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71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4. 04:20

로마서 강해 제71(11: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12(주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남겨놓은 자 7,000명에 대하여(11:1-5);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 유대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강력하게 확신하고 있는 근거는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그의 체험입니다. ②또 하나는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선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인 자신을 이방인 사도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사용하시고 계십니다(11:1b).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11:1a). 그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바울은 친척과 골육 그리고 동족들에 대하여서도 평소 이방인들에게 주고 있는 똑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따라서 바울이 저술하고 있는 로마서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만 전달이 되고 있는 서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초대교회를 포함하여 모든 지역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회람이 되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2)  둘째, 히브리정경 열왕기상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가 사도 바울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선민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하나님신앙을 파수하도록 여호와께서 작심하시고 남겨놓으신 사명자와 관련하여 그 대목은 중요합니다;

1)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역사서인 열왕기상 제17-18장에 기록된 내용 그대로 참으로 능력이 큰 선지자입니다(5:17-18). 하지만 제19장에 들어서게 되면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 이유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실세인 이세벨 왕비가 군대를 동원하여 엘리야 자신을 잡아 죽이겠다고 적극 나서고 있다는 소문을 엘리야가 들었기 때문입니다(왕상19:1-3).

2)    엘리야는 급히 친지를 찾아 다니면서 은신처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렇게 자신을 위해주던 그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그의 조국에서는 하나님의 선지자인 자신을 숨겨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절망을 하고 맙니다. 멀리 남조 유다 왕국의 남단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쳐서 그만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죽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왕상19:3-5).

3)    그러한 엘리야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하나님신앙의 회복을 위하여 숨겨두고 있는 7,000명의 의인이 있다는 것입니다”(왕상19:18).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얼마 후에 그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엘리야의 뒤를 잇게 되는 선지자 엘리사입니다(왕상19:19-21). 그러므로 선지자 엘리야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능력이 많은 선지자라고 그만 교만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음으로 하여 조국에 하나님신앙이 살아 있는 줄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신과 같은 7,000명의 선지자를 숨겨 놓으시고 계시기에 아직 그 땅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18:32)”.

4)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함부로 판단하고 재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참으로 부요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만민과 만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3:13-17, 11:33). 그러므로 성도들은 온전히 자신을 바쳐서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를 길러내어 파송할 따름입니다(28:18-20, 11:35). 그 길에 동역자가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저 사명자는 자신의 사명만 신실하게 완수하면 그것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 앞에서 충분한 것입니다(왕상19:15-17, 11:3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11:1);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생각은 확고합니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체험입니다. 바울은 자신이야 말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1).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끝까지 선민의 정통성을 보전했던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세 지파에 자신의 집안이 소속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3:5). 주전 722년경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이스라엘 10지파가 소속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남조 유다 왕국에는 3지파 곧 유다 지파, 레위 지파, 그리고 베냐민 지파가 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주전 586년까지 다윗왕조를 지탱하면서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신앙을 파수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물론 주전 516년부터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일부 유대 왕국의 후손들이 제2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신앙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그 일에 가장 앞장을 서고 있는 자들이 히브리정경을 연구하여 주석을 만들고 선민 유대인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던 바리새인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과거 랍비 사울로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3:5). 그러나 그 다음의 역사는 유대교리를 이론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유대교를 개혁하고 개방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길을 가도록 만들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바리새인들은 세상적인 꾀와 정치적인 권력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맙니다.

(3)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민 유대인들이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초대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방인 성도들의 주장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탄압한 전력(前歷)이 있는 랍비 사울과 같은 자신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회개하게 만드시고 이방인 사도로 요긴하게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때를 보아 그들을 대대적으로 회개의 마당으로 불러내시고 모두 구원하시고자 계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11:2-3);

(1)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막상 초대교회가 처하고 있는 현실을 들여다보게 되면 낙심이 천만입니다. 마치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가 직면하고 있던 답답함과 절망을 느끼고 있습니다(11:2b). 바울이 엘리야의 말을(왕상19:10) 원용하여 당시 선민 유대인들의 타락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11:3a);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시므리의 반역사건을 평정한 장군 오므리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이 됩니다. 그는 왕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고 왕권을 튼튼히 합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은 아합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큰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바알 신을 섬기고 있는 시돈 나라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하고 바알 신을 섬기기에 열심입니다(왕상16:31-32). ②둘째, 바알 신의 신부로 아세라 신상을 만들어 역시 섬기고 있습니다(왕상16:33). ③셋째,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합심하여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문화를 보급하자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의 씨가 말라버리고 맙니다(11:3a). 사도 바울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종교법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총독을 정치적으로 압박하여 예수님을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 십자가에서 처형하고 맙니다. 그것은 헤롯 왕가에서 선지자 세례 요한을 처형한 사건과 함께 선민의 땅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입니다. 그렇게 선지자와 메시아를 처형해버린 선민 유대인들이 과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2)    둘째, 주의 제단을 헐어버렸다는 것입니다(11:3b); 아합 왕이 왕도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짓고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아세라 목상도 만들어 그곳에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에 열심입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에는 찾아오는 백성들이 사라지고 맙니다(11:3b). 헤롯 왕가가 세례 요한을 참수해버리자 그 제자들이 흩어지고 맙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로마총독의 협조를 얻어서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키고 나자 그의 제자들이 또한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3)    셋째, 이제 하나님신앙을 온전히 파수하고 있는 자는 엘리야 자신 뿐이라는 고백입니다(11:3c);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속으로 들어 가시자 온 세상이 영적으로 흑암이 되고 맙니다.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천국복음이 발을 붙일 곳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이방인 선교에 열심인 사도 바울도 때로는 초대교회에서 위기에 몰리고 있습니다. 그의 사도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이 얼마나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처럼 낙심하여 하나님께 자신만이 외롭게 올바른 복음을 전하며 투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2)  당시 선지자 엘리야가 고발하고 있는 그와 같은 상황이 선민 유대인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선민들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11:2a). 그와 같이 사도 바울이 판단하고 있는 근거에 대하여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바울이 두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자신의 회심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②또 하나는 호렙 산에서 엘리야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앞 절의 강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다음 절의 강해에서는 후자에 대하여 살펴볼 차례입니다.

셋째로,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11:4);

(1)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피신시켜 줄 사람이나 가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는 절망합니다. 그는 그래도 하나님신앙이 살아 있는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으로 도망을 칩니다. 멀리 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브엘세바에 이르자 힘이 진하여 그만 죽고자 합니다(왕상19:3-4). 바로 그때에 성령님께서 엘리야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기적을 베풀고 그의 발걸음을 미디안 광야 호렙 산으로 인도합니다(왕상19:5-8).

(2)  그 옛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호렙 산에서 엘리야가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일찍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북조 이스라엘 땅에 3 6개월간의 가뭄이 들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5:17). 그리고 다시 기도하자 큰 비를 주신 여호와이십니다(5:18). 그러므로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 가운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왕상19:11-12a).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믿음의 소망을 가지도록 만드십니다(왕상19:12b-18).

(3)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언급은 엘리야가 절망스러운 조국으로 판단하고 있는 그곳에 여전히 바알을 섬기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7,000명의 의인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여호와)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7,000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그 대목을 원용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글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여호와)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11:4);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7,000명의 의인을 남겨두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용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 일은 엘리야가 조국 이스라엘 왕국으로 되돌아가서 행한 행적과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엘리사를 제자로 삼고 또한 수 많은 생도들을 모집하여 그들에게 선지자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왕상19:19-21, 22:7-8, 왕하2:3, 5, 7, 15, 17). 선지자 엘리사의 시대에 그들 선지자들과 생도들의 활약이 대단합니다(왕하9:1-10).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육시켜서 하나님신앙을 굳건하게 하는데 귀하게 사용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4)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환상 가운데 만나고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9:2-9). 그는 그때부터 히브리정경을 다시 공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아 아라비아로 갔으며 소아시아 길리기아 다소 성으로 돌아가서 고향집에서 말씀을 묵상합니다(11:25, 1:17, 21). 그 결과 그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31체의 하나님의 신비와 이방인 및 선민들을 모두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가 깨달은 하나님 말씀의 뜻을 시리아 안디옥의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는데 사용합니다(11:25-26). 많은 유대인 성도들이 이방지역 안디옥 교회를 튼튼히 하는데 동참하고 있습니다(11:19-22, 13:1). 따라서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자신들의 사명이 이방지역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유대인 교포들과 이방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그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7,000명의 유대인 의인들을 이방지역에서도 발굴하여 선교자로 교육을 시키고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넷째로,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1:5); 사도 바울이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 시대의 일이 800년 이상이 지난 자신의 시대에도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에 그대로 발생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우리 성도들은 사도 바울처럼 이방인들과 우리 민족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1:5). 하나님신앙이 사라진 것으로 보이고 있는 곳에서도 은밀하게 남은 자가 아직도 여호와께 민족의 구원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훈련이 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파송하고자 하십니다. 그 역사가 지금도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과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의 경험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우리 한국인 성도들도 공산치하에서 고생하고 있는 북녘의 동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직도 그곳에서 은밀하게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7,000명의 성도들이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부디 엘리야의 시대가 빨리 지나고 이제는 많은 선지자와 생도들이 큰 활약을 하게 되는 엘리사의 시대가 열려야만 하겠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선지자 엘리야처럼 많은 생도들을 모집하여 선지자 훈련을 시켜야만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부흥의 역사가 아무쪼록 한국교회에 그리고 해외에 살고 있는 한인성도들에게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