끝장이 나고 마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스스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8)    요컨대, 그것이 육신의 생각대로 이끌리어 이 세상에서 오래 낙을 누리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기 위하여 두 손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15:20, 10:21). 그러므로 버리는 그것이 사실은 나중에 아들을 확실하게 얻게 되는 방법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9)    마지막으로 세번째의 해석과 관련하여 살펴봅니다; 겉으로 보면 선민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버리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하여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특히 이방인과 선민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구원의 방법론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십니다(1:29, 3:13-17). 그 결과 그리스도가 대속의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과 그 속에 들어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눈물로써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생의 구원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3)  받아들이는 것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1:15b); 장로 야고보의 지적과 같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고 하는 말이 진리입니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낙을 누려보겠다고 아버지를 버리고 오직 재물만을 얻어서 제멋대로 살아간 그것이 죄이며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 가운데 뚜렷하게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 탕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아들을 다시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8장 첫머리에서 벌써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그와 같은 사실을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1:15b);

둘째로,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1:16);

(1)  이스라엘 자손의 맏이와 그들의 가축의 초태생이 모두 여호와의 것이 되고 있는 이유는 유월절 사건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유월절 밤에 애굽 땅에 장자와 초태생을 전멸시켜버리시는 10번째 재앙을 내리십니다(12:4-5, 29-30). 그런데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대문에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죽음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12:21-23).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이는 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어긋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하자를 치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 해답이 출애굽기 제13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을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13:2).

(2)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율법을 주시고 선민으로 삼으십니다(19:4-6). 그리고 3절기의 규례를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23:14-17). 특히 두 번의 초실절이 있는 무교절과 오순절에는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고 반드시 첫 열매를 여호와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23:15-16). 그 첫 열매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것이 되므로 그 자체 거룩함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이치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1:16)고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11:17);

(1)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제8장에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15). 고대사회에서는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양자제도도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들이 없는 경우에 양자를 들여서 재산을 상속하지만 적자와 서자가 나중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양자를 파양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몫을 상속하면 됩니다.

(2)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영향으로 적자나 서자 그리고 양자의 차별이 많이 완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황실에 있어서는 적서의 구별이나 양자의 차별이 없이 똑똑한 아들에게 황제의 후계자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bc27-ad14)의 양자인 티베리우스(ad14-37)가 제2대 황제가 됩니다. 그리고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ad37-41)는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양자의 아들입니다.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ad41-54)는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조카입니다. 나아가서 제5대 황제인 네로(ad54-68)는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입니다

(3)  그와 같은 로마제국의 시대에 사도 바울이 세계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당시 양자제도의 중요성과 그 상속의 엄청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그의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다음 몇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성도들은 하나님의 양자이며 하나님나라를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고 있다”(8:14-17)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아들들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양자로서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3)    셋째, 그와 같은 사실을 알기 쉽게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로서 말씀하신 적이 있음을 사도 요한이 기억하고서 훗날 그의 복음서 제15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며 그러하리라”(15:1-4).

(4)  사도 바울은 (선민)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11: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접붙임의 이치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더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11:17);

1)    접붙임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은 품종의 가지를 튼튼한 품종의 뿌리와 큰 줄기에 접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좋은 품종의 가지에서 좋은 열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2)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애초부터 좋은 품종의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튼튼한 품종의 뿌리와 그 큰 줄기에 접이 붙어 있을 때에만 뿌리의 진액을 먹고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할 수가 있습니다(11:17).

3)    따라서 좋은 품종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가지가 아니라 그 뿌리입니다(11:18). 원가지라고 자랑하고 있는 선민들이 스스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그 뿌리와 큰 줄기에 붙어 있을 때에만 깨끗한 성화가 이루어지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15:4-5).

넷째로,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1:18);

(1) 위와 같이 깨닫고 보면, 선민들이 자신들은 원가지라고 자랑하는 것도 헛된 일입니다. 그 뿌리가 거룩하므로 거룩함을 옷 입고 있는데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접붙임을 한 가지들이 스스로 좋은 열매를 맺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애초부터 좋은 품종의 가지를 스톡’(stock, 대목, 밑나무, 접붙임이 이루어지는 그루터기, 6:13)에 접붙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접붙임을 한 이방인 곁가지가 원가지인 선민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도 근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같은 뿌리의 진액인 하나님의 말씀을 큰 줄기이신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공급을 받을 때에 비로소 자신의 가지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태여 자랑을 하고자 하면 그것은 뿌리가 되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그 거룩하신 뜻을 이 세상에서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은혜를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적인 상식과는 전혀 다른 영적인 접붙임이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소중히 생각한 조상들 덕택에 그 자손들이 선민이 되는 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2)  둘째, 그러나 그들의 나중은 영적인 타락입니다. 그 자손들에게 크게 실망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특혜를 주고 보호를 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의 사도와 제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세계에 널리 전하게 하십니다. 그와 같은 현상을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알기 쉽게 접붙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셋째, 그런데 그 접붙임은 상식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품종을 대목(stock)에 접을 붙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돌감람나무와 같은 곁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을 붙여서 그 뿌리와 줄기로부터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원액을 빨아들이도록 하고 있습니다(11:17).

(4)  넷째, 그러므로 가지들은 오직 그 좋은 품종인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포도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본문은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를 강력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15:1-8).

(5)  다섯째, 뿌리가 거룩하다는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바친 것들이 거룩함을 옷 입게 되는 이치까지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13:2, 23:15-16, 11:16).

  요컨대, 두루두루 참으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본문의 말씀을 깊이 그리고 넓게 묵상하시는 은혜가 여러 성도님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