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7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6. 04:16

로마서 강해 제75(11:19-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16()

 

하나님을 불신하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음의 자리로 불러내신 여호와께서 이제는 선민들의 믿음을 회복할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언급에 대하여(11:19-24);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들에 대하여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에 관하여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동안 풀리지 아니하는 모순과 의문들이 비로소 본문에서 이해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인도를 해주고 있는 개념들이 어떠한 용어 가운데 담겨 있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그러한 목적으로 직 간접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는 용어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접붙임, 믿음, 의로움, 원가지, 곁가지, 인자하심, 준엄하심, 접붙이실 능력, 본성, 돌감람나무와 좋은 참감람나무 등입니다. 그 개념들을 먼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접붙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지들이 살아서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뿌리와 줄기로 이루어지고 있는 그 나무에 붙어 있을 때입니다. 그 나무를 떠나게 되면 가지는 말라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나무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영생을 줄 수 있는 좋은 나무입니다. 여기서는 참감람나무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②또 하나는 영생을 줄 수 없는 나무입니다. 여기서는 돌감람나무라고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생의 구원을 주시고 싶어서 영생을 줄 수 있는 나무접붙임을 시도하십니다.

(2)  둘째, 영생을 줄 수 있는 좋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점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주시고 있습니다(1:26-27). 그것은 적어도 두가지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창조주를 닮도록 인간을 귀하게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 귀한 것이 바로 스스로 선택을 하고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의지입니다. ②둘째,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을 하고 그 생기를 코로 흡수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2:7).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그 코로 생기를 흡수할 수 있을 때에 영생을 누릴 수가 있는 피조물입니다. 그것은 마치 가지가 영생을 줄 수 있는 좋은 나무에 붙어서 그 생명의 진액을 흡수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2)    그런데 그 참감람나무에 접을 붙이자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역시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①하나는 영생을 얻고자 하나님을 선택하는 인간들의 믿음입니다. ②또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고 확신하는 마음입니다. , 영생의 나무에 접을 붙일 수 있는 능력이 사람이나 다른 영적인 존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는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영생의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위의 내용은 요한복음 제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와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좋은 포도나무이며 아버지 하나님은 농부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15: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좋은 포도열매를 많이 얻고자 포도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5:2). 나아가서 성도들이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잘 붙어있기만 하면 깨끗하게 되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15:4-5).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서 믿음으로 접붙임을 받는 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 사도 바울은 선민들이 좋은 참감람나무의 원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21). 그리고 이방인들은 돌감람나무의 가지들입니다;

1)    그렇게 구별이 되고 있는 이유는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하여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느냐? 아니면 그러하지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참감람나무의 가지입니다. 창조주를 모르고 무신론자로 또는 범신론자로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은 돌감람나무의 가지들이며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2)    그런데 하나님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으로 백성들에게 선포하시고 그 제자들을 가르쳐서 온 세상으로 파송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당장은 예수님의 그 만민구원사상이 선민 유대인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게 됩니다.

3)    그 이유는 선민들이 더 이상 창조주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고 피조물인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적인 유대교리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리는 선민들의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축복사상을 율법으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민구원사상과 선민우월사상에 입각하고 있는 이기적인 종교입니다. 그들의 유대교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분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참감람나무에서 원가지몇 개가 찍힘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1:24).

4)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된 돌감람나무의 가지들이 접붙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접붙임을 받게 된 가지들이 이른바 곁가지라고 하겠습니다. 곁가지들은 창조주를 무시하고 외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본성을 믿음으로 극복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조물인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써는 도저히 육신의 탐욕을 이길 수가 없으며 죄인의 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서 창조주 앞으로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창조주에 대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의 메시지를 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10:10-15).

5)    예수님의 메시지는 창조주 여호와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죄 사함과 칭의를 얻을 수가 있으며 구원과 영생을 누릴 수가 있다고 하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그 믿음을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선민 이방인 구별을 하지 아니하시고 누구든지 참감람나무에 접을 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내용을 알기 쉽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준엄하심으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4)  넷째, 하나님은 준엄하심인자하심의 성품을 모두 지니고 계십니다(11:22);

1)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돌보시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며 창조주의 인자하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의 뜻을 받들어서 이 세상을 생명력이 넘치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청지기인 사람들이 그만 그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2)    선민인 자신들만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구원을 독점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사상을 반영하여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종교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이상 믿지도 아니하고 있는 불신앙입니다.

3)    그렇게 창조주를 업신여기고 불신하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원가지라고 하더라도 찍어 버리십니다. 그러나 그 준엄하신 심판가운데는 하나의 속마음이 감추어 있습니다. 다시금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면 다시 접붙임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종말이 오기 전까지 유효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들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11:19-20);

(1)  선민 이방인 차별이 없습니다. 창조주의 눈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고 똑같습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창조하신 귀한 피조물들입니다. 부모의 눈에 자식들이 하나같이 소중하듯이 선민과 이방인들 모두가 소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패역한 경우입니다. 패륜을 저지르고 반역을 한다면 그냥 그 자리에 둘 수가 없습니다. 처벌을 하여 그 버릇을 고쳐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게 되는 경우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을 믿지 아니하게 되자 그러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습니다;

(2)  반대로 그 자리에 접붙임을 받게 되는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본래 창조주를 믿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아들의 대속의 죽으심과 그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아들을 내어 놓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방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그 심정으로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돌아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그러한 믿음으로 서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차제에 바울이 경고의 메시지를 하나 적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서게 된 그 은혜의 자리에서 항상 두려워하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불신하고 패역한 마음을 먹게 되면 선민들처럼 아낌없이 찍히어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선민 이방인 차별이 없이 누구나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 또는 사람이 만든 종교로써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잘못 믿는 그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의 나무에서 절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11:21-22); 너무 중요한 대목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재삼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1)  역사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십니다. 그들이 믿음의 조상들을 가진 언약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주전 15세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을 유월절 밤에 한꺼번에 죽여 버리십니다(12:29-30). 그리고 주전 8세기 말 히스기야 왕 때에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원정군 18 5천명을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하룻밤에 몰살시켜 버리십니다(왕하19:34-35). 따라서 사도 바울은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원가지이며 사랑하신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하지만 선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마치 생명나무에서 단절이 되듯이 그렇게 찍히어 나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선민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무시하고 믿지 아니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역사도, 앗수르의 군대를 쳐부순 이야기도 모두가 선민 유대인들이 의롭고 율법생활을 잘 했기 때문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옛날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시인 할례를 마치 하나의 신분증처럼 육체에 지니고 있기만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동적으로 자신들의 수호신이 되어 주신다고 하는 일종의 우상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3)  그것은 선민 유대인들이 주인이고 하나님은 종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믿음생활에 있어서 불신이며 패역함입니다. 그러한 가지는 선민이라고 하는 원가지이더라도 아낌없이 찍어버립니다. 그것이 준엄하신 하나님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겨우 접붙임을 받고 있는 곁가지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는 그 순간 즉각적으로 찍혀 나가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선민)들도 믿지 아니하는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11:23-24);

(1)  흔히 사도 바울의 접붙임설명이 참감람나무에 이방인 성도들을 곁가지로 접을 붙인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반만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면서 그 마음속에 친척과 골육인 동족들을 위하여 하나의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와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9:1-3, 10:1).

(2)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에 믿음의 나무에서 단절이 되어버린 선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인생 가운데 아직 남아 있습니다. 참감람나무에서 찍히어 버림을 받고 있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를 하기만 한다면 다시 접붙임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본래 원가지를 참감람나무에 다시 접을 붙이고 있는 것이므로 굉장히 단단하게 붙어서 엄청난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그와 같은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은근히 자신의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을 깔보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민)들도 믿지 아니하는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방인)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11:23-24).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접붙임이야기는 세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①첫째 단계는 참감람나무에서 원가지 일부를 찍어냅니다. ②둘째 단계는 돌감람나무에서 일부 가지를 찍어 내어 그것을 참감람나무에 곁가지로 접을 붙입니다. ③셋째 단계는 찍어낸 원가지를 다시 참감람나무의 제 자리에 접을 붙이고 있습니다. 조금 설명을 하면서 결론을 맺어봅니다;

(1)  첫째, 참감람나무에서 원가지 일부가 찍히어 절단이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섬기는 신앙에서 실족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으로 선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들의 잘못이 그러합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히브리정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으므로 그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참감람나무에서 끊어져 나가는 결과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사도와 제자들에 의하여 이방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를 하고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돌감람나무에서 일부 가지가 단절이 되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는 그 믿음회복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세계에서 크게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방인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참감람나무에서 절단이 된 그 원가지들에게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제공하십니다. 선민 출신들이 다시금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면 참감람나무 제 자리에 다시 접을 붙이십니다. 같은 본성을 지닌 똑같은 재질이므로 그 결합은 더욱 단단합니다. 그러한 단단한 결합을 사도 바울이 간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동족사랑이 진하게 묻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사도 바울처럼 만민구원과 더불어 동족사랑과 구원에 더욱 박차를 가하시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