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고냐(손진길 작성)

소설 여고냐16(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0. 4. 22. 05:55


소설 여고냐16(작성자; 손진길)

 

5. 여호야긴왕이 다시 여고냐가 되다;

 

하나의 왕국에서 유일무이한 지상의 신분이 국왕이다. 왜냐하면, 국왕만이 홀로 그 왕국의 주인이며 최종적인 의사의 결정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는 흔히 왕이 나라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국왕은 모든 영광과 권위의 정상이라는 자리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정치적으로 죽음을 의미한다. 일개 자연인으로는 모르지만 사회적인 신분으로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와 같은 엄청난 변화를 인생 가운데 홀로 실감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여고냐이다. 그는 지금 신바벨론제국의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성까지 끌려가고 있다. 비록 19세의 젊은 나이라고는 하지만 4천리에 이르는 거리를 두 손이 묶인 채 끌려간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다.

주전 5972월 하순 마지막 추위가 살을 에이고 있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들판을 지나가고 있을 때에는 살만이 아니라 뼈까지 추워서 얼음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하달이 슬쩍 다가와서 한마디를 해준다; “전하, 소신이 어릴 때부터 가르쳐 드린 그 호흡법을 사용하세요. 추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

그 말을 듣자 여고냐가 겨우 생각이 난다. 그는 지난 3개월간 전란 가운데 국왕이 되어 너무 국사가 바빠서 전혀 그 호흡법을 사용하지 아니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추운 것으로 느껴진다. 여고냐는 즉시 길을 걸으면서 그 호흡으로 몸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당장 추위에 뼈마디가 덜덜 떨고 있으니 그 방법이라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오직 그 호흡법에만 집중하여 길을 걸었더니 반 시진도 못되어 갑자기 단전에서 후끈한 열기가 발생하여 전신으로 퍼지기를 시작한다.

예루살렘 왕궁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을 때에는 수련을 거듭해도 별로 달라지는 기미가 없던 신체에서 어떻게 갑자기 이러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여고냐는 그것이 신기하여 자꾸만 단전호흡을 계속한다. 이제는 뜨거운 열기가 머리와 발끝까지 퍼져 나가는 그 경로가 몸으로 느껴지고 있다.

지난 12년간 끊임없이 수련해오던 그 무공과 호흡법이 이제서야 그의 뇌리와 폐부에서 마치 유기체처럼 꿈틀거리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뜨거워진다. 그리고 눈이 밝아지면서 사방 십리의 풍경이 명료하게 파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느끼면서 속으로 여고냐가 한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고생을 모르고 세자와 국왕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무공과 호흡법이 그저 사치품이었구나. 이제는 모든 권력과 영광을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의 포로신세가 되자 비로소 내 몸과 주변이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구나. 나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다시 얻고 있는 것일까?... “.

여고냐가 더 깊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것은 심오한 이치를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주인이 국왕이라고 하는 관념에서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획기적인 깨달음의 실체가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창조주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신정국가 유다왕국에서는 사실 왕국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왕과 신민들이  거만하게 그 주권을 자신들이 차지하고 왕국을 자기들 멋대로 운영하였으니 그것이 불신앙의 뿌리인 것이다.

그런데 주전 597년에 실질적으로 신정국가 유다왕국이 망하게 되고 국왕 여호야긴이 한갓 적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자 그가 비로소 신정국가의 왕이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만시지탄이지만 그래도 영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달은 포로가 아니라 자유인이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 황제가 그의 충성심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야긴왕의 근위대장인 하달은 자유인이 되어 바벨론에서 옥중의 여고냐를 돌보도록 하라. 짐은 평생동안 유다왕을 다시 보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한 특혜를 받고 있는 하달이기에 부지런히 포로들 사이에서 여호야긴왕의 모친과 가족들을 챙기고 있다. 47세인 하달보다 대비 느후스다가 나이가 더 적은 40세이다. 그리고 왕비 아비가일22살이고 후비 안나21세이다.

그녀들이 왕자 스알디엘, 말기람, 브다야를 돌보고 있는데 아직 4, 3, 2살의 아기들이다. 4살인 왕자 스알디엘과 2살인 브다야는 왕비 아비가일의 소생이고 3살인 왕자 말기람은 후비 안나의 소생이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약골인 장남 스알디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4천리 길의 추위를 견디지를 못한다. 모친 아비가일이 불쌍하게 생각하여 많은 천으로 몸을 싸주어도 별로 소용이 없다. 결국 3일간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더니 결국 죽고 만다.

그러자 적병들이 무지막지하게 어미의 품에서 4살짜리 꼬마의 시신을 빼앗아 그만 들판에 던져버리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하달이 조심스럽게 그 시신을 수습하여 언 땅을 파고서 매장한다. 그리고 나무토막을 주워서 왕자 스알디엘의 묘라고 한 면에 기록하고 말뚝으로 세워준다.  

  그 지점이 유프라테스강 상류 서편에 있는 하란 부근이다. 아비가일은 둘째아들 브다야를 잃지 아니하기 위하여 자신의 품에 꼭 안고서 길을 간다. 포로로 끌려가는 도중에 죽어버린 장남에 대해서는 그녀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왕비 아비가일이 그때부터 속으로 기도한다; “여호와 하나님, 불쌍하게 죽은 왕자 스알디엘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그 대신 저의 남은 인생 여호와를 섬기며 살겠습니다… ”.

귀족의 딸로 예루살렘에서 귀하게 자라나 17세에 세자빈이 된 그녀는 그동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졸지에 그 신분이 적군의 포로가 되고 자식 잃은 어미가 되자 이제서야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여인의 기도마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시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훗날 그녀의 죽은 아들 스알디엘의 양자가 된 스룹바벨이 다윗의 가문의 수장이 되고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2성전을 건축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달이 첫째왕자 스알디엘이 하란을 지나다가 그만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조심스럽게 여고냐에게 전해준다. 그러자 19세의 청년 여고냐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차마 소리를 내어 울지를 못하고 있다. 그와 함께 끌려가고 있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서 하달이 뒤로 물러난다. 슬픔에 빠진 여고냐는 하란에서 바벨론까지 이르는 그 먼 길을 어떠한 생각으로 지나왔는지 모른다. 살을 에이는 겨울의 추위도, 적군의 포로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도 모두 생각이 나지를 아니한다. 그저 자식을 앞세운 아버지의 비참한 애통함만이 그의 심정을 전부 채우고 있다.

그 결과 바벨론성에 도착하여 깊은 감옥에 투옥이 되었지만 여고냐가 별 반응이 없다. 그저 인생무상이라는 생각만이 들고 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한다; “국왕의 신분이다가 적의 포로가 된 나 여고냐이구나. 나는 무엇인가?... “.

그의 상념이 외로운 감옥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나는 다윗왕조 유다왕국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구나. 이제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구나. 죽어서 조상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어째서 이 바벨론성의 감옥에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있는가?... “.

그렇게 세월이 무심하게 지나가는 동안에 갑자기 여고냐의 머리에 떠오르고 있는 깨달음이 하나 있다; “그래, 본래 세자의 자리도 유다왕국의 국왕의 자리도 내 것이 아니다. 그저 창조주이며 운명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나에게 잠시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제는 주인이 거두어 갔으니 나는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나의 인생과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는 이제 죄인인 나에게 무엇을 대신 주고자 하실까?... “.

신기하게도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여고냐가 지나간 세월이 아니라 다가오는 세월을 기다리고 있다. 어째서 그러한 신앙의 경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가 잘 모르고 있지만 어린 시절에 외무대신 아히감의 저택을 출입하면서 선지자 예레미야와 그의 제자들을 만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신이 받은 여호와의 말씀을 제자인 바룩스라야 그리고 그다랴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여고냐보다 10살 정도 연상이다. 하지만 나이의 차이를 떠나서 여고냐가 그들과 교류를 하였기에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를 제법 알게 된 것이다.

그 어린 날의 기억이 이제서야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여고냐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여고냐는 간헐적으로 옥중의 자신을 찾아오고 있는 스승 하달에게 부탁한다; “사부, 이곳 바벨론에서 선지자들의 글을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좀 구해주세요. 제가 여호와의 말씀을 공부하고 싶어요… “.

뜻밖에 하달이 즉시 대답한다; “구할 수가 있습니다. 세가지 경로가 있지요. 첫째, 예루살렘에서 끌려온 제사장 집안이 있어요. 그들이 모세오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그발 강가에 있는 유대인촌에서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서 유민들에게 전하고 있지요. 그리고… “.

하달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한다; “셋째, 요즈음 바벨론에서 유대인 출신 젊은이들이 유명해지고 있어요. 특히 8년 전에 이곳으로 끌려온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여호와신앙을 전하고 있답니다. 그들은 히브리사상과 무예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때로 그들의 집에 출입하여 무예를 가르치고 있답니다”.

그 말을 듣자 여고냐의 얼굴에서 생기가 난다. 그래서 그가 묻는다; “저의 비빈들은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하달이 대답한다; “느부갓네살 황제가 유대인 장정들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포로로 삼았지만 부녀자들에 대해서는 다소 여유를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

하달이 잠시 숨을 쉬고서 말한다; “바벨론 변두리에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유대인 촌락을 형성하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조그만 집을 마련하여 전하의 가족들을 모두 잘 모시고 있습니다. 나중에 출옥하시면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전하께서는 옥체를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듣자 여고냐가 말한다; “사부님, 제가 스승의 복은 있는 모양입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 못난 제자를 이렇게 끝까지 돌보아 주시니 그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달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요즈음 전하의 용안을 보게 되면 저도 제자의 복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피장파장이지요. 하하하… “.

사제간에 그렇게 정담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주전 597년과 596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 사이에 감옥에서 여고냐가 하고 있는 일상사가 둘이다. 하나는, 하달이 구해서 준 서적을 열심히 읽는 것이다. 주로 선지자들의 글이다.  또 하나는, 무공수련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자 악관의 나이가 된 여고냐의 심신이 강건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 마치 출가한 것과 같다. 그러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여고냐에게 남은 인생 가운데 과연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