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7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4. 07:35

로마서 강해 제72(11:6-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13()

 

성도가 여호와를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는 무슨 은혜를 베푸시는가?(11:6-10)

 

사도 바울은 늘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믿음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만을 믿고서 과감하게 부자인 아버지 데라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장남의 자리를 떠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미개한 땅에서 1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없는 자신에게 자손의 번성을 주시겠다고 하는 여호와의 약속은 전혀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만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하는 수가 없어서 양자를 들이려고 합니다(15:2).

그때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하늘에 총총한 별무리를 한번 쳐다보라고 하십니다. 그 찬란한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십니다(15:5). 아브람은 마음을 돌이키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의 번성입니다. 창조주 여호와를 피조물인 자신이 믿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믿고서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피조세계를 믿지 아니하고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믿기로 작심을 합니다(15:6). 그때 아브람의 그 믿음이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칭찬이 있게 됩니다. 훗날, ‘아브람이라는 세상적인 이름이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된다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는 이름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됩니다(17:5-6).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고 있습니다(6:38-40).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 하나님말씀의 뜻이라고 백성들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버지께서 보내어 주시는 백성들을 모두 살리기 위하여 그들의 각종 질병과 장애를 고쳐 주십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나라의 소망으로 채워 주십니다(11:20).

당시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선민사상에 젖어 있는 유대교지도자들과 선민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쫓아내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주지 아니하고 있는 자칭 메시아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 결과 십자가 처형이 결정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한 대속의 제사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26:42). 끝까지 자신의 뜻과 이익을 내려놓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삶을 살아가라고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을 청종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결과 3일만에 창조주의 능력으로 무덤속에서 부활하시는 역사가 발생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육신을 입고 있는 피조물인 자신의 불완전한 생각과 뜻을 따라서 이기적으로 그리고 현세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어디까지나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뜻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선한 청지기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그 부활과 영생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여호와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고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행동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 불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적인 삶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선민 이스라엘이 그러한 함정에 빠져 있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11:7-1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살펴봅니다;

첫째로,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11:6);

(1)  사도 바울이 살고 있던 시대는 고대 로마제국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잘 보이고 충성하게 되면 큰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의 고향 다소 성의 사람들처럼 황제에게 충성하여 그 귀한 로마시민권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황제를 섬기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위로 말미암아 은혜를 얻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2)  그와 같은 이치를 사도 바울이 믿음과 행위에 대입을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를 믿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대속이 삶을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활과 승천이 있게 되는 것처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며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3)  반면에 창조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 은혜를 믿음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종교적인 행위와 조직체의 권위로써 얻고자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칭의와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고자 결심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그 불신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상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위적인 노력으로 자력구원을 달성하고자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은혜로서 주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11:6).

둘째로,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11:7);

(1)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율법생활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그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저 이웃이 보기에 그리고 유대교지도자들이 보기에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것으로 비치게 되면 그것으로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를 믿고 그 앞에 정직하게 설 때에 의롭다 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이 그와 같은 믿음의 본질에서 이탈함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의 본질로 돌아오라고 선민의 사회에 오신 예수님께서 외치고 있습니다.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죄인임을 고백하라고 하십니다(23). 그러나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그 질책을 싫어하여 그만 처형을 하고 맙니다. 그 결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복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하여 이방 땅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창조주를 모르고 제멋대로 살고 있던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서 회개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현지에서 초대교회를 세우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3)  비록 이방인 사도로 헌신하고 있지만 바울의 한쪽 관심은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의 구원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 그것에 쏠리고 있습니다. 자신과 같은 랍비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만나서 회개를 하고 이방인 사도로 택정함을 입어서 헌신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택한 자를 구원하고 계신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전체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속히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도 빨리 해소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4)  이방지역 초대교회에는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인 성도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1)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으며 그 덕택에 이방지역에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것은 창조주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민들을 우둔하게 만들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그 잘못을 남은 유대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충분한 수의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시간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인지도 모른다고 사도 바울이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11:7).

셋째로,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과 듣지 못할 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11:8);

(1)  사도 바울이 자신의 견해는 히브리정경의 해석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의 본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 남은 자들의 그 우둔함이 여호와의 뜻일 수도 있다는 의미가 모세오경과 선지자의 글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29:4),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29:10).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과 듣지 못할 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11:8).

(2)  그와 같은 취지의 말씀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되는 이사야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뚜렷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6:9-10). 그 옛날 애굽의 바로의 완악한 마음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내버려두신 책임이 하나님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8:32, 9:12).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애굽에 보이고 여호와의 이름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기 위한 조치라고 부연설명이 되고 있습니다(9:16).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가 사도 바울의 시대에 유대인 사회와 이방인 사회에서 전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거치는 것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11:9-10);

(1)  사도 바울은 주전 15세기 모세의 시대나 주전 8세기 이사야의 시대뿐만 아니라 주전 10세기 다윗 왕의 시대에도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히브리정경에 적혀 있는 하나님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실천하지를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유대교는 하나님말씀의 본래 뜻인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의무에 대해서는 둔감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참고로,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해서는 처음 위임식 때 일주일간 속죄의 제사를 드립니다(29:1, 35). 그리고 남은 평생을 다른 사람의 속죄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대제사장의 나라가 바로 선민 이스라엘입니다(19:6a). 그리고 죄악에 물든 이방인들의 도시를 구원하고자 마치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중보의 기도를 열심히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자들이 거룩한 백성입니다(18:23-32, 19:6b).

(3)  그런데 그와 같은 선민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선민우월사상과 선민만의 구원사상에 젖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하여 다윗왕이 시편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69:22-23). 그 대목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거치는 것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11:9-10).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모세의 시대와 다윗의 시대 그리고 이사야의 시대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본문에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히브리정경을 지니고 있는 선민들이 하나님말씀의 뜻을 저버리고 이방인 구원을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를 허용하신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는 선민이나 창조주를 모르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이방인이나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3:9). 그러므로 선민 이방인 상관없이 누구나 대속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만 합니다.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대속과 중보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여호와의 의로운 종으로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택정함을 입은 자들이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우둔하고도 완악하게 제멋대로 율법생활을 하게 되면 선민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빠진 그 함정에 누구나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경고의 메시지가 본문에서 웅변적으로 울려 나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은 성도답게 사도 바울의 삶의 궤적을 닮도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