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장별강해(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제18장 전반부 강해설교

손진길 2026. 4. 12. 11:00

요한복음 제18장 전반부 강해설교

제목; “마지막 기도를 끝내신 예수님이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는 장소에서 불법체포를 당하고 전임대제사장 안나스 저택으로 끌려 가시다”(18:1-27)

작성자; 손진길 목사(26 4 12일 주일 작성)

본문에서 저자인 사도 요한은 스승 예수님이 어떻게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불법체포를 당하셨으며 또한 불법심문을 당하게 되셨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당시 유대교의 최고지도자인 대제사장의 이름이 가야바입니다(18:13b). 그는 로마황제가 인정한 단독 대제사장으로서 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무려 19년간이나 그 최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역대 대제사자장의 평균 재임기간이 4년도 되지 아니하는 시대에 가야바가 단일 대제사장으로서 19년이나 장기 집권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의 처세술이 실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반증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제4복음서에서 살펴보면 본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2)  유대교를 믿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선생이 바리새인 출신의 랍비들입니다. 랍비들의 히브리경전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선민의 구원과 이방인의 멸망이라는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믿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며 선민을 탄압하는 이방인 애굽 족속을 10가지 재앙으로 심판하고(7:20-12:30)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하여 시내 산 아래로 인도하고(19:1-2)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창조주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정국가를 건설한 것입니다(19:4-6, 24:3-8). 그러므로 여호와의 역사섭리는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과 그들을 괴롭히는 이방인에 대한 진노와 역사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주전 10세기초에 다윗대왕이 중근동에서 패권을 자랑하는 이스라엘제국을 건설한 적이 있지만 주전 930년에 남과 북으로 제국이 쪼개어진 후에는 약소국이 되어 줄곧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히 주전 586년에는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마저 멸망했으며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이방 땅에서 살았습니다. 주전 537년경 1할 정도의 유대인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으로 귀환하여 제2성전을 짓고 유대교를 재건했지만 주전 142년부터 80년간 레위인의 하스모니안 왕조가 독자적으로 유대 땅을 다스린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기간에 걸쳐서 페르시아제국, 헬라제국, 로마제국의 속국신세입니다. 특히 로마제국의 시대에 있어서는 유대교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로마황제가 헤롯 왕가와 로마총독부를 통하여 선민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유대교인들은 정치적으로 다윗의 제국을 재건할 수 있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가운데 나타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영광을 다시 사해에 떨쳐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주후 28년 가을에 나사렛 예수가 유대 땅에 나타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갖 병자와 장애자를 치유하고 있습니다(1:26-51, 4:1-44, 3:1-22). 그는 주후 29년 봄 유월절기간에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고 갑자기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고 있는 상인들을 모조리 내쫓고 있습니다(2:13-22). 그러한 돌발행동은 예루살렘성전에 자리잡고 있는 유대교의 최고기관 산헤드린 대공회의 결정사항을 뒤집는 것이며 그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큰 선지자 예수가 유대교의 최고기관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으므로 유대교지도자들의 눈 밖에 나고 있습니다.

(4)  근본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천국복음의 내용이 유대교의 존립기반을 뿌리 채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둘입니다; 하나는,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전부 여호와의 구원의 대상이라는 주장입니다. 예수의 만민구원사상은 선민만의 구원을 믿고 있는 유대교인들의 믿음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8:5-13). 또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현세적인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는 만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들어가서 모두가 영생을 누리는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11:20, 28:25). 그것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소망을 짓밟고 있는 행동입니다.

(5)  그러한 이단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주후 32년초에 예루살렘의 지근거리에 있는 베다니 마을에서 죽은 지 4일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부활하게 하는 사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11:38-44). 현장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그 놀라운 소식을 전파하고 있습니다(11:45-46).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베다니의 나사로 집을 성지 순례하듯이 방문하고 있습니다(12:9-11). 그 소식을 듣게 되자 당시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산헤드린 대공회를 소집하고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최종결정을 내리고자 합니다(11:47). 그는 유대교의 존립을 위하여 나사렛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체포하여 없애 버리고자 하는 계획을 제안하고 대공회에서 의결하게 됩니다(18:14, 11:49-53). 그런데 가야바는 자신의 손을 가급적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참으로 기가 막힌 처세술 두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유대사회에서 레위인 제사장 가문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 안나스 가문입니다. 그 다음이 자신의 가문이지만 장인이 가주로 있는 안나스의 가문에는 그 세력이 미치지 못합니다(18:13a). 그것도 역사적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후 6년에 예루살렘과 유대 땅과 사마리아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분봉 왕 헤롯 아켈라오가 폭정으로 말미암아 로마황제의 명령으로 폐위되고 시리아총독부로 끌려가고 맙니다. 그때 정식으로 로마총독이 부임할 때까지 유대 땅을 다스리도록 시리아총독 구레뇨가 유대인 제사장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삼고 그에게 정치적인 권력을 위임합니다. 참고로, 구레뇨 총독은 두 차례나 시리아 총독을 지낸 인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2:2). 그에 따라 자신의 사위 가야바가 현임 대제사장인 시절에도 전전임 대제사장 안나스가 여전히 유대교의 실세입니다. 그러한 장인 안나스의 권세를 빌려서 가야바는 손쉽게 예수를 체포하고 또한 그를 먼저 심문하도록 장인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18:3, 12-13). 간교한 가야바의 술책이며 그것은 현직이 아닌 전전직 대제사장에게 나사렛 예수의 체포와 심문을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적법한 자격이 없는 자에 의하여 자행된 불법 체포이며 또한 불법적인 심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놓치지 아니하고 그의 복음서에 독점적으로 수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그날 새벽에 전격적으로 산헤드린 대공회를 소집하여 교묘하게 증인을 내세우고 증거를 조작하여 예수를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합니다(18:24, 26:57-66, 14:55-64). 그리고 그 처형을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돌로 처형하는 인민재판에 회부하지 않습니다(7:57-60). 그렇게 하면 로마법에 따라 처형권한이 없는 대제사장이 잘못 시행한 것으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러한 정치적인 부담을 결코 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얼른 예수의 신변을 당시 유월절 기간이라 마침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인계합니다(18:28-31). 그에게 유대교인들을 동원하여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십자가처형이라는 재판 결과를 얻어내고자 합니다(18:38-40, 23:13-25).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제사장 가야바야 말로 그 처세술이 대단히 음흉하고 약삭빠른 자이며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죽여버리는 책략)에 능란한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차제에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1. 예수께서 (14-16장에 수록되어 있는) 말씀을 하시고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기도를 끝내신 후에 수행사도 3인의, 26:37-38)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기타 사도들이 기도하면서 예수님과 수행사도들을 기다리고 있는, 26:36) 동산이 있는데 (예수님이 수행사도인 3인의) 제자들과 함께 (그곳 겟세마네 동산의 집합장소로 습관적으로, 22:39) 들어가시니라! 2.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12명의 수행)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집합장소)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12사도의 한사람이므로) 그곳을 알더라! 3. (배신자 가룟) 유다군대(유대교의 실력자 안나스가 은밀하게 동원하고 있는 로마의 군대를 말함) 대제사장들(13, 현직인 가야바가 단독 대제사장이지만 사적으로 장인이며 전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야합하여 유대교권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므로 유대인들은 아직도 복수의 대제사장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임) (나사렛 예수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하인들과 사병들임)을 데리고 (어두운 감람산을 올라오기 위하여) 등과 횃불 (또한 예수를 무력으로 체포하기 위하여)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그날 밤 불법적으로 체포를 당하고 날이 밝으면 십자가처형에 넘겨지는 일련의 시나리오)다 아시고(3:14, 10:11, 15-18, 12:32-33, 8:31, 9:31, 10:34, 9:22) 나아가 이르시되, (알고 있는 티를 내지 아니하고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체포조가)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사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아니하도록 스스로 자신을 밝히시는 것임, 8)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공관복음에서는 공통적으로 가룟 유다가 체포조에게 예수님을 꼭 집어서 넘겨주기 위하여 죽음의 키스를 시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음, 14:44-45, 26:48-4922:48.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 대목을 생략하고 있음)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를 묘사하면서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을 군사들이 결코 체포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음. 그러나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셔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길이 열리고 새언약의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스스로 그 길을 가신 것임, 11, 26:53-56, 31:33)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나사렛 예수의 놀라운 위력을 경험한 그들은 그저 예수님이 스스로 체포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용히 대답하고 있는 것임),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5)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예수님은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지 아니하는 조건이 사도들을 체포하지 아니하는 것임을 암시한 것임, 9. 그 조건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체포조임. 왜냐하면 그들의 실력으로는 예수님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체험하였기 때문임, 6),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6:39, 17:12)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스승 예수님을 항상 수행하는 3인의 사도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가 칼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 26:37, 눅22:38. 그에 따라 사도 야고보가 주후 44년에 성도들을 지키기 위하여 칼로 대항하다가 참살이 된 것으로 보임, 12:2),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유대교의 실력자 안나스의 하인 말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사도 요한은 그 부친 세배대가 역시 레위인 유력한 가문이기 때문으로 보임. 그에 따라 사도 요한이 안나스 집의 문지기 여종까지 잘 알고 있어서 무사히 그 저택으로 들어가고 베드로까지 들어오게 한 것임, 15-16)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사도 요한은 마태복음의 구절,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다!”, 26:52b 를 생략하고 그 대신에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자신이 대속자가 되어 저주의 십자가에서 마심으로 말미암아, 3:13, 21:23, 27:46,  그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도록 한다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음, 11b, 1:29, 25:29, 32:34, 19:25-27, 53:5-6)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8:1-11);

(1)   본문 1-6절을 살펴봅니다; 처음의 주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밤중에 동산으로 가신 이유가 무엇인가?”(18:1-2)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각각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0-33). 체포를 당하는 때가 바로 그날 한밤중인데, 마지막 저녁식사의 자리에서 드디어 수행제자들이 하나의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것입니다.

2)      물론 제자들 가운데에는 과거에도 그와 같은 믿음을 스승에게 고백했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나다나엘과 베드로입니다(1:49, 16:16). 그러나 당시에는 세상만사를 모두 훤하게 알고 있는 창조주와 같은 자로서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때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뒤를 잇고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하는 메시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일을 보리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1:50b-51).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장차 하늘이 열리고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서 창조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점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분명합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순간적인 신앙고백을 것에 불과합니다(16:16-17).

3)      아직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은 자신의 생애를 바쳐서 반드시 붙들어야만 구원주이며 창조주라는 인식의 단계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저녁에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다가올 일을 모두 아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의 수준까지 미리 알고 있는 것으로 제자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사람의 생각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전능자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16:30). 그러나 그와 같은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제자들은 신앙고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엄청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할 있도록 만들어줄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그들에게 없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재할 수가 없습니다.

4)      아직 그들의 죄가 청산되지 아니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님이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이 되신 것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14:16-20, 23).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대속의 십자가에서 피의 제사를 지내고 나서 예수님이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해야만 그들이 죄사함을 받고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비로서 성령님이 강림하여 그들에게 영원히 내주할 있게 것입니다(4:16-17). 물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성령의 전에 함께 임재하여 영적으로 내주 역사사실 것입니다(4:18-20, 23). 그때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의 믿음을 강화하여 선교의 일꾼으로 만들어 나갈 있을 것입니다(1:8). 그와 같은 미래지사가 지금 예수님의 눈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자신이 이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겨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5)      밤늦은 캄캄한 시간은 일종의 흘러가는 시간 크로노스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앞두고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하는 시간은 유일한 시간이며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때인 카이로스입니다. , 자신의 공생애를 끝내고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장래를 모두 맡겨 드려야만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과 헤어져야만 합니다. 그들이 구원을 이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는 예수님의 신앙만이 구원을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아들이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바로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감람산 동산으로 결정되고 있습니다(18:1). 장소는 그들에게 생소한 곳이 아닙니다. 평소 예루살렘과 베다니의 숙소를 왔다갔다한 예수님 일행이 너무나 알고 있는 장소입니다(18:2). 무척 익숙하고도 평범한 자신들의 집합장소이자 기도의 처소가 이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장소로 선정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6)      다음의 주제는 예수님은 동산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으며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18:2-5)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기도의 장소로 선택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은 여러 사도들과 함께 한밤중에 이동하고 있습니다(18:1). 언제나 그러하듯이 예수님은 다른 사도들을 멀찍이 두고서 자신을 지키고 있는 3명의 수행사도들과 함께 깊숙한 장소로 들어서고 있습니다(14:32-33). 그런데 그날 밤은 평소와는 다릅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체포를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도 헤어질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자신을 해칠 것입니다. 자신은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고 것입니다.

7)      예루살렘성전에서 매년 드려지는 ()속죄일의 번제물의 고통을 예수님은 알고 있습니다.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목이 분리되고 조그만 번제단에 한꺼번에 올려지기 위하여 제물의 몸통마저 토막나는 것입니다(1:5-9). 얼마나 끔찍한 광경인지 모릅니다. 이제 밤이 지나면 자신의 운명이 바로 그와 같은 번제물의 신세가 되고 것입니다. 공포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불가항력의 공포와 고통을 지금이라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 명의 수행사도를 기다리라고 하고서 홀로 동산 깊숙이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독대를 청했습니다(14:34-35);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14:36). 뻔히 다가올 일을 알면서도 한번 어리광을 부리며 하나님 아버지에게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끔찍한 제물의 고통을 감당할 있는 자신이 없습니다. 수만 있다면 다른 대속의 방법을 제시해달라는 간구입니다.

8)      그러나 매일같이 기도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극형인 십자가의 처형이 아니면 무거운 인간의 죄를 도저히 한꺼번에 청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7:27). 인간으로는 감당할 수도 없는 대속의 방법입니다. 유일하게 독생자만이 감당할 있는 것입니다(7:28). 방법이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도 도저히 사함을 없을 정도로 나와 너와 우리와 그들의 죄가 무겁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성찰 그대로 우리 모두가 하나같이 그러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b). 하나님 아버지와의 독대와 기도가 모두 끝나자 드디어 제물을 찾는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18:3).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일을 이미 모두 아시고 있습니다(18:4). 그러나 제자들은 명확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9)      예수님께서 여러 예언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들도 다소 눈치를 채고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준비가 예수님처럼 단단하지가 아니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아직도 다윗의 후계자로 오시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설마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그렇게 맥없이 체포를 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입장은 다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b). 예수님은 체포조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체포조(逮捕組, arrest team)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담하게 자신이 나사렛 예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18:4-5). 요컨대, 예수님은 체포를 당한 것이 아니라 체포를 자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꾀를 따르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승리가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인 죄와 사망의 법이 깨어지는 전주곡이 마련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8:2).

10)    하나의 주제는 배신과 흩어짐의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유일한 신앙의 대상과 믿음의 개념”(18:6, 16:31-33, 3:9-18, 23-24, 4:16-25)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자 내가 그니라! 한마디에 그를 체포하고자 몰려왔던 모든 무리들이 땅에 엎드러지고 있습니다(18:6). 무장하고 있는 군인들이 아무런 이유가 없이 바닥에 한꺼번에 쓰러질 수는 없습니다. 이유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발견할 있습니다; “32. 보라 너희가 각각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16:32).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예수님의 한마디는 피조물인 사람을 한꺼번에 넘어뜨리는 신위적(神威的)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11)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각각 블레셋 다섯 왕국의 최고통치자인 아비멜렉 왕과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맺고 있습니다(21:32, 26:31). 떠돌이 호족에 불과한 그들과 아비멜렉 왕이 대등하게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1:22b),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우리와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26:28).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있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이기고 승리할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을 회복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믿고 있는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3 6개월 동안 동고동락했던 수행제자들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믿고 있을 따름입니다(16:31-33). 그러므로 신앙의 대상은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보여도 정체가 사람인 이상 믿음의 대상 나아가서 신앙의 대상이 없습니다.

12)   사도 바울은 세상에는 의인이 한사람도 없다고 갈파하고 있습니다(3:10, 5:1).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있는 자신이 선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8:19). 오직 절대로 선한 존재는 하나님 아버지밖에 아니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18).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의인이 수가 있으며 선하신 하나님과 평생 동안 동행하는 인생을 수가 있을까요? 비결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역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56.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6:56-57),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되었느니라”(3:23-24). 신앙의 대상이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13)   한편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삶이 변화되자면 하나의 깨달음과 경이로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예수님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깨달음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목숨을 살리고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망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자신의 믿음과 의지로는 아무런 것도 이룰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정직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능력이 창조주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때에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의 경우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갈지라도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기에 세상의 환난을 이기고 평강을 유지할 있을 것입니다(16:32-33).

14)   그렇다면, 하나님이 긍휼의 은혜를 베풀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점을 일찍이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4:18-22). 여기서 믿음의 개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실을 믿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현실은 가변적인 피조물의 세계입니다. 언제나 변하며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절대선이 지배하고 있으며 변함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 있어서 캄캄한 어두움이 극성을 부리게 것입니다.

15)    예언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자꾸만 희박하여 갑니다. 점점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을 더욱 튼튼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선보인 자가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요컨대, 구원과 영생의 은혜도 예언에 대하여 성도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비로서 얻을 있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점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예수 우리 주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4:23-24). 변화무쌍한 세상의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자가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경우에는 영생의 부활의 몸을 입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믿음의 삶을 영위하게 되면 성도들도 장차 부활의 몸을 입게 것입니다.  할렐루야!

(2)   본문 7-11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 나를 찾거든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18:8b)라는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1)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나사렛 예수를 처단하려고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님의 사상이 그들의 유대교리와 완전히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신관은 유일하신 여호와 출애굽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20:3-5, 6:4-5).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은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5:19-27, 10:30). 유대교지도자들은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창조주의 권위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명백하게 유대교리와 어긋나며 이단의 사상입니다. 또한 예수는 히브리사상을 전면 부인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선민의 상징인 할례, 안식일,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는 누구나,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4:21-24, 5:24).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은 안식일에 행해도 무방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2:28, 3:4). 예루살렘성전은 세상사람 누구나 들어와서 기도할 있는 집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있도록 제물장사를 하고 있는 성전을 청결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2:16, 11:7).

2)      요컨대, 선민의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처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지지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9-19). 이유는 예수님의 교훈이라기 보다는 그의 놀라운 능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같은 표적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눈을 피하여 전격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해치워 버려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사렛 예수를 은밀하게 체포하여 순식간에 조용하게 처단할 수가 있을까요? 방책을 마련하기에 고심하고 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낭보가 날아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내부고발자가 되어주겠다는 제안입니다(11:53, 22:1-6). 그래서 대제사장은 군사를 마련하여 밤중에 은밀하게 겟세마네 동산으로 출동을 시키고 있습니다(18:3). 그렇지만 예수님의 체포가 용이하지가 않습니다. “내가 그니라!라고 마디를 했을 뿐인데 말씀의 위력 때문에 군사들이 추풍낙엽같이 모두 쓰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8:6). 체포는 커녕 군사들이 온전하게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인 같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이 뜻밖의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거든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18:8b). 말씀은 자신이 순순히 체포를 당해줄 터이니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는 타협안의 제시인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분이 스스로 체포를 당해주겠다고 선심을 쓰고 있습니다. 군사들의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자들에게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얼른 예수님의 체포에 나서고자 합니다(18:12).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스스로 체포를 당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8:11b). 사도 마태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53. 너는 내가 12군단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3-5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면서 점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9). 말씀은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말씀의 적용이라고 하겠습니다.

4)      다음의 주제는 시몬 베드로의 용기와 비겁함이 주고 있는 교훈”(18:6, 10-11, 17, 25, 27)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와 동년배로 보입니다. 베다니의 나사로와도 서로 연령이 비슷했으며 모두가 개인적으로는 친구 사이였던 같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b),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4-15).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좋아했으며 함께 데리고 다녔습니다. 베드로도 스승 예수님의 일이라면 항상 팔을 걷어붙이고 먼저 나섰습니다(13:9, 37, 20:6, 21:7). 본문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군대와 천부장이 총출동을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한마디에 모두가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18:3, 6). 광경을 바라보고서 베드로는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군사들 앞에서도 용기 백배하여 마치 관우나 장비처럼 혼자서 칼을 뽑아 들고서 대항하고 있습니다(18:10). 그렇지만 예수님의 꾸지람을 듣고 맙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b). 대항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엄명입니다. 자신의 의도와 예수님의 의도가 서로 어긋나고 있습니다. 순간부터 용감한 시몬 베드로의 모습은 사라지고 맙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뜻과 맞으면 사기가 진작되지만 의도에 어긋나게 되면 의기소침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성도들은 속에 예수님께서 계실 때에 힘이 납니다. 아니 계시게 되면 세상을 이길 힘도 없으며 패잔병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고 멀찌감치 스승을 따라가던 베드로가 한낱 계집종의 추궁에도 비겁하게 거짓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확실히 그러합니다(18:16-17).

5)      하나의 주제는 예수님은 적을 무찌르는 대신에 스스로 저주의 잔을 선택하고 있는가?”(18:11)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칼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주변국들과 많은 전쟁을 쳤습니다. 대부분이 정복전쟁입니다. 다윗은 휘하의 37명의 용장들과 함께 자신의 칼로써 대제국을 당대에 건설한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렇지만 솔로몬 왕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전쟁을 치른 왕이 아닙니다. 외국의 수많은 사절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술잔을 기울였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외교술로써 제국을 지켜낸 왕입니다. 전쟁과 외교의 상징이 칼과 잔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과 다윗은 묻은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가 없었지만 아들 솔로몬은 성전을 7 동안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하고 있습니다(왕상5:3, 6:38, 8:66). 한편, 기독교와 회교와의 차이도 잔과 차이와 같다고 말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잔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받아 마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의 계획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회교는 손에는 코란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잡고서 정복전쟁에 나서고 있습니다. “코란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칼을 받을 것인가?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진정한 평화를 위한 잔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6)      그래서 예수님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26:52b).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은 각각 블레셋의 연맹 왕인 아비멜렉과 브엘세바에서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21:31, 26:30-31). 그들은 감히 아비멜렉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평화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군사력으로 보면, 그들은 아비멜렉의 상대가 도저히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평화조약은 아비멜렉의 요청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창조주의 권능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음을 블레셋의 아비멜렉이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21:22, 26:28). 지금 예수님이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고자 합니다. 그것은 칼로 정복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정복이 아니고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반목과 질시를 종식시키고 전쟁을 예방하는 길은 잔을 대신 받아서 마시는 도리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5:10-11, 18). 대속의 잔을 받아서 마셨기에 천국에서는 훗날 잔치자리가 마련되고 축제의 잔이 있을 것입니다. 대신에 대속의 잔을 마시고자 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고 지상명령을 완수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완성이 것입니다. 기쁨의 잔을 들기 위하여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하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12. (예수님이 순순히 체포에 응하자) 이에 (유대교의 실력자 안나스가 뇌물을 주고서 개인적으로 빌린 것으로 보이는 로마) 군대 (로마군대의 장군인) 천부장 유대인(유대교지도자) 아랫사람(수하와 종)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현임 단독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아니라 전전임 대제사장에 불과한)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관계에 우선하고 있는 매우 좋지 못한 사례임) 14.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 유대인들에게 한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전체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강력하게) 권고하던 자러라!(11:49-53)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사람(사도 요한이 저자인 자신을 가급적 드러내지 아니하고자 하여 사용하고 있는 표현임, 13:23, 19:26)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사도 요한의 부친 세배대가 갈릴리 호수에 고기잡이 배를 여러 척 가지고 있는 부자이며 유대교의 실력자 안나스와도 교분이 있는 레위인 유력자임을 말하고 있는 대목임)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평소 집안간 교류가 있는 갈릴리의 유지 세배대의 아들이므로 의심하는 종들이 없는 것임), 16. (안나스의 집과 교분이 전혀 없는)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사도 요한)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여종, 17)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문지기이므로 출입하는 사람의 인상착의를 순식간에 파악하는데 매우 익숙하기에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나사렛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베드로)가 말하되(본능적으로 위험을 피하고자 얼른) 나는 아니라 하고(3번 가운데 첫번째로 스승에 대한 부인임, 13:38), 18. 그때가 추운 고로(유월절이 봄철인 4월초이지만 반 사막성 기후를 가지고 있는 평균 고도 해발 790미터의 고지대 예루살렘에서는 밤이 되면 많이 추운 것임) 종과 아랫사람(안나스의 수하)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9. (저택 안에서 전전임) 대제사장(안나스)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얼마나 많은 제자를 가지고 있는지 그 규모를 묻는 것은 그의 정치적인 세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임) 그의 교훈(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 유대교의 신앙과 상반된다는 사실을 묻고 있는 것임)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공개적으로 천국복음과 나의 사상을)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예루살렘성전이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불타고 바벨론 포로로 살아간 시대부터 유대인들에 의하여 유대교인들이 여호와를 예배하는 회당, Synagogue,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임)(2성전시대의 예루살렘)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이미 유대교의 실력자 안나스가 수하를 통하여 나사렛 예수의 교훈과 세력규모를 죄다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답변임)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안나스의 수하)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폭행하면서)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그는 상전인 안나스기 매우 높은 신분이고 나사렛 예수는 그 신분이 훨씬 낮다고 예단하고 있음. 그리고 그들은 안나스의 위세가 아직도 대제사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진리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유대교의 실력자 안나스의 위세를 믿고서 거들먹거리고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니 그것은 불법 부당한 행위라는 지적임) 24. (예수가 불법한 심문이 이루어지고 또한 부당한 폭행이 자행됨을 지적하고 있으므로 마음이 찔린)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이것이 두번째의 부인임),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말고의 친척이며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까지 함께 간 자로 보임)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증인이 나타난 것임)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그 경우에는 그 자를 모른다고 여호와 앞에서 맹세하고 그 자를 저주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할 수 있음, 26:74. 그것이 세번째이며 베드로의 강력한 부인임), 곧 닭이 울더라!(13:38,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짐. 그때 사도 베드로는 저택 안에서 뜰에 있는 자신을 내다보고 계시는 스승 예수님의 그 동정의 눈빛을 보게 됨, 22:61. 그는 견딜 수가 없어서 현장을 벗어나자 골목에서 소리 내어 울고 회개함, 22:63, 26:75, 14:72. 그에 따라 자신의 회개내용을 초대교회에서 간증하였기에 모든 복음서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임)“(18:12-27);

(1)   본문 12-18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18:3, 12)이라고 열거하고 있는 이유를 알아보고 다음에는, “전직과 현직 대제사장의 이름을 저자가 혼동하고 있는 이유(18:13-14, 19)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사두개인들이며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오경만을 믿고 있으며 예루살렘성전의 관리와 제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2성전을 재건했을 때부터 외세와 타협하여 외교적으로 유대교의 자치권을 보전해왔던 세속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상한 전통은 역사적으로, 에스라와 느헤미아 시대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암몬의 지도자 도비야와 결탁하여 성전의 안위를 보전하고 있는 데서부터 비롯되고 있다고 유래를 찾아볼 있습니다(13:4-7). 예수님 당시에도 전통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가 로마총독과 가깝게 지내면서 로비하여 자신의 사위 가야바를 현직 대제사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18:13b). 그런데 가야바가 영악합니다. 그는 감히 로마황제에게 복수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단수 대제사장이 훨씬 효율적이므로 그렇게 조치하여 달라고  청원합니다. 그리고 로마총독에게 교섭하여 자신이 홀로 대제사장이 것입니다.

2)      뿐만이 아니라 장인 안나스의 권세를 아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외부에서 보면 전전임 대제사장 안나스가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보이고 현직보다 강력한 유대교지도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나 의사 누가와 같이 똑똑한 복음서의 저자들도 때로는 이미 직을 물러난 오래된 안나스가 마치 현직 대제사장인 것처럼, 또는 대제사장이 복수인 것처럼 혼동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제자는 (안나스, 13)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가고”(18:15b), 19. (안나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18:19), “6. 대제사장들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박으소서”(19:6a), “3.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3:2), “54. 예수를 잡아 끌고 (안나스)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 가니라”(22:54),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23:4a) 등이 그러한 대목들입니다.

3)      참고로, 안나스 대제사장의 재임기간은 주후 6-14년인데 그는 시리아의 로마총독 구레뇨의 임명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물러난 4 후에 자신의 사위 가야바를 추천하여 유다를 다스리는 로마총독 그라투스로부터 임명을 받게 합니다. 그런데 가야바는 장인보다 더욱 두뇌회전이 빠르고 외교술과 처세술이 동시에 뛰어납니다. 그래서 보통 4년에 그치는 임기를 번이나 연임합니다. 더구나 그는 로마에 교섭하여 복수 대제사장이 아니라 단일 대제사장으로 변경합니다. 결과 가야바는 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무려 19년간이나 힘있는 대제사장으로 현직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 처형 당시의 대제사장인데 그때에도 그는 뛰어난 처세술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벌할 수밖에 없는 명분만을 제시하고 자신은 우직한 장인의 뒤에 숨어버립니다(11:50, 18:12-14). 또한 빌라도의 힘을 빌려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압력을 가할 때에도 가야바는 어김없이 장인 안나스를 앞에 내세우고 있습니다(19:6).

4)      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의 반역자에 대한 최종처벌권, 사형판결권이 없다는 법적인 요건을 빌미로 예수를 로마총독에게 넘겨버립니다(18:30-31). 그리고 여론몰이를 하여 로마총독에게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합니다. 결과 어처구니 없게도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처형의 책임은 전적으로 로마에서 파견나와 있는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어가버리고 맙니다. 오늘날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고 있는 성도들도 점을 깜박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이 점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크다 하시니라”(19:11b).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로 역사 가운데 36 후에 임하고 있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이 함락되고 성전은 불탔으며 유대인들은 가나안 바깥으로 쫓겨나버리게 됩니다. 무려 110만명이 희생되고 10만명 정도 쓸만한 인재들은 모두 인질로 북송되고 맙니다.  

5)      한편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는 예수를 체포하는데 있어서 개인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로마군대의 천부장과 군사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18:3, 12).   결과 예수를 결박한 그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관저가 아니라 전전직인 안나스의 개인 저택으로 예수님을 먼저 끌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8:12-13a). 참고로, 예루살렘은 당시 로마의 총독이 군정을 실시하고 있던 도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정(軍政, 군사통치)이라고 하는 것은 점령군이 군사력과 경찰력을 독점하고 있는 체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는 로마총독이 군정의 책임자로 되어 있으며 모든 군대는 로마총독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말은 현지의 유대인들에게는 군대나 군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무리들 가운데에는 군대와 천부장”(18:3, 12)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로마인의 군대와 지휘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누가 동원했을까요? 점을 은연중에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사람(나사렛 예수)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11:49-53)러라”(18:12-13).

6)      청탁을 받은 자는 먼저 계약금을 받고서 맡은 일을 시작합니다. 일이 성사되면 결과물을 사람에게 인도하고 잔금을 받는 법입니다. 그러한 이치를 생각해보면 금방 짐작할 있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그대로 안나스가 천부장에게 개인적으로 청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로마총독인 본디오 빌라도가 나중에 가서 예수님의 체포소식을 보고받고 있습니다(18:28-38). 더구나 심문과정에서 빌라도는 무척 예수님에게 호의적입니다(18:38:-40). 참고로, 여기서 유대의 아랫사람들’(12)이라고 분류되고 있는 사람들은 산헤드린 대공회 소속의 하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가야바가 주장했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49. 중의 한사람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50. 한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11:49-50).

7)      다음에는 종의 이름 말고’, 그리고 유대교 실세 안나스까지 알고 있는 사도 요한”(18:10, 15) 대하여 살펴봅니다; 사도 요한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언급이 아닙니다. 간접적으로 요한이 그의 집안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스스로 안나스 전전임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18:15). 약관의 요한이 어떻게 나이가 많은 유대교 최고의 실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이일까요? 이유는 요한의 집안의 배경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최초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혈통입니다(1:5, 36, 40-41, 56). 따라서 마리아의 여동생이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도 대제사장 가문의 후예입니다. 안나스 역시 아론의 후예였기에 감히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를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한의 집안은 안나스의 집안과 가까운 친척이 되고 있다고 있습니다. 집안 사이에는 자주 왕래가 있었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안나스 집의 지키는 여종까지 알고 있습니다(18:16). 뿐만이 아닙니다. 궂은 일을 하고 있는 하속 말고 이름까지 알고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18:10).

8)      참고로 조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할 때에 아래까지 접근하고 있는 갈릴리 여자들의 이름 가운데 예수님의 이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5). 사도 요한은 자신의 어머니 살로메가(15:40, 16:1) 예수님의 이모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는 대목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요한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0.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0-21). 사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조카인 예수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종동생들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동안 남편 세베대와 함께 그녀가 예수님의 공생애 비용을 엄청나게 지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8: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노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19:25-27). 말씀은 사실 이모에게 것으로 보입니다. 노후 생계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장수하게 되는 모친을 훗날 이종동생 요한이 끝까지 봉양해달라는 것입니다. 부탁을 사도 요한이 엄수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망하고 나자 요한은 이모 마리아를 모시고 소아시아 에베소로 이주하여 끝까지 봉양했다고 합니다. 무덤이 에베소에 남아 있다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가문과 가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점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로마서 마지막 16장에서 그와 같은 기록을 많이 찾아볼 있다고 하겠습니다.

9)      다음에는 문을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의 인상착의를 알아보고 있는 이유”(18:17-18) 대하여 묵상해봅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26:52b)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에게 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안나스 집의 하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18:10-11). 그때 말고의 동료들이 베드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말고의 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주었습니다(22:51). 가지 광경은 종들의 뇌리에 깊이 인식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나스의 집으로 끌고 왔습니다. 추운 봄날이므로 군사들과 하인들은 불을 쬐고 있습니다. 그들 하인들의 화제의 중심은 베드로의 칼과 예수님의 치유능력이라고 있습니다. 결과 지키는 여종까지 베드로의 용모파기를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안나스의 저택은 유대교의 최고 실세의 집입니다. 집의 수위가 되고 있는 여종입니다. 그녀는 직업상 굉장히 눈썰미가 좋아야 합니다. 한번 보면 사람의 생업이나 용모의 특징을 금방 파악하고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할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야기만 듣고서도 사람의 용모를 파악할 있는 능력을 직업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덕분에 비록 밤늦은 시간이지만 사도 요한의 신원보증으로 대문 안으로 얼핏 들어서는 베드로의 용모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집안 뜰에 피워 놓은 모닥불의 빛줄기에 비추어지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은 이야기로만 들었던 나사렛 예수의 호위무사의 인상과 맞아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종이 슬쩍 찔러보고 있습니다; “너도 사람의 제자 하나가 아니냐?”(18:17b). 시몬 베드로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 의하여 거의 반사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18:17c). 그리고 나서 자신을 숨기기 위하여 불을 쪼이고 있는 여러 사람들 사이로 파고 들어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8:18).

(2)   본문 19-24절을 살펴봅니다; 먼저 안나스가 예수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질문을 이유”(18:19-21) 대하여 알아봅니다;

1)      안나스는 전전임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유대교의 최고 실세입니다. 그의 사위인 가야바가 현직 대제사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안나스가 교권을 휘두르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는 로마의 천부장에게 청탁하여 로마의 군대를 동원할 있을 정도의 실력자입니다(18:3, 12-13). 지금 그는 자신의 사저로 예수를 체포하여 끌고 와서 당당하게 심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의 질문은 가지로 집약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너의 제자들이 어떠한 자들이며 너는 제자들과 함께 무엇을 도모하였느냐? 하나는, 너는 어떠한 거짓말과 속임수로 백성들을 유혹하였느냐? 입니다(18:19). 가지 질문은 한가지의 결과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유일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로서 유대인의 , 나아가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이단사상으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황제에게 반역하고자 중죄인이므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꼼짝 없이 예수를 옭아매고자 하는 것이 안나스의 책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거짓 자백과 강압에 의한 진술을 얻어내고자 하는 안나스의 시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이유는 끝까지 진리와 진실에 입각하여 당당하게 답변하고 있는 예수님의 정당한 주장 앞에 이상 따질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18:20-23). 그래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안나스는 현직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의 신변을 넘기고 맙니다(18:24).

2)      그렇다면 안나스는 예수님으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자백을 얻어낼 있다고 자신하였을까요? 이유는 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내부에서 고발하고 있는 제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발자는 보통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는 재정담당 제자인 가룟 유다입니다. 그렇게 내부모순으로 무너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이니까 없이 자신의 협박에 굴복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끝까지 진리를 고수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당당함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제대로 협조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조리 잡아와서 족칠 있다고 하는 자신감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체포 당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악한 세상에서 끝까지 강력하게 보호해달라고 장시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 드린 바가 있습니다(17:14-17).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심을 믿고 있는 예수님 앞에 그와 같은 협박은 유치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동요가 없습니다.

3)      그에 따라 안나스는 예수님의 사상에 대하여 이단성을 시인하라고 이제는 강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정론으로 강경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18:20-21). 너무나도 정당하고 당당한 답변 앞에서 안나스는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참담하게 변했을 것입니다.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부하가 안나스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습니다. 급히 손으로 예수를 치면서 자신의 상관에게 무례하다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18:22b). 예수님이 하속의 부당함을 오히려 책망하고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18:23). 말까지 들은 안나스는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를 그의 사위인 가야바와 산헤드린 대공회에 압송하고 있는 것입니다(18:24).

4)      다음으로, “안나스의 예수님 체포와 심문이 모두 불법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들”(18:12-13, 22-24) 대하여 살펴봅니다; 안나스는 전전직 대제사장이므로 이미 현직에서 떠난 자입니다. 누구든지 현직을 떠나게 되면 재임 가지고 있던 권력을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안나스에게는 종교적인 심판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는 이상 산헤드린 대공회의 대표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직을 떠난 자가 권력을 계속 행사하고 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불법입니다. 그런데 안나스는 함부로 자신의 종들과 산헤드린 대공회의 하인들, 그리고 청탁하여 로마의 군대까지 동원하여 나사렛 예수를 불법으로 체포하고 있습니다(18:12-13). 더구나 한밤중에 자신의 사저로 데리고 와서는 불법으로 심문까지 자행하고 있습니다(18:19-21). 안나스는 유대교의 실세인지는 몰라도 그가 행하고 있는 일은 모두가 불법천지입니다. 그저 힘과 세력만 있으면 법과 제도에 상관없이 모든 일을 행할 있다는 한심한 생각으로 인생을 살고 있는 자입니다. 그와 같은 자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우이독경’(牛耳讀經, 소의 귀에 경읽기) 불과합니다. 요컨대, 처음부터 정당하지 아니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고 있는 자가 전전임 대제사장인 안나스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예수님이 끌려와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3)   본문 18 전반부의 말미인 25-27절을 살펴봅니다; 주제는 예수님을 부인한 시몬 베드로, 상황과 답변의 차이”(18:17, 25-27)입니다;

1)      구체적으로, ①첫번째 부인(否認, 인정하지 아니하는 ) 성격은 문지기 여종 사람의 의심에 대하여 베드로가 행한 거짓 해명입니다(18:17). 두번째 부인은 함께 모닥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집단적으로 의심하자 그것을 여러 앞에서 강하게 부인한 것입니다(18:25). 세번째 부인은 말고의 친척 사람이 베드로를 정확하게 알아보고서 확인하려고 하자 사실을 공식적으로 부인한 것입니다(18:26-27). 그러므로 3가지의 경우는 의심의 강도와 해명의 정도가 다음과 같이 각각 다릅니다; 문지기 여종은 예수님이 스스로 체포당하고 있던 겟세마네 동산에 없었던 여자입니다. 그저 문지기의 소임을 다하느라고 그날 밤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출동하고 있는 안나스 집의 하인들이 대문을 나서는 것을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무사히 체포하여 안나스의 집에 돌아온 자들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메시아라고 전해지고 있는 예수님에게 그들은 접근조차 못했다는 것입니다. 정체를 확인하려고 하자 내가 그니라!라고 외치는 한마디에 모두 너무나 놀라서 고꾸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18:6).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스로 자신을 체포해가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18:11b). 뿐만이 아닙니다. 칼을 뽑아 들고서 저항을 시도하고 있는 자신의 사람을 말렸다는 것입니다(18:11a). 한번 칼질에 그만 말고의 귀가 베어져 나갔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신기하게도 그냥 만져서 낫게 했다는 것입니다(22:50-51). 실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2)      문지기 여종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호위무사인 제자의 인상착의까지 소상하게 듣게 되자 일련의 사건이 사실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그녀 앞에 시몬 베드로가 나타난 것입니다(18:16).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이야기 속의 호위무사와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확인하고자 것입니다; “너도 사람의 제자 하나가 아니냐?”(18:17b). 시몬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인하고서 많은 사람들이 불을 쬐고 있는 모닥불 사이로 몸을 숨기고 맙니다(18:18). 그런데 베드로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거짓말은 계속 거짓말을 생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사람 앞에서 행한 거짓말은 여러 사람 앞에서 행하는 거짓말로 확대됩니다. 모닥불 가의 여러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베드로를 그때의 호위무사 예수님의 제자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의) 제자 하나가 아니냐?”(18:25b). 이미 한번 부인했는데 못하겠습니까? 이제는 태연하게 베드로의 입에서 자동적으로 버릇처럼 변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18:25c).

3)      번째가 끝입니다. 마침내 꼼짝 없는 진실의 규명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이 종착역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 함께 출동했던 말고의 친구 한사람이 정확하게 베드로의 용모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네가 사람(예수님)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18:26b). 베드로는 혐의를 벗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여야 합니다. 죽을 힘을 다하여 거짓말의 강도를 최대로 높입니다. 그것은 배교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한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나고자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베드로입니다”(26:74). 그것이 베드로이며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유는 속죄양에게 자신들의 모든 죄를 안수하고 저주하여 광야 죽음의 길로 떠나 보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유대인들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16:21-22). 오늘 날에도 매번 그렇게 속죄양을 마련하여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대신 뒤집어 씌우고서 마치 자신들은 의인이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자들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몬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들의 추악한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원형’(prototype)이라고 하겠습니다.

4)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은 울음소리와 예언과 베드로를 돌아보고 있는 예수님의 시선”(18:27, 22:60-62)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스승인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모습을 슬픈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22:61). 바로 순간에 닭이 울고 있습니다(22:60).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13:38b) 예수님의 예언이 현실이 되어 자신에게 닥친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입버릇처럼,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b)라고 소리를 쳤던 베드로가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고 있습니다(22:62); “저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스승을 3번이나 부인한 중죄인입니다(13:38, 18:27). 이제는 나자신을 믿을 수가 없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죄를 어찌하면 좋습니까?한편, 같은 장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대속의 십자가를 자신이 빨리 지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이 예수님의 눈길 속에 담겨 있다고 있습니다. 당시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슬픔과 함께 연민의 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예수님의 동정의 눈길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상 집에, 스승님이 계시는 자리에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용서할 없는 죄책감과 열패의식(劣敗意識, 열등감과 패배의식) 젖어서 스승님을 영원히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남은 세월을 그냥 살아가리라! 희망도 없이, 꿈도 없이, 스승 예수님이 주시던 천국에의 소망도 없이 그저 살다가 그렇게 흙으로 돌아가리라!”.

결론적으로, 자기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스승을 3번이나 부인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을 도리가 전혀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없이 다시 어부가 되고 것으로 보입니다(21:1-7).

비록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스승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차례나 직접 만나보기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마음의 평안과 용서함을 완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입니다(20:1-10, 19-29). 그렇다면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는 예수님의 지혜와 처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로 남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21:15-18). 예수님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 그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다시 배신하지 아니하고 목숨을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21:18-19). 소원을 이룰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것입니다(20:22-23).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시고 그의 심령속에서 내주 역사하시면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영생을 얻는 경지의 성숙한 신앙소유자가 것입니다(14:16-20, 1:8, 2:14-42). 그러한 처방은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것이기에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말미에 특별히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주님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가짐으로 거듭난 영적인 성도의 삶을 끝까지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