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7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5. 04:40

로마서 강해 제73(11:11-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14()

 

히브리정경을 가진 동족들이 복음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때가 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사도 바울이 행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11:11-14)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본문은 사실 로마서 제9장 제32-33절 말씀 및 제11장 제9절 말씀과 의미상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민 유대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고(9:32-33) 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걸려서 넘어지는 것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11:9).

바울의 설명 그대로, 예수님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9:30).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은 율법생활의 형식적인 요건을 만족시키게 되면 그것으로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9:32, 10:2-3).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믿음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겉모습과 행위만을 감찰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 앞에서 율법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식적인 율법의 행위로써는 도저히 하나님의 칭의와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선민 유대인들에게 특히 그들의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에게 그 점을 강조하시면서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십니다(23).

선민 유대인들은 마음속 진실을 보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들의 율법생활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도무지 회개를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예수라는 걸림돌을 치워버리겠다고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모독죄로 정죄를 하고 로마총독에게 끌고가서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자로 거짓 고발하여 십자가 처형의 판결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민들의 행동은 하나님 보시기에 걸림돌을 치워버린 것이 아니라 그 걸림돌에 걸려서 넘어진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9:31-32, 11:12).

그와 같이 선민 유대인들이 걸림돌에 걸려서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방인들이 얻고 있는 유익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마치 타산지석’(他山之石, 남의 잘못을 보고서 자신의 잘못을 사전에 바로 잡는 것)과 같은 유익함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9:33, 11:11-12). 왜냐하면, 선민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하다가(10:3, 5)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하는 걸림돌에 걸려서 넘어지는 것을 보고서 이방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대속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의 제사를 믿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0:6-9).

그 결과 이방인들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있습니다(10:10-13). 그와 같은 이치를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 제1장에서 벌써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그런데 이방인 사도로 열심히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서 신앙적으로 큰 부상을 경험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는 그 교훈을 부디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랍비 사울이었던 바울 자신은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 가운데 만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식이 새로워졌습니다(22:6-21).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에 걸림돌이 아니라 율법생활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10:3-4).

그의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은 몸소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서 부상을 입고 신음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이제는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가장 생생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랍비 사울이었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영적으로 인식하고서(고전15:8)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처럼(1:16-17) 그의 동족들도 이제는 하나님의 뜻과 올바른 구원의 방법을 깨닫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 사도로서 더욱 열심히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긍정적으로 응답해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11:13-14).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11:11); 사도 바울이 넘어짐실족이라는 용어를 분리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넘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행위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실족은 믿음의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1:11a);

1)    바울은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을 위하여 이방인 성도들에게 일종의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비록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신들의 율법행위의 의로움을 너무 내세우다가(10:2-3) 그만 믿음의 의를 강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처형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것이 그들을 믿음에서 완전히 실족하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이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히브리정경에서 그가 찾아낸 모세의 글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32:21, 10:19),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65:2, 10:21).  

3)    이미 살펴본 바 있는 로마서 제10장의 내용과 같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구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의 회개를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완전히 믿음생활에서 실족을 했다고 탄식을 하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대속의 십자가 아래로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와 구원을 역시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넘어짐은 있지만 그것이 긴 눈으로 보면 완전한 실족은 아닌 것입니다(11:11a).

4)    참고로, 초대교회에서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인 성도들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처형한 장본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은 회개하고서 기독교인이 되어 있지만 과거 유대교인이었다는 그것이 일종의 주홍글씨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주홍글씨는 사도 바울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예수님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했던 랍비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성도들을 보호하고 동족인 유대인들을 변호하고자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기록하면서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11:11b); 두가지로 풀이를 할 수 있습니다;

1)    첫째, 선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이 틀렸으며 유대교인들을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이 그들의 견해를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11:50). 유대교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천국복음을 버린 결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크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이방인들이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선민의 특권을 주장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겉모양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척하면서 이상한 믿음생활을 영위한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 율법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그 행위적인 의로움을 너무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와서 구원을 얻으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눈에 거슬린다고 처단하고 마는 큰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타산지석으로서 이방인성도들에게 믿음생활에 있어서 큰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3)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11:11c); 사도 바울이 히브리정경에서 발견한 시기라고 하는 용어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1)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전부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이방인에 이어서 선민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민구원의 경륜이 작은 용어 시기심이라는 용어에도 담겨 있습니다.

2)    유대인의 사회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인 줄 모르고 선민들이 배척을 하고 맙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이방 땅으로 건너가서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버려 두게 되면 이방인들로 천국이 만원이 될 것만 같습니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계시는 천국에 이방인들로 완전히 채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선민 유대인들의 마음이 급해지고 있습니다. 앞을 다투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모시는 자리에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동적인 움직임을 사도 바울이 시기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잘 포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그들의 넘어짐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1:12);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들의 넘어짐세상의 풍성함이 되며”(11:12a); 대제사장 가야바는 나사렛 예수만 처리를 해버리게 되면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는 그들의 유대교가 튼튼하게 다시 설 수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11:48-50);

1)    만약 가야바의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함으로써 유대교가 반석 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면 어떠한 일이 이 세상에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①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옳다는 사실이 진리로서 입증이 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복음도 메아리처럼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②둘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구원을 얻게 되는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2)    그런데 가야바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무덤속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살려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유대교는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 사도와 제자들이 온 세상에 천국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게 되는 크나큰 역사가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민 유대인)들의 넘어짐세상의 풍성함이 되며”(11:12a).

(2)  그들의 실패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11:12b);

1)    의사 누가의 복음서에 따르게 되면, 주후 32 4 14일 목요일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동하십니다(3:1, 22:7, 12-13, 39). 그곳에서 오래 기도를 하십니다. 유월절 만찬을 사도들과 함께 하였으니 이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1:29) 다음날 처형을 당하시게 되는 운명입니다. 예상한 그대로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실세들이 병정과 하인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한밤중에 체포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9시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맙니다(15:25).

2)    그 일을 마친 대제사장과 유대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승리이며 나사렛 예수의 실패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착각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엄청난 실수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무덤속에서 되살아나시고 유대교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 실패자들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와 제자들에 의하여 이방 땅으로 크게 전파가 되고 맙니다. 그러한 현상을 사도 바울이 여기서 그들의 실패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11:12b)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1:12c); 사도 바울은 훗날 이방인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께서 대대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을 회개의 마당으로 불러내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11:1, 14). 그리하면 그의 동족들에게는 마치 랍비 사울이 이방인 사도인 바울로 변화한 것과 같은 크나큰 변화가 발생할 것입니다. 히브리정경에 밝은 많은 랍비들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정경에서부터 풀이하여 온 세상에 전파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풍성한 말씀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일까요?(11:12c)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훗날 7,000명의 유대인 랍비가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와 성령님의 풍성한 역사하심에 대하여 증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왕상19:18, 11:4-5).

셋째로,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1:13-14); 사도 바울이 로마시에 있는 성도들에게 선교의 비밀 한 가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선교를 하게 되면 그 반대급부가 자신의 동족들에게 풍성하게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이방인 사도가 되어 선교하기에 열심입니다. 그 반대급부가 그의 골육과 친척에게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이 사실일까요? 그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러한 의도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의 말미에 제16장을 특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바울은 자신의 친척들이 얼마나 많이 구원을 받았으며 또 자신의 선교여행에 동역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국내전도도 급한데 교회의 재력과 물량을 해외선교를 위하여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참조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반대급부에 대하여 무지한 논쟁입니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대속의 제물로 주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나서는 민족이 진정한 선민이며 제사장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16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정도의 골육 및 친척의 회개와 구원을 경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한국민과 한반도의 장래를 위하여 세계선교에 더욱 박차를 가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