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7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3. 12:55

로마서 강해 제70(10:19-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11()

 

사도 바울이 모세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온 세상에 어떠한 순서로 전파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가?(32:21, 65:1-2, 10:19-21)

 

본문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영적으로 만난 때를 기준으로 하여 히브리정경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가 랍비 사울이었을 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히브리정경의 말씀이 그가 하나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깨닫고 나자 새삼 달리 해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 가운데 인용이 되고 있는 모세의 글과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의미를 복음의 전파와 구원의 순서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의 친척과 골육인 선민 유대인들을 여호와께서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해주실 지 그 점에 대하여 시사해주고 있는 중요한 예언의 구절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히브리정경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안목의 변화는 그가 랍비 사울이었을 때에 무엇을 공부하였으며 다메섹에서의 영적인 체험과 깨달음을 통하여 어떠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다시 살펴봄으로써 어느정도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히브리정경에 대하여 정통한 자로서 선민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이 율법선생인 랍비입니다. 그러한 랍비가 되기 위하여 선민사회에서는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10년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부하고 있는 내용은 크게 보아 세가지입니다;

1)    첫째, 경전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오늘날의 히브리정경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나크또는 미크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타나크는 모세오경인 토라’, 선지서인 네비임’, 성문서인 케투빔의 머리글자를 딴 것입니다. 그리고 미크라는 글로 적혀져 있으므로 읽을 수 있는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2)    둘째, 기록이 아니라 말로써 전승이 되고 있는 또다른 경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미쉬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뒤늦게 기록하고 연구하면서 몇 차례 증보를 합니다. 마지막 증보판이 소위 탈무드입니다.

3)    셋째, 바리새인들이 100년 이상 참으로 경전의 연구에 열심입니다. ‘미크라미쉬나를 비교연구하여 하나의 주석’(註釋, 글자의 뜻을 풀이하고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여 그것을 간추려 본문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를 달고 있는데 그것을 모은 것을 말함)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미드라쉬입니다.

(2)  둘째, 수천명의 바리새인들 가운데 그 이름이 알려진 랍비나 교법사에게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이 위의 세가지를 배우기 위하여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가나안에 살고 있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외국에 살고 있는 경건한 교민들의 자제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1)    랍비 사울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는 소아시아에서 헬라의 학문을 가르치고 있는 교육도시로 이름이 높은 길리기아의 다소 성 출신입니다(22:3a). 베냐민 지파인 그의 부모는 일찍 그곳으로 이주하여 생활의 기반을 잡고 로마시민권까지 획득한 바가 있습니다(3:5, 22:27).

2)    그들은 똑똑한 아들 사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같은 베냐민 지파로서 당대에 가장 뛰어난 율법학자로 그 명성이 자자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랍비가 되는 수업을 받게 합니다(5:34, 22:3b). 1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자 사울이 가말리엘의 학풍을 이어받아 스승의 뒤를 이을 수도 있는 유망한 젊은 랍비이며 행동하는 바리새인으로 그 이름이 산헤드린 대 공회에도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9:1-2).

(3)  셋째, 그러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을 하게 됩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환상 가운데 깨닫게 됨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정경을 보는 그의 눈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신관(神觀, the view of God)이 변하게 됩니다. 그는 한 마디로, 다윗 대왕이 시편 제110편에서 찬양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우편 보좌에 계시는 주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게 됨으로써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을 강력하게 인지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4:6, 고후13:13).

(4)  넷째, 사도 바울이 그 밖에 히브리정경에서 깨닫게 된 사실 두가지가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이 먼저 깨닫게 되고 구원으로 나아가게 되는 시대가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목에 대한 모세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32:2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65:1).

2)    둘째, 하나님께 패역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선민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65:2).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서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10:19);

(1)  사도 바울의 관심은 두가지입니다; ①첫째, 그의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대대적으로 전파가 되며 이방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 들이고 많이 구원을 얻고 있는데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②둘째, 그렇다면 자신의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은 언제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심을 지니고 있는 모세의 눈에 히브리정경이 색다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질문에 대하여 그 답변이 벌써 모세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을 그가 발견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그는 먼저 모세가 신명기 제32장에 싣고 있는 예언의 한 토막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예언을 다음과 같이 노래의 형식으로 수록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32:21),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서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10:19).

(3)  모세가 예언 가운데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질투시기입니다. 비슷한 용어가 서로 다른 경우에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1)    첫째, ‘질투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출애굽기 제20장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기록하면서 벌써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20:5). 선민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축복을 쉽게 얻기 위하여 만만한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여호와의 질투를 자극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오랜 세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삼사 대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한시적이라는 말입니다. 그 시기가 지나 하나님의 분노가 긍휼로 바뀌게 되면 다시 회개하는 선민들에게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모세가 이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6). 요컨대, 하나님의 미움은 짧고 회개하는 자에게 그 은혜 베푸심은 엄청 길다는 것입니다.

3)    둘째,시기심은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 시기심 때문에 타인에 대한 분노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형제사이에서도 그러합니다. 창세기 제4장에서 그 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습니다;아담부부의 아들인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암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4:4-8).

4)    그러한 인간의 속성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32:21). 선민 유대인들이 바라볼 때 자신들의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이방인들이 먼저 대대적으로 받아 들이고서 모두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선민들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의 뒤를 이어서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10:9).

둘째로,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10:20-21); 사도 바울은 모세의 예언을 대선지서를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가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1)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훗날 이방인들에게 먼저 성도들을 보내어 대대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고 회개의 영을 보내어 하나님신앙으로 많이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조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선민들의 영적인 타락에 대하여 진노하셨기 때문입니다(32:21). 그 점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65:1a). 그 사실을 발견하고서 사도 바울이 이사야의 예언을 다음과 같이 옮겨 적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여호와)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10:20);

1)    여기서 이사야와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두가지 특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①첫째, 이방인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②둘째, 이방인이란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창조주를 찾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구하지도 아니한 괘씸한 백성들이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대대적으로 전파하고 회개의 영을 보내어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하여 크게 실망하셨기 때문입니다.

2)    참고로, 출애굽기 제19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애초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이유가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 그리고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는 거룩한 백성의 의무를 행하라는 것으로 보입니다(19:4-6). 그런데 그 의무를 선민들이 일체 실행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의 집단 이기적인 현세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우상문화에 깊숙하게 빠져버린 선민들을 계속 보호하고 특혜를 줄 실효성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이방인들이 그 반대급부를 얻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2)  이사야의 예언을 계속 살펴봅니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65:1b),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65:2);

1)    여기서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는 두가지의 뜻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①첫째, 창조주를 잊어버리고 그 이름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아간 이방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②둘째, 진심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한 선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전자로 볼 경우에는 그동안 창조주를 찾지도 아니하고 구원의 길을 묻지도 아니했던 이방인들에 대한 묘사를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라고 더 알기 쉽게 요약한 것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를 한번 더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후자라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선민의 경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역시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순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선민의 경우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사야 글 그 다음 구절이 아주 매끄럽게 연결이 됩니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65:1b),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65:2); 사실 여호와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고 있는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한다면 모든 일을 하기에 앞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앞에서 의사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선민들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우상문화에 깊이 빠져서 그렇게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조금 더 풀이를 해봅니다; 여호와의 생각과 뜻을 묻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과 뜻을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한다면,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패륜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패역한 백성들을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서 사도 바울이 찾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입니다. 그 점이 손을 벌리고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15:20-24)으로 잘 표현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65:2). 따라서 사도 바울도 그 표현을 그대로 빌려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10:21).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과 순서를 따라서 이방인과 선민을 구원하는지 히브리정경에서 그 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 순서는 이방인들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우선순위가 그렇게 되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우선순위의 유리와 불리에 관한 사항입니다. 그 점에 관하여 사도 바울이 제11장에서 계속 논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3-36).

전체적으로는 이방인과 선민의 순서가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먼저 여호와의 뜻을 받들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개인적으로 먼저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달려가시는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