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장별강해(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제18장 후반부 강해설교

손진길 2026. 4. 13. 14:59

요한복음 제18장 후반부 강해설교

제목; “유월절 밤 끝자락에 발생한 산헤드린 대공회의 소집과 아침에 발생한 헤롯 안디바의 예수님 재판을 생략하고 로마총독의 심판과정만 기록하다”(18:28-40)

작성자; 손진길 목사(26 413일 월요일 작성)

본문 요한복음 제18장 제28-40절 말씀을 진지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1)  유대교의 최고기관 산헤드린 대공회의 나사렛 예수에 대한 재판과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18:24, 28). 그리고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나사렛 예수 심문의 과정도 생략되어 있습니다(23:6-12). 그와 같은 과정을 생략하면서 사도 요한이 제4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가 예수를 군중에게서 격리하여 아주 빠르게 처단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존립기반이 되고 있는 3가지를 나사렛 예수가 크게 훼손하였기에 유대교지도자들은 체포조를 보내어 그를 산헤드린 대공회에 세우고 정식으로 종교재판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3가지 혐의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안식일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집에서 가까운 성전이나 회당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귀가하면 그때부터 아무런 노동행위 없이 집에서 경건하게 하루를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다니면서 벼 이삭을 꺾어 손으로 비벼서 알곡을 만들어 먹는다든가(12:1-2), 예사로 병자를 고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5:7-13). 그러한 행동은 바리새인들이 제정하여 매우 강조하고 있는 생활율법의 규칙을 위배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곡식을 도정하는 행위, 병을 치료하는 행위, 단지 성전이나 회당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기타 물건을 들고 이동하는 행위 등은 안식일에 행해서는 안되는 금지사항입니다(15:3-20).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는 선지자 예수가 앞장서서 그러한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고 있으니 그것은 유대교지도자들에 대한 도전행위인 것입니다.      

2)    둘째, 나사렛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10:30-31). 유대교에서는 오직 산술적으로 한 분 여호와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또한 예배하고 있습니다(6:4-5). 그런데 피조물인 사람에 불과한 예수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지 아니하고 자신을 여호와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창조주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이며(20:3, 7)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패역한 행동입니다(3:4-6, 14:13-15).

3)    셋째, 선민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다윗의 후손 메시아의 오심과 메시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내쫓고 지역패권국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하는 시온의 영광을 전면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세례 요한과는 달리 신위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예사로 발휘하고 있습니다. 못 고치는 질병과 장애가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을 고치는 축사의 기적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늘의 곳간을 열어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거나 죽은 자를 살려 내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능력은 그 옛날 큰 선지자 엘리야나 엘리사의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지만 베다니의 나사로를 무덤에서 죽은 지 4일만에 되살려낸 것은 다릅니다(11:39-44). 장례를 지내고 완전히 무덤에 들어가서 시신에서 벌써 냄새가 나는데 그러한 자를 부활시키는 것은 에스겔의 선지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입니다(37:8-10).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는 큰 선지자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는 메시아의 능력을 지닌 자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건설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선민의 제국이 아닙니다.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여 함께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꿈꾸고 있습니다(20:25). 요컨대, 유대교에서 말하고 있는 선민만의 구원과 그들의 세상적인 영광과 패권을 말하고 있는 다윗제국의 재건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가 주창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건설은 유대교의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는 아주 위험한 사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의 그러한 사고방식은 선지서의 내용을 깊이 살피지 아니한 결과입니다(31:31-34, 11:1-12, 65:17-18, 66:20-21, 2:28-31, 24:44-45).

(3)  그와 같은 심도 있는 논쟁이 예수님에 대한 산헤드린 대공회에서의 재판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러하지 못합니다. 피의자인 나사렛 예수에게 유리한 증인이 한사람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변호인도 없습니다. 그저 유대교지도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인만 출석하게 하여 일방적인 증언만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속전속결로 나사렛 예수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으로 판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불법적인 재판과정을 공관복음에서 이미 다루고 있으므로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제4복음서에서 구태여 그 내용을 수록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4)  또 하나 본문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하는 대목은 유대교지도자들의 아주 비겁한 행동입니다; 하나는, 유대교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최고의 재판소인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나사렛 예수를 유대교의 기반을 흔들고 있는 죄인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참람한 죄인으로 심판하였으면 그를 유대인들에게 내주어 돌을 던져 죽여야 합니다(7:54-8:1).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예수를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갑니다(18:28-32). 그의 판결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교활한 차도살인의 계책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의 음흉하면서도 교활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로마총독 빌라도가 순순히 유대교지도자들의 편을 들어주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8:38). 그 이유가 둘인데 항목을 달리하여 조금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5)  하나는, 유대 땅을 통치하고 있는 로마총독이 바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소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은밀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의 정보망에 나사렛 예수의 움직임이 모두 포착되어 있습니다. 그가 얻은 결론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여호와의 것은 여호와께 바치라!”(20:25)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그 말은 로마황제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로마황제의 통치권력을 인정하고 있으며 여호와신앙은 그것과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지도자들이 나사렛 예수에게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 위험인물이라고 하는 죄명을 붙이고 있는 것은 빌라도 자신이 얻고 있는 정보의 결론과 완전히 배치되고 있는 허위인 것입니다(18:30, 23:1-2).

(6)  또 하나는, 나사렛 예수는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한 자를 함부로 재판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은 아주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지도자들이 그 부담과 책임을 교묘하게 로마총독인 자신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그 약을 수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있는 발리도입니다. 그가 비록 장군출신이기는 하지만 은퇴한 이후에 로마의 정계에서 신임을 얻어 유대총독으로 부임할 때까지 상당한 정치적인 기량을 닦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얄팍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술책에 쉽게 넘어가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7)  유월절 한밤중에 유대교지도자들은 가룟 유다를 길잡이로 삼아 체포조를 보내어 예수를 붙들어와서 동이 트자마자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기습적으로 그를 정죄하고 아침 일찍 로마총독에게 그 신변을 인도하고 있습니다(18:28-32). 아주 속전속결입니다. 그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속히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만들고 아주 편하게 집에 돌아가서 유월절 식사를 즐기고자 합니다(18:28).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 일을 성사시켜야 합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로마총독 역시 이방인이므로 유월절에 그와 접촉하면 부정이 탄다고 생각하여 직접 만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그저 수하에게 예수를 끌고 가서 그에게 인계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빌라도 총독이 그들의 요구대로 행동하지 아니하자 그때에는 유대교인들을 동원하여 외치게 합니다;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한 예수를 처형하지 아니하고 무죄로 석방하면 로마총독도 은밀하게 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 자이다!”(19:12의역). 정치적인 위기를 느낀 빌라도 총독이 그만 악수(惡手)를 두고 있습니다. 마침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한 유대인 무장세력의 지도자 바라바를 민란과 살인죄목으로 구금하고 있습니다(23:19). 유월절은 유대인의 큰 명절이므로 바라바를 석방하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나사렛 예수의 석방을 원하느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유대인 무리에게 제안한 것입니다(18:39). 빌라도 총독의 판단으로는 진짜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한 죄인 바라바를 석방해달라고 유대인들이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하면 그들 역시 반란을 옹호하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교지도자들이 동원한 백성들은 무장세력인 바라바를 선택하고 그 대신에 평화공존을 외치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사형에 처해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18:40). 그런데 명백한 반역자 바라바를 석방하게 되면 그것은 로마총독에게 있어서 월권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막후에서 대제사장과 정치적 절충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며 유대인을 규합하여 로마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하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고 상부에 보고하고 그대로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19:19). 그에 따라 모든 책임과 사태수습은 유대교지도자들이 맡도록 하고 빌라도 총독은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다는 선고만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19:11, 27:24-2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차제에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28. 그들(유대교지도자들과 산헤드린 대공회의 관료들)예수 (유대교의 단독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서 (로마총독이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관정(官庭, 라틴어로는 프라이토리움, Praetorium이고, 헬라어로는 브라이도리온, πραιτώριον 이며, 15:16, 영어로는 the Palace of the Roman governor, NIV)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유월절 밤 날이 새자 예수님을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순식간에 재판하고, 22:66, 곧바로 성전 북쪽에 인접하고 있는 로마총독의 관정으로 들어갔기에 아직도 새벽이라는 시간표현이 나타나고 있는 것임). 그들은 (부정한 이방인과 접촉하는, 4:9, 43:32)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온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뜻깊은 출애급 해방 절기의 아침식사를 말함, 12:39-42)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비록 로마총독의 지배를 받고 있는 군정치하의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의 종교적인 자존심을 대단함. 그러므로 로마총독부에서 간부가 문간으로 나오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임) 29. 그러므로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를 끌고 왔다는 보고를 듣자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친히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유대교지도자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선지자 예수) (로마총독에게)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한 자임, 23:2)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단순히 행악자라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얼른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종교적 분쟁에 휘말린 자로 알고서 산헤드린 대공회에 다시 넘겨버리고자 하는 것임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가 단순한 종교사범이 아니라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중죄인이므로 사형에 해당하며 그를 처형할 법적 권한은 로마총독이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 그것이 대제사장 가야바가 획책하고 있는 간악한 차도살인지계임),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그 모든 과정을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속죄물로 매달기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벌써 예지하고 계시는 것임, 3:13-18, 8:31) 33. 이에 빌라도가(유대교지도자들의 고발이 사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기에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데리고)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참고로, 고발내용이 다음과 같음;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23:2)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그렇게 믿고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유대교지도자들 아니면 총독부의 정보원들)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벌써 빌라도 총독이 자신에 대한 사전 정보수집을 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여 로마황제에게 결코 반역할 생각이 없으며, 20:25, 단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설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와 같은 답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음)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유대교에 해가 되는 그)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그 옛날 다윗제국과 같은 세속적인 패권투쟁의 나라)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하늘에 있는 12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벌써 이 세상을 정복하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말씀임, 26:52-54, 왕하19:34-35)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이제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는 제국이나 패권국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임)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예수) 네가 (세속적인 유대인의)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이 세상과 천국의) 왕이니라!(28:18, 21:22-24)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1:14-18, 8:28-30, 16:13-15)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10:3-5, 6:37-39)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Τί στιν λήθεια)하더라!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로마총독인) 나는 그(선지자 예수)에게서 (내가 사전에 수집한 예수에 대한 정보와 그의 진술을 비교한 결과 그의 나라는 영생의 천국을 말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무력으로 로마제국을 정벌하는 그러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였기에)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18:28-38);

(1)   본문 28절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주제는 사도 요한은 가야바의 심문과정을 생략하고 있는가?”(18:24, 28, 26:57-68, 27:1-2)하는 것입니다;

1)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의 저자들과 다른 입장에서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의 서해안 항구도시 에베소에서 20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적어도 가지의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다시 정리하여 헬라세계와 로마제국의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논리와 사고체계에 맞도록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서술체계는 헬라의 철학과 학문의 진술방법을 많이 따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 서론에서부터 연역법(演繹法)적인 기술이 돋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가 깨닫기로는 30년전에 세상에 나온 공관복음서 3권에는 빠진 내용과 잘못 기술되고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가급적 빠진 대목을 삽입하고 잘못된 부문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대목들이 예수님 공생애 첫해의 예루살렘 성전청결사건과 니고데모의 방문, 가나에서의 차례의 기적, 사마리아 수가 여인과의 대화, 베다니 나사로의 부활이야기, 베데스다 못과 실로암 못의 기적,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부음, 제자들을 목자로 발령하는 , 세족식, 선한 목자의 비유,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내용 등입니다. 다음으로 후자에 속하는 기록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예수님 심문 이야기입니다.

2)      공관복음에서는 안나스의 심문 이야기가 나오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만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특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으로 먼저 연행된 것이 아니고 전전직인 안나스의 집으로 먼저 끌려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12-13). 당연히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사건도 안나스의 저택 뜰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8:17, 25-27). 그렇지만 공관복음에서는 모두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혼란을 마지막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바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체포해오도록 명령을 내린 자는 현직이 아니고 전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입니다. 따라서 천부장의 군대와 안나스의 하인들이 예수를 연행하여 안나스의 집으로 먼저 끌고 것입니다(18:12-13). 하나는, 안나스가 심문을 마친 후에 비로소 나사렛 예수를 현직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인계한 것입니다(18:24). 그것은 유대교의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는 안나스와 가야바의 비리이며 정치적인 야합인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이제 가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야바의 심문과정을 생략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기 전에 성도들은 이미 공관복음서를 30년이나 읽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벌써 공관복음에서 소상하게 다루고 있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산헤드린 대공회의 예수님 심문과정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는 내용을 더이상 그의 복음서에서 반복하여 수록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낭비이며 지면의 낭비인 것입니다. 참고로 사도 요한이 생략하고 있는 부문에 대하여서는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고 하겠습니다(26:57-68, 27:1-2). 공관복음에서는 전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문을 생략하고 있는가?(18:13, 15, 26:57-58). 사도 요한은 자신이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를 알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18:15). 그리고 문지기 여종에게 말하여 사도 베드로까지 집안으로 들어올 있도록 주선해주고 있습니다(18:16).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유대교 실세의 집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으며 특히 집의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친밀하게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공관복음서의 저자인 마태, 마가, 누가 등은 안나스의 프라이버시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고 있습니다.

4)      그렇지만 요한의 형인 사도 야고보는 집안을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그의 친형에게도 안나스 집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하여 침묵했을까요? 이유는 사도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사건 때문으로 보입니다. 사도 요한은 항상 베드로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야고보보다 베드로를 따르고 있는 자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베드로의 치부를 덮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사건은 공관복음에 두루 실려 있습니다. 다만 사건의 발생장소가 사도 요한의 기록과 다를 뿐입니다. 이유는 사도 베드로가 여러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장소가 가야바의 집이 아니고 안나스의 집이라고 하는 사실까지는 밝히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성도들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이지 장소에 대한 정확한 기억과 진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서 판단해보면, 사도 요한은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허물을 덮어주려고 했던 의리가 있고 포용력이 있는 성품의 인물로 보입니다.

(2)   다음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소집된 날치기 공회가 전격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종교재판의 내용과 판결의 결과는 무엇인가?”(26:57-68, 27:1-2) 대하여 살펴봅니다;

1)      대제사장 가야바, 서기관, 장로들이 예루살렘성전이 아니고 밤에 가야바의 집에 급히 모여 있습니다(26:57).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고 현재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의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다고 전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그들에게 예수님이 연행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날이 새자 얼른 예루살렘성전내에 있는 산헤드린 대공회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빠르게 재판을 진행합니다. 안나스가 실패한 나사렛 예수의 자백을 받아 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다시 지을 있다고 망언이 사실이냐는 확인부터 시작합니다(26:61). 예수님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답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26:63). 예수님이 긍정적인 답변을 하면서 훗날 하늘에서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언급하자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26:64-65).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판결하고 있습니다(26:66). 일단 죄인으로 정죄하고 나서는 죄인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죄인에게는 인권이 없습니다. 수하를 시켜서 폭행하고 모욕을 가하고 있습니다(26:67-68).

2)      대공회에서 속전속결로 그것도 은밀하게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사형이라고 선고합니다. 그것은 정당한 종교재판이라고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불법이 깊숙하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 대공회가 정식으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체포해온 것이 아닙니다. 현직이 아닌 안나스가 개인적으로 로마의 천부장에게 청탁하여 로마의 군대를 움직이고 자신의 하인들을 붙여주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행자체도 불법입니다. 심문의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안나스가 자신의 저택으로 먼저 예수님을 연행하여 심문을 행한 것입니다. 종교재판의 정당성을 정치적인 권력에서부터 얻고자 하고 있습니다. 사형판결과 집행의 권한이 유대인에게 없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로마총독에게 예수님의 처벌을 강요한 것입니다(27:1-2, 18:28-32). 남의 칼을 빌려서 예수님을 처단하고 자신들은 거룩하게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합니다(18:28). 사도 요한이 그와 같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재판과 처벌이라고 하는 것이 불법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주장 그대로 불법체포, 불법연행, 불법감금, 불법심문, 그리고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을 빌려서 사람을 죽임) 계략으로 얼룩지고 있는 대표적인 종교재판이라고 하겠습니다.

(3)   본문 29-38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 로마군정과 유대교의 선민사상”(18:28-29)입니다;

1)      기원전 1세기 중엽에 헬라세계는 모두 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되고 맙니다. 헬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헬라의 왕조들보다 로마제국의 군사적 지배가 훨씬 강력합니다. 그들의 영토는 헬라의 문명권보다 넓습니다. 이태리반도 서쪽의 유럽지역 끝까지 모두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로마의 군정 아래에서도 고개를 숙일 모르고 있습니다. 본문내용을 보더라도, 유대교지도자들은 종교적으로 부정이 탄다고 하여 자신들을 다스리고 있는 로마의 총독조차 가까이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8:28). 그들의 관념은 옛날 힘있는 애굽제국의 백성들이 힘없는 이주민에 불과한 히브리인들을 멸시하던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32. 그들(애굽사람들)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43:32).  사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힘이 없습니다. 그들은 로마군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족우월주의에 뿌리박고 있는 선민사상에 젖어 있습니다. 결과 감히 로마총독까지 이방인이라고 멸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로마총독을 가까이 하면 부정 탄다는 생각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유대교지도자들)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사람을 고발하느냐?”(18:28b-29).

2)      참으로 위험한 사상입니다. 종교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합니다. 20세기 중엽에 독일의 히틀러가 유럽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아메리카의 미국이 개입하게 되자 세계전쟁으로 확전되고 맙니다. 히틀러의 나치당국은 군자금마련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때 나치는 유럽에서 그들의 독특한 선민사상 때문에 지탄받고 있는 유대인들의 재산을 압수하려는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됩니다. 주후 70년에 발생했던 유대인들의 반란과 로마군대의 무자비한 살육이 20세기에 또다시 재현되고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의 지배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문명을 이끌고 있는 것은 헬라의 것입니다. 이유는 로마의 라틴문명보다 헬라의 것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은 결코 게르만족과 같은 문명의 파괴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공화정을 실시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독재와 독점을 싫어했으며 역사적으로 다민족을 포용하여 세력을 강화하여 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의 장점 3가지를 수입했다고 있습니다; 아테네의 공화정치를 수입하여 로마의 공화정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스파르타의 강력한 군인정신과 군제를 도입하여 로마의 군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헬라의 학문과 철학 그리고 예술을 흠모하고 수입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민족국가인 로마제국의 번영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결과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로마제국이 강력하게 패권을 행사하면서 오래도록 문명의 꽃을 피우게 것입니다. 그후 로마제국의 정책을 모방했던 제국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오늘 아메리카합중국의 영광도 옛날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고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유대교의 선민사상은 한마디로, 집단 이기적이고 폐쇄적이며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      다음의 주제는 로마총독에게 예수님의 처벌을 넘기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속셈”(18:30-32)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백성들을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모세오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여호와는 축복과 저주를 인간에게 주고 있는 유일신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을 주십니다. 반면에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축복에 비하여 배나 되는 진노와 재앙으로 반드시 보응하시는 두려우신 하나님입니다(32:34). 유대교지도자들은 만에 하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날 경우에는 후환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손이 아니라 로마총독의 손으로 처형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아직도 나사렛 예수의 표적을 보고서 그를 따르고 있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12:11-13). 그러므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가 예수의 처형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고 하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사상을 가진 자로 몰아서 로마의 군정에서 판결하고 극형에 처해버리는 것이 후환을 사전에 예방할 있는 묘책인 것입니다.

4)      그와 같은 판단에 능한 자가 바로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라고 하겠습니다. 19 동안이나 대제사장의 자리에 머무르게 되는 가야바야 말로 잔머리가 뛰어나고 처신술에 능수능란하다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사렛 예수를 로마총독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는 정당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명분을 다음과 같이 찾아놓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18:31b).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이미 종교재판을 결과 나사렛 예수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의결한 바가 있습니다(18:30, 14:64). 그렇지만 로마총독이 다시 재심하여 로마황제에게 반역하는 자로 선고하고 십자가에 처형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유대교지도자들의 요구입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한 사형선고와 집행의 책임이 잘못하면 로마총독에게 모두 돌아올 판입니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역시 처신술이 뛰어난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순순히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심문을 신중하기가 그지 없습니다(18:33-38).

5)      하나의 주제는 빌라도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8:33-38a)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4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b). 네가 무엇을 하였기에 유대교지도자들이 너를 나에게 넘겼느냐?”(18:35b). 너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나라의 왕이냐?”(18:36-37a). 진리가 무엇이냐?”(18:38a). 위의 4가지 빌라도의 질문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유대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진술을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무척 효과적인 질문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가지고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심문의 방법이 보통 세련되고 노련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총독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노련하고 신중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엉터리 판결을 내릴 수가 있을까요? 점에 관하여 사도 요한이 뒤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18:38b-40).

6)      여기서는 단지 빌라도의 4가지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다윗 왕의 후계자이며 세상에 오는 유대인의 왕으로 주장하면서 신변을 로마총독에게 넘긴 것으로 있습니다. 지금 로마의 황제가 총독을 내세워서 군사통치를 하고 있는 유대 땅에 과거의 패권국 이스라엘제국을 다시 건설하겠다고 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그러한 자이며 자칭 유다의 왕이라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으니 부디 그를 사형시켜달라는 요구입니다. 노련한 정치인 빌라도가 유대교지도자들의 내심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27:18). 유대교 내부에 무엇인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로마총독의 사형집행권한을 빌려서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처결하고자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쯤 짐작하면서도 절차에 의하여 고발내용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b). 우문(愚問, 어리석은 질문) 대하여 현답(賢答, 현명한 답변)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가 보기에 내가 왕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나를 너에게 넘긴 자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저 한번 확인차원에서 묻는 말이냐?”(18:34의역).

7)      차제에 예수님은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긴 유대교지도자들의 행동이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만약 세상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으면 자신이 낭패한 모습으로 자리에 있지 아니했을 것이다. 부하들을 시켜서 한바탕 전투했을 것이며 승리했을 것이다. 자신은 그러한 나라를 건설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다. 증거로서 순순히 체포 당했으며 로마총독의 앞에 피의자로 서있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나라가 세상에 속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을 것이다(18:36의역). 예수님의 그와 같은 설명에 의하여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있던 모세나 다윗대왕과 같은 메시아가 유다 땅에 나타나서 이스라엘제국의 영광을 만방에 다시금 떨치는 꿈은 건너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점을 로마총독 빌라도의 다음 질문이 거듭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나라의 왕이겠구나?”(18:37a의역). 예수님의 답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나는 진리의 왕으로 세상에 왔다”(18:37b의역). 빌라도는 궁금증을 이기고 못하고 마지막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18:38a). 이미 그것은 심문이 아닙니다. 그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대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심문의 결과는 한마디로, 유죄로 인정할 만한 사실이 나사렛 예수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18:38b).

둘째로,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로마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무죄로 방면하기 위하여 비상한 묘수로 보이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자충수를 사용하고자 함. 그것은 로마황제에 무력으로 반기를 든 바라바를 풀어주느냐? 아니면 선지자 예수를 풀어주느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유대교지도자들과 그가 동원한 유대백성들에게 제안한 것임, 27:15-28. 만약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면 유대인들이 무장투쟁 독립노선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므로 결코 어리석게 그러한 선택을 할 리가 없다고 빌라도 총독이 예단한 것임. 그렇지만 실제로 유대교지도자들의 선택은 바라바임.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로마황제에게 무장투쟁으로 반역한 바라바를 로마총독이 석방하면 그가 엄청난 월권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임. 그것까지 예상하지 못한 빌라도 총독이 저자세로 유대교지도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그 대가로 바라바를 석방한 사실을 함구하는 것으로 타협한 것으로 보임. 그러나 그 결과는 훗날 엄청난 재앙으로 나타남. 빌라도 총독은 은퇴한 후에 더이상 출세하지 못하고, 유대교지도자들은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예루살렘성전이 완전히 붕괴되고 해외로 쫓겨나고 마는 것임, 19:41-44),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예수)이 아니라(유대교지도자들과 그들이 동원한 유대인들이 석방해주기를 원하는 자는) 바라바라! 하니바라바는 강도(사실은 무장독립단체의 지도자이며 그의 부하 2명이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못이 박히고 있음, 23:32-33)였더라!(그 노선을 선택하였기에 주후 68년에 유대인들은 로마황제에 반역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2년후 토벌이 되고 모두 해외로 쫓겨나고 마는 것임)“(18:39-40);

(1)   18장의 말미인 38-40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하며 유대교지도자들은 계속 처형을 강요하고 있는가?”(18:38b-40)하는 점을 묵상해봅니다;

1)      빌라도는 알아채고 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나사렛 예수를 처형하고자 하는 이유가 그들의 교리문제 때문임을 확인한 것입니다(18:35-38, 27:18). 그리고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원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대신 로마총독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합니다. 예수를 처형한 책임을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전가하고 자신들은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18:29-31). 이유는 예수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유대인사회에 제법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10-13). 로마총독의 입장에서 빌라도는 되도록 반대자를 만들지 아니하고 손쉽게 효과적으로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부담과 책임을 떠안고 후에 일어날 종교적인 분쟁에까지 끌려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로마의 장군출신이지만 주후 26년에 예루살렘에 부임하여 벌써 6년이나 총독생활을 하고 있는 빌라도입니다. 정도의 정치적인 이치는 이미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를 무죄로 방면하고자 그는 노력하게 됩니다(18:38-39). 그러나 유대교지도자들은 유대교인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빌라도의 의도를 좌절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18:40). 그러자 매를 매우 쳐서 놓아주겠다고 차례나 제안합니다(23:16, 22). 그러나 제안마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23:21, 23).

2)      마침내 빌라도 총독이 하나의 묘수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유월절 명절이면 중죄인 사람을 사면하는 관례가 있는데 전통을 활용해서라도 나사렛 예수를 석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18:39, 27:15-17). 그러나 유대교지도자들은 유대교인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빌라도의 의도를 전부 좌절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18:39-40). 그러므로 빌라도 총독의 획기적인 제안마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빌라도가 보기에 유대인들은 일종의 장군사상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의 아들인 장군이 세상에 출현하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자신들의 제국을 위에 다시 패권국으로 건설할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들의 구세주가 장군을 그들은 다윗대왕의 후계자로 보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할 것입니다(1:41, 49). 뜻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유대인들이 독특한 정치적인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희망 때문에 결코 강력한 외세에도 진심으로 굴복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사실을 로마총독인 빌라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나사렛 예수가 진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라면 유대교지도자들은 그를 자기에게 죽여달라고 보내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고 오히려 장차 유대교의 분열을 몰고 위험인물이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총독의 힘을 빌려서 나사렛 예수를 처형하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의 대동단결보다는 분열이 훨씬 통치하기에 수월합니다. 따라서 구태여 처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3)      그리고 속국의 종교문제, 특히 교권다툼과 교리분쟁에 대해서는 직접 개입을 아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괜히 원주민들의 종교적인 분쟁에 개입하게 되면 후환이 만만치 아니한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이 종파 간의 전쟁입니다. 국가 간의 전쟁은 기본이 이익집단 간의 다툼입니다. 그러므로 이익분배의 문제가 타협되면 휴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종파 간의 전쟁은 이념투쟁입니다. 이념문제는 결코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없습니다. 상대가 강하다고 하여 결코 굴복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어놓고 내세를 바라보면서 끝까지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원주민들의 종교분쟁에는 결코 개입하지 아니하는 것이 기본원칙입니다.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속국에서 분쟁과 분란이 발생하게 되면 그것은 로마황제에게 보고될 것이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헤롯대왕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인들과 분쟁이 있게 되자 그만 유대인들의 청원으로 주후 6년에 로마로 소환되고 말았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총독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로마총독인 빌라도는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그러한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지근거리 시리아에는 예루살렘 총독보다 높은 직급의 로마총독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령이 있으면 언제라도 출동하여 자신을 연행할 있는 감찰관입니다. 그러므로 본디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의 처형문제에 절대로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는 로마제국에 아무런 위협이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가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4)      나사렛 예수는 진리의 나라의 왕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8:37). 세상에서 민족의 해방이나 패권을 도모하는 나라가 아닌데 로마제국의 통치에 무슨 위협이 것입니까? 그렇게 빌라도는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습니다(18:36-38a). 그래서 그는 예수가 무죄라고 판결하고 있습니다(18:38b). 그렇지만 그의 판결을 유대교지도자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8:40, 27:20-24). 도리어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빌라도를 정치적인 곤경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유다의 왕으로 예수를 무죄로 방면하는 자는 로마의 황제에게 역심을 품고 있는 자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19:12의역). 기가 노릇이지만 빌라도는 그들의 상소가 가지고 후환이 염려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 총독의 소임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는 로마제국의 심장부로 진출하여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고자 소원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신양명과 출세에 장애물이 될지도 모를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에 예수의 핏값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27:23-26).

(2)   마지막으로 바라바는 누구이며 그를 선택한 유대인들의 운명은 장차 어떻게 되는가?”(18:40) 대하여 목상해보고자 합니다;

1)      바라바에 대해서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죄수”(27:16), “민란을 꾸미고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15:7), “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23:19), “강도”(18:40) 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사실은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라바는 민란의 주동자입니다. 하나는, 민란과정에서 살인, 강도 등의 범죄행위를 자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바는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유대인들의 해방을 위하여 무장봉기를 했던 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독립투사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예수 대신에 독립투사 바라바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제국을 재건할 메시아를 아니 보내어 주신다면 자신들은 바라바와 함께 자신들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유대인사회에서 분란만 조장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불필요한 악인입니다. 로마총독의 심판으로 처형됨으로써 나사렛 예수의 지지자들도 외세타도에 동참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열심히 정치적인 주판알을 퉁기고 있는 자들이 바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라고 말할 있을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의 복음을 외면하고 선민들의 나라를 칼로써 되찾겠다고 바라바를 중심으로 다시 뭉치고 있는 유대인들의 말로는 비참합니다(18:11, 26:52-54). 유대인들은 로마가 자신들을 헬라인들보다 차별하고 있다고 로마총독부가 자리잡고 있는 가이사랴에서 주후 68년에 민란을 일으킵니다. 그러자 무장투쟁노선이 예루살렘에서 점점 지지를 받기 시작합니다. 로마의 황제를 우상화하는 것은 유대교의 여호와신앙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비록 거룩한 목적으로 무장봉기에 나서지만 현실적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주후 70 무자비한 로마군대의 진압으로 백만 이상이 예루살렘에서 희생을 당하고 그들은 유대 땅에서 쫓겨납니다. 그때부터 주후 1948년까지 1 8백년 이상의 세월을 이방 땅에 유민으로 떠돌게 됩니다. “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26:52b) 예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며 역사를 섭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선택은 언제나 칼이 아니라 십자가임을 역사가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신앙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내용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어느 구절에도 유대교지도자들의 획책과 흉계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경우에는 유대교지도자들이 빌라도 총독을 강압하여 자신을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자로 만들고 십자가처형을 언도하도록 교묘하게 유대인 대중을 동원하여 증거를 조작하고 있음을 벌써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을 이방인 로마총독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19:11).

그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교지도자들과 그들을 무조건 추종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역사 심판하십니다. 36년이 지나자 주후 68년에 유대인들이 로마황제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2년이 지나자 대대적인 로마군대의 침입으로 무려 110만명이 죽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모조리 가나안 땅에서 내쫓기고 마는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성전이 완전히 붕괴되고 맙니다. 겨우 통곡의 벽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유대교지도자들과 자칭 선민에 대한 여호와의 역사심판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들과 같은 죄악을 범하고 있으며 의인사상에 젖어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민족우월사상과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국제적으로는 지역패권을 장악하거나 유지하기 위하여 약소국과 약자의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여호와의 역사섭리의 방향성을 다시 묵상해야 합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후부터 어떠한 역사적인 심판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대속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4:12).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