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포학과 기만과 전쟁이 반복되는 이 세상이 끝나고 메시아가 오셔서 만민을 살리는 영원한 공의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임을 이사야가 예언하다”(사33:1-24)
설교일; 주후 2026년 10월 1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5년 8월 4일 월요일 작성)

24절로 구성되어 있는 본문 이사야 제33장은 3문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문단의 주제와 글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문단은 제1-6절인데, 소제목이 ‘은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글의 구성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1절에서는 원주민을 탄압하고 있는 지배 족속의 논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지배 족속들은 마치 인류최초의 정복 왕 니므롯을 도와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함족처럼(창10:8-12, 11:1-5)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주민 셈족을 강력하게 지배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리어 우리를 쳐부수고 종으로 부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탄압하고 내부공작을 통하여 서로 분열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통치술이다”(사33:1절 의역).
2) 제2절에서는 여호와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원주민 셈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해방과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사33:2, 창9:26, 11:5, 출2:23). 제3절에서는 그들의 간구가 여호와께 상달되자 바벨탑이 붕괴되고 지배자 함족들의 제국이 붕괴되는 역사섭리가 임하고 있습니다(창11:6-9a). 그때 해방을 얻은 셈족들이 함족의 지배를 벗어나서 동서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창11:9b). 그들이 인류 역사 최초의 ‘디아스포라’입니다(창10:25-32, 11:31-32, 12:1-5).
3) 제4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과 가나안 일대 여러 왕국의 역사를 살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 역사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끊임없이 침입하고 약탈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피곤한 역사가 종말을 고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이사야가 제5-6절에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들이 각각 주장하고 있는 정의의 전쟁이 끝나고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곧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볼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이룩한 모든 것과 후계자까지 창조주 여호와의 손에 맡겨드릴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 경외의 신앙이 없으면 약육강식의 두려운 세상이 영원히 계속되고 말 것입니다”(사33:5-6절 의역).
(2) 둘째 문단은 제7-16절입니다. 그 소제목이 ‘높은 곳에 거할 자’입니다. 글의 구성을 간략하게 역사적인 사실과 더불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전체적으로, 선지자 이사야가 자신의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의 강대국 앗수르가 그 지역의 패자가 된 다음에 서진(西進, 서쪽으로 진출)하여 가나안 일대의 왕국들을 집어 삼키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은 그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여호와의 은혜로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되자 그 뒤를 잇고 있는 요담 왕의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에게 전파한 것으로 보입니다(사1:1, 6:1-10).
2)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요담의 뒤를 이은 다윗왕조 아하스 왕의 시대에 앗수르제국의 황제 불(Pul) 곧 디글랏 빌레셀3세가 유대왕국의 요청을 받아 들여서(사16:7-9) 서토정벌(西土征伐)에 나서게 됩니다. 강력한 앗수르군대의 말발굽에 먼저 지중해의 동해안에 있는 부유한 페니키아의 성읍들이 짓밟히고, 내륙에서는 바산 북쪽 다메섹에 수도를 두고 있는 아람왕국이 정복당하고 맙니다(사33:9a&c). 불의 뒤를 이은 앗수르의 황제 살만에셀5세가 남하정책을 계속합니다.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지대 갈멜 산지가 점령을 당하고 그 남쪽의 비옥한 평야 샤론이 초토화되고 있습니다(사33:9b&d).
3) 크게 놀란 북조 이스라엘의 호세아 왕이 급히 살만에셀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화친을 요청합니다(왕하17:3). 그러나 몇 년 후 호세아 왕은 마음이 변하여 애굽제국의 바로 소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합니다(왕하17:4a). 그것이 패착입니다(사33:7-8). 살만에셀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남진하여 이스라엘왕국을 휩쓸고 호세아 왕을 사로잡고 말기 때문입니다(왕하17:4b). 그러나 이스라엘왕국의 장군과 대신들이 수도 사마리아성에서 앗수르 군대의 포위공격을 3년간이나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습니다(왕하17:5).
4) 그렇지만 중과부적입니다.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왕국이 마침내 앗수르제국의 사르곤2세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에 따라 앗수르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 다윗왕조 유대왕국과 그 주변의 왕국들은 큰 시름에 잠기게 됩니다. 사르곤2세는 먼저 유대왕국의 주변국에 대한 정벌에 나섭니다. 그 다음 그의 후계자인 산헤립 황제가 드디어 유대왕국을 침략합니다. 유대 왕 히스기야는 처음에는 조공을 바치고 화친을 청했지만 그것의 효력이 극히 짧습니다. 산헤립의 군대가 재침하자 전국이 초토화가 됩니다;

5) 유대왕 히스기야는 험준한 요새인 왕도 예루살렘을 방어하면서 오직 종주국 애굽의 원병이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대국 애굽제국의 구원병만 바라고 있었기에 그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공동 바로인 구스왕 디르하가의 원병이 앗수르 군대의 매복에 걸려서 패퇴하고 맙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어지자 비로서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서 겸손하게 여호와 앞에 구원을 호소합니다.
6) 그 기도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긍정적으로 응답하여 천사를 보내어 적군 18만 5천명을 하룻밤에 도륙하십니다(왕하19:34-35, 사37:35-36). 그 옛날 주전 1,446년 출애굽 당시 유월절 밤에 행하신 여호와의 역사심판이 주전 701년에 다시 재현되고 있습니다(출12:12, 29-30). 그에 대한 자신의 예언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고서 선지자 이사야가 창조주 여호와의 영광과 권능을 본문에서 매우 시적으로 그리고 감격스럽게 찬양하고 있습니다(사33:10-16);

(3) 셋째 문단은 제17-24절인데 그 소제목이 ‘시온성을 보라’입니다. 글의 구성을 살펴봅니다;
1)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의 생전에 여호와께서 히스기야 왕의 기도에 응답하여 예루살렘성을 포위공격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를 천사를 보내어 도륙하여 주시겠지만 훗날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러한 이적이 다시 발생하지 아니할 것임을 벌써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신위적인 역사섭리로 구원을 받은 후에 유대 왕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이 여호와신앙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자랑과 현세적인 이기주의에 푹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사39:2-8).
2) 선민인 동족 유대인들의 잘못된 삶의 태도에 절망한 선지자 이사야는 훗날 그 땅에 임하는 역사적인 종말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메시아와 보혜사 성령님이 시온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와 그 수도인 새 예루살렘성의 강림을 소망하고 있습니다(사33:17, 20-21a, 22-24). 특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에(사65:17-18) 이 땅의 바다가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본문 제21절 후반부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죄사함 받은 백성들이 영생을 누리며(사33:24) 주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양식과 재물로 살아가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사33:23, 눅22:28-30). 끝으로 이사야는 사라지는 세상에서 오랜 세월 성행하던 사람들의 행태를 제18-19절에서 두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열강들이 세금을 거두고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국력을 집중한 시대입니다(사33:18절). 또 하나는, 말이 다른 약한 민족을 종으로 부리기 위하여 온갖 강포한 일을 행하던 제국주의자들의 행태가 두드러지고 있습니다(사33:19절).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하여 구절풀이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패권국이나 제국의 세상지배의 논리가 그러하며 그들은 포악과 기만으로 영원히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함).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만약 강력한 통치에 실패하게 되면 거꾸로 피지배자인 속국의 지배에 들어가고 만다는 것임). 2.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강력한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는 선민들이 출애굽 당시나 사사기 시대처럼 여호와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임) 3.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여호와께서 역사에 개입하심으로 말미암아 앗수르제국의 침략이 허사가 되고 그의 속국들이 놀라게 되었다는 것임, 사37:35-36. 오로지 그 시대에 다윗왕조 유대왕국만이 독립을 누리게 된 것임). 4. 황충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그러나 앗수르의 위협이 사라지자 선민들이 다시 세상적인 약육강식의 논리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만다는 것임) 5.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국가 내에서의) 정의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시온(새 예루살렘)에 충만하게 하심이라!(사11:4-9) 6.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선민과 백성들이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에서 이룩한 모든 것을 바쳐 여호와의 뜻을 따르고 유일한 창조주로 섬기고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물론 천국의 지혜와 영생을 얻게 될 것임, 창21:33, 22:12, 요3:13-17, 17:3) “(사33:1-6); 본문 제1-6절에서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계속 살게 되면 어찌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게 되면 어떠한 미래가 도래하게 되는가?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절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제1절입니다; “1. (a)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b)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c) 화 있을진저. (d)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e)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사33:1); 이사야는 동족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33:1c).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1) 가진 자가 가진 것이 없는 자를 학대하는 사회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는 그 신분에 의하여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자를 지배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사33:1a). 만약 그와 같은 사회구조가 잘못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끔찍한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학대를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사33:1d).
2) 재판제도가 잘못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한마디로, 무서운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 돈이 있으면 무죄가 되고 돈이 없으면 유죄가 됨)의 사회입니다. 돈이 있으면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무죄판결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러한 사법적인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 십중팔구(十中八九, 열에 여덟이나 아홉, 곧 대부분을 말함) 유죄가 되고 맙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사33:1b)들의 횡포가 상식화되어 있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렇게 사회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만약에 정당하게 판결을 받겠다고 재판정에 서게 되면 그 판결이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요? 이사야는 당연히 유죄판결이 나고 말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사33:1e). 그러므로 그와 같은 유대사회에 살고 있는 한 재산이 없고 권력이 없으면 학대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누구든지 신분상승과 성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경쟁에서 뒤떨어지게 되면 당연히 사회적인 그리고 제도적인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그와 같은 사회가 한없이 계속될까요? 이사야는 그렇지가 않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역사 가운데 강력하게 개입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호와의 역사심판과 인류역사의 종말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여호와 하나님이 새로이 창조하시는 새 예루살렘성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사33:1c, 65:17-18);

(2) 둘째, 제2절입니다; “2. (a) 여호와여, (b)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c)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d)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e)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33:2); 이사야는 ‘여호와’를 부르는 경우와 ‘주’를 부르는 경우를 구별하면서 용의주도하게 예언을 베풀고 있습니다. ‘여호와’ (사33:2a)는 2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주이십니다. 또 하나는, 지금도 인류의 역사와 자연의 질서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부디 선민들에게 새로운 이스라엘 사회를 만들어주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사33:2b). 그에 비해서 ‘주’(主, Lord)의 뜻은 약간 다릅니다. 보통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약칭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라는 호칭은 그 자체 사람들의 각자의 인생살이에 있어서 ‘주인’이라는 뜻을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아서 이사야가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이와 같은 사회에서 성도 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의 인생에 주께서 이제는 개입하여 주십시오(사33:2c). 매일 우리를 품에 안아 보호하여 주십시오(사33:2d). 그리고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온갖 학대와 거짓으로부터 저희들의 인생을 구원하여 주십시오(사33:2e)”(사33:2 의역).
(3) 셋째, 제3절입니다; “3. (a)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b)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사33:3); 주께서 간구하는 사람들의 인생에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일어나시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게 될까요? 이사야는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와 민족들을 먼저 징벌하십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 징계를 행하십니다. 본문 이 구절에서는 이사야가 나라와 민족들에게 어떠한 징벌을 하시는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멀리서 하나님이 임하셔서 심판을 베푸신다고 요란한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잘못을 크게 범한 민족들은 그 소문만 듣고도 벌벌 떨고 있습니다. 마치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신위적인 능력이 함께하고 있으므로 그 옛날 원주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때와 같습니다(수2:9-11). 그래서 대항하기 보다는 도망을 치려고 합니다(사33:3a).
2) 그 가운데 악한 세력에 사로잡힌 여러 나라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자 합니다(계16:14, 16, 19:19, 20:8-9).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한 패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께서 심판의 칼을 뽑으시고 있는데 피조물의 나라가 대항한다고 하는 것이 본래부터 게임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모두들 쪼개어지며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사33:3b, 계19:19-21).
(4) 넷째, 제4절입니다; “4. (a) 황충의 떼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b)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사33:4); 주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면 개인들은 어떠한 징계를 받게 될까요? 이사야가 상징적인 수법으로 그 징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1)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강자가 되어 살면서 치부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한마디로, ‘노략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쪼개어 수많은 사람들이 차지하도록 만들어 버리실 것입니다(사33:4a). 그 불의의 재물을 서로 차지하고자 황충의 떼와 같이 달려드는 무리는 두 가지의 종류입니다; 하나는, 전쟁으로 나라가 망하게 될 때에는 적군들이 약탈을 일삼게 될 것입니다(욜1:4, 2:25). 또 하나는, 내부모순과 분열에 의하여 국가나 사회가 망할 때에는 지배를 받고 있던 원주민일 수가 있습니다.
2) 흔히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다”고 오늘날 평등사회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신분사회에 있어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 위에도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엄격한 계급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면 악하게 기득권을 누리던 자들이 된서리를 맞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하극상이 발생합니다. 마치 공산주의혁명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의 누리고 있던 신분상의 기득권이 사라지고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는 마치 메뚜기 떼가 그 위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사33:4b).
(5) 다섯째, 제5절입니다; “5. (a)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b)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사33:5);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보좌를 펴시고 지극히 높이 계십니다(사33:5a). 그렇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메시아가 이 땅에서 성취할 것입니다. 그 복음사역의 처음 터전이 시온입니다. 그곳에서 두 가지를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가 ‘정의’입니다. 또 하나가 ‘공의’입니다(사33:5b). 그 의미를 다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정의’(justice)가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은 선민사회 내에서 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시행해보라는 의미입니다. ‘정의사회의 구현’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재판의 공정성을 회복하고 사회적인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입니다(신14:29). 그리고 사회악을 일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율법의 뜻에 비추어 시행해보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공의’(righteousness)에 대하여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공의는 정의보다 넓은 개념입니다.
2) ‘정의’가 자기 중심적인 의로움 또는 자기민족이 옳다고 하는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면 ‘공의’는 모든 피조물은 전부 동일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이 이방인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의 복을 독점해서도 안됩니다. 공존공영(共存共榮, coexistence and co-prosper)과 상생(相生, mutual living)의 복을 하나님께 구하면서 모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창조주로부터 비롯되는 ‘공의의 정신’입니다.
3) 메시아가 만민구원과 영생복음이라는 천국복음으로 부르짖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 곧 ‘공의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대속의 십자가에 못이 박히지만 무덤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창조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사야는 ‘선민집단의 이기적인 정의’를 넘어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이타적인 공의’가 메시아에 의하여 이 세상에 오게 되는데 그 출발지가 시온이 될 것이라고 본문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앙망하고 있는 이사야의 믿음의 눈을 이 대목에서 생생하게 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6) 여섯째, 제6절입니다; “6. (a)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b)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c)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33:6);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하지만 선지서에 실려 있는 그의 예언은 그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메시아의 오심과 그때부터 가동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소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본문의 결론인 위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1) 이사야가 ‘네 시대’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은 그의 당대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선지서를 읽고 있는 모든 사람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복음을 듣게 되고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는 성도들의 기쁨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을 영적으로 모시고 살아가게 되었으니 평안의 복을 받은 성도들임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사33:6a).
2) 메시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면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메시아가 바로 구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구원만이 풍성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도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진실로 간구하기만 하면 그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여기서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3:6b).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이 이미 나타나고 있으니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거듭난 삶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게 되면 엄청난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 분의 뜻을 인생 가운데 더 정확하게 실천할 수가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될수록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크게 줄일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 경외’(사33:6c)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기사를 보게 되면 그 점이 분명합니다. 창세기 제22장에서 아브라함은 적장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모리아 산으로 찾아가서 막상 이삭의 목을 치려고 할 때에 급히 천사가 나타나서 그를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외치고 있습니다; “멈추어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이제 인정한다. 그러니 이삭 대신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을 제물로 삼아 바치도록 하라”(창22:11-13 의역).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롬4:16). 그러므로 ‘여호와 경외’는 여호와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33:6c);

4) 참고로, 히브리서 저자는 그 장면을 풀이하면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벌써 영생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생명의 창조주이시므로 자신이 이삭을 바치더라도 언약의 아들인 이삭을 다시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히11:19 의역). 여기서 중요한 믿음의 개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 여호와 신앙입니다. ②영생의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능력을 베풀어서라도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③이삭의 목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양으로 대신 속죄의 제사를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그 제물이 바로 메시아입니다(요1:29). ④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대속의 구원과 부활과 영생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있습니다. ⑤그러므로 나의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받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 경외사상’입니다.
둘째로, “7. 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패전으로 말미암아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어 나가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화해정책이 통하지 아니하고), 8.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적들이 대로를 점령하고 있어 그 길을 이용하여 피난할 수가 없다는 것임),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조공을 받지 아니하며 성읍들을 정벌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가는 것임), 9.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가나안 주변의 왕국들의 멸망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임),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해변의 페니키아왕국에 망조가 들고), 사론은 사막과 같고(이스라엘의 비옥한 샤론 평야가 황폐하게 되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도다!(바산의 북쪽 다메섹이 앗수르에게 정복되고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갈멜 산지가 적들에게 점령된다는 것임)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여호와께서 앗수르 침략군을 직접 물리치고 마시겠다는 것임, 사37:35-36), 11.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농사를 지었으나 땅의 소출인 알곡이 없음),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행실이 악하여 멸망의 심판을 초래함), 12.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꺼지지 아니하는 여호와의 불꽃으로 나라와 민족이 멸망하고 말 것임) 13. 너희 먼 데에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먼데서 온 정복자와 가까이 있는 약소국들은 모두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바라보라는 것임) 14. 시온의 죄인들이(여호와신앙을 떠난 유대왕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여호와의 심판이 임하였으니 우리가 두려워 떤다고 하는 것임) 15. ①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②정직히 말하는 자, ③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④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⑤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⑥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여호와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의 조건을 6가지로 말하고 있음), 16. 그는 (여호와의 산성인)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적군이 아무리 그 산성을 공격하여도 여호와의 산성은 끄떡하지 아니할 것임)“(사33:7-16);
(1) 먼저 선지자 이사야가 본문 제7-12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고 있는 세상나라들의 권력지상주의의 모습을 3가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들의 논리와 횡포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사33:7-8). 둘, 그 틈바구니에서 페니키아, 유다, 아람, 이스라엘 등 작은 왕국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3:7, 9). 셋,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나라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직접 역사에 개입하실 것이라는 계시의 말씀입니다(사33:10-12). 그 구체적인 이사야 예언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하여 각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그 깊은 의미를 도출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제7절입니다; “7. (a) 보라, (b)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c)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사33:7); 여기서 이사야가 “보라”(사33:7a)는 것은 영적인 눈을 떠서 미래를 한번 전망해보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조국 유대왕국이 임박한 강대국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전쟁과 화친이라는 2가지 방책을 모두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예언입니다(사33:7bc). 이사야 당시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두 차례나 침략하고 있는 앗수르와의 전쟁을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앗수르의 산헤립 황제가 처음 쳐들어 왔을 때에는 히스기야 왕이 화친책을 사용했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많은 성읍이 점령을 당하자 히스기야 왕은 대항하지 못하고 도리어 앗수르 황제에게 싹싹 빌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궁과 성전의 금은을 모두 끌어 모아 전쟁배상금으로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바침으로써 겨우 화친을 맺고 있습니다”(왕하18:13-16 요약).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평화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해 후에 앗수르의 산헤립 황제가 아예 유대왕국을 완전히 집어삼키고자 재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사33:7c)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앗수르가 다시 침략해오자 히스기야 왕은 이제 강대국과의 화친책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됩니다. 그래서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종주국인 애굽제국에 재빨리 구원병을 요청하고 있습니다(사31:1). 당시 애굽의 공동 바로인 구스 왕 디르하가가 유대왕국을 구하기 위하여 앗수르와 맞서게 됩니다(왕하19:8-9). 하지만 별 소용이 없습니다. 앗수르의 산헤립 황제는 성공적으로 애굽의 구원병을 막아내는 한편 예루살렘성에 갇힌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을 더욱 압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왕하19:10-13). 그러므로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사33:7b);

(3) 둘째, 제8절입니다; “8. (a)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b)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c) 성읍들을 멸시하며, (d)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사33:8);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앗수르제국이 중동 전체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가나안과 애굽으로 서진(西進)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성공적입니다. 주전 732년에 다메섹의 아람왕국을 점령합니다(왕하16:9-10). 그리고 주전 722년에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합니다(왕하18:9-12). 이제는 페니키아와 블레셋 그리고 남조 유대왕국을 굴복시키고 애굽으로 쳐들어가면 됩니다. 장차 중동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까요?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앗수르제국이 서진에 나선 이후부터 국제간의 교류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앗수르에서 유대왕국으로 오는 대로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앗수르에서 애굽으로 가는 대로도 끊어져버립니다(사19:23과는 반대되는 현상임). 물자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교류마저 막혀버리고 만 것입니다(사33:8a).
2) 주전 714년경 앗수르의 군대가 유대왕국으로 쳐들어왔을 때 히스기야 왕이 사력을 다하여 화친에 나섰습니다(왕하18:13-14). 나라의 금붙이와 은붙이를 총동원하여 겨우 앗수르 군대를 물러나게 했습니다. 가까스로 화친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러나 13년 후에 앗수르가 재침하고 있습니다(왕하18:17). 중동 전체의 패권을 움켜쥐고자 하는 앗수르제국의 욕심 앞에 약소국과의 불가침조약이라고 하는 것은 한갓 종이쪽지에 불과할 따름입니다(사33:8b).
3) 패권을 두고 싸우고 있는 강대국 황제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이사야가 정확하게 예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 군사력이 약한 나라의 성읍은 강대국의 먹이에 불과합니다(사33:8c). 그리고 약소국의 신(神)이라고 하는 것은 그 위력이 강대국의 군마(軍馬)의 위력보다도 약한 것입니다(사36:19-20). 자신의 나라와 성읍을 보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다의 성읍을 멸시하고 있는 앗수르제국 황제의 논리이며 무신론(無神論)입니다. 요컨대, 앗수르의 침입에 벌벌 떨고 있는 유대왕국처럼 그들의 호국신(護國神) 여호와도 마찬가지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사36:18).
4) 둘, 황제의 논리는 철저하게 지배와 복종이라는 권력게임입니다. 사람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황제의 지배를 받으며 그 시키는 일에 복종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이란 그 가치가 노예에 불과합니다(사33:8d). 창조주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나누어 준 인간을 노예로 취급하고 있으므로 역사적으로 출애굽 당시의 애굽처럼 앗수르제국은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받을 대상입니다. 본문 이사야의 예언은 이미 그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셋째, 제9절입니다; “9. (a)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b)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c) 샤론은 사막과 같고, (d)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도다”(사33:9); 그와 같이 황제의 논리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그 장래가 어떻게 될까요? 온세상은 패권을 서로 장악하려고 하는 강대국들의 전쟁으로 물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영원한 패권국이 없습니다. 영원한 인간의 권력이 없듯이 당연히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패권국과 도전국사이의 전쟁, 그리고 강대국들 사이의 서열을 정하는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결과 선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모두가 쇠락과 멸망의 미래를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리는 인간들 때문에 땅이 슬퍼하고 있습니다(사33:9a).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받아들이게 되면 땅도 쇠잔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창4:10-12, 6:13). 먼저, 지중해무역으로 부국(富國)이 된 레바논의 페니키아 왕국도 부끄러운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사33:9b). 군사력이 약한 채 부국임을 자랑하고 있으니 강대국의 좋은 먹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욥바에서 갈멜 산맥에 이르는 샤론의 평야는 해안지역이며 이스라엘왕국과 유대왕국이 지중해로 뻗어가는 전진기지입니다(대상5:16, 행9:35). 그곳이 사막화가 되고 말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3:9c). 그 뜻은 장차 이스라엘왕국과 유대왕국이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상실되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제사장나라의 장래가 암담해지는 것입니다.
3) 바산과 갈멜도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3:9d). 여기서 바산은 다메섹의 아람왕국에 속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갈멜은 북조 이스라엘왕국에 있는 산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아람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이 먼저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멸망 당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다섯째, 제10절입니다; “10. (a)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b)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c)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사33:10); 패권을 서로 차지하려는 강대국들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 틈바구니에서 작은 나라들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의 촛불)가 되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이 약소국으로 전락한 제사장나라를 우습게 여기고 침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한갓 지역국가의 수호신이며 우상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의 패권국가도 자주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패권국이 바뀌더라도 변하지 아니하고 있는 철칙(鐵則)이 하나 있습니다. 군사력으로 모든 국제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영원한 제국이 없으며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의 역사만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무신론적인 세상에서 황제의 논리가 종말을 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는 막후가 아니라 직접 인간의 역사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사33:10a). 이사야는 몸을 일으키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다음과 같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1)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사33:10b); 황제의 논리 위에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음을 온 천하에 알게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높으신 능력 앞에 강대국이 약소국을 함부로 침략할 수가 없게 됩니다. 강자가 약자를 마음대로 지배하던 시대도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2)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사33:10c);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여기고 있던 세상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출현 앞에 숨을 죽이게 됩니다. 유일하신 창조주, 모든 인류의 영혼까지 소멸시킬 수 있는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지 아니할 피조물이 없습니다(마10:28). 참고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시기 전에(사65:17-25) 마지막으로 만민의 회개를 종용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가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실 것이라고 이사야가 벌써 예언하고 있습니다(사7:14, 9:6, 11:1-9);

(6) 다섯째, 제11절입니다; “11. (a)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b)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사33:11); 인간역사의 존립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요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호흡’과 ‘잉태’입니다. 사람은 ‘호흡’이 있어야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잉태’를 할 수 있어야 자식을 낳아서 다음 대를 이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세상을 징계하시면 그 두 가지 요소가 사라질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여인의 태를 닫아 버리시고(사33:11a, 창20:18) 사람들이 호흡할 수 있는 공기를 죽음의 불로 태워 버리신다는 것입니다(창19:24-28). 참으로 두려우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류의 역사가 다음과 같이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1) 오늘날 생물학적인 신종무기가 개발일로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이 사람들의 생산능력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일종의 유전자 조작입니다. 세균무기, 화학무기에 이어서 사람의 DNA에 작용하여 정자의 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무기가 생산되게 되면 한마디로, “겨를 잉태하고 짚을 생산하는”(사33:11a) 종말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옛날 89세의 사라를 제멋대로 후궁으로 데리고 간 블레셋의 연맹왕인 그랄의 아비멜렉을 혼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왕궁여인들의 태를 모두 닫아 버리신 적이 있습니다(창20:18). 그와 흡사한 두려운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는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2) 대량학살무기인 핵무기의 두려운 점은 핵폭발로 인하여 반경 수십km이내의 지역에 강력한 빛과 열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의 불기운입니다. 주변의 공기가 모두 타버려서 사람들과 동물들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가 마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사33:11b).
(7) 여섯째, 제12절입니다; “12. (a)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b)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사33:12); 현대인류의 과학이 만들어내고 있는 핵무기의 위력은 지구상의 인류를 완전히 몰살시킬 수 있는 수준이라고 벌써 1960년대 중반부터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려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말심판은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모든 하늘과 땅이 다음과 같이 녹아지고 해체가 되는 수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b-13). 그와 같은 사실을 이사야가 사도 베드로보다 700년 먼저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사33:12a); 사람들의 육신이 먼저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익어버릴 것입니다. 그 규모가 전세계적입니다. 그래서 마치 인종청소의 경우와 같이 여러 민족들이 엄청난 화력 가운데 말살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2)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사33:12b); 인류가 살고 있는 자연환경도 그 피해가 막심합니다. 뜨거운 불기운에 삼라만상이 마치 가시나무와 같이 타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의 세계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지 아니하면 안 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8) 본문 제13-16절에서 이사야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4단계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단계는 창조주께서 하신 일과 그 권능을 깨닫는 것입니다(사33:13). ②둘째 단계는 창조주의 심판이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부활한 다음에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사33:14). ③셋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입니다(사33:15). ④넷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처와 양식과 생수로 만족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사33:16).
(9) 첫째, 제13절입니다; “13. (a) 너희 먼 데에 있는 자들아, (b) 내가 행한 일을 들으라. (c)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d) 나의 권능을 알라”(사33:13);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예언으로 전하고 있습니다(사1:1, 2:1, 6:8-9). 그러므로 이사야가 보기에 먼 데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사33:13a). 그리고 그의 가까이에 있는 자들은 동족들인 선민들입니다(사33:13c). 그들에게 이사야는 구원을 받기 위한 첫 단계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여호와신앙을 지니고 있는 선민들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전하지 아니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민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통적인 유대교의 관념입니다(마12:39).
2) 그런데 본문에서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이방인들이 구원으로 나아오기 위해서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지금도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듣고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33:13b). 환언하자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선교가 가장 필요하다는 견해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메시아의 지상명령입니다(마28:18-20, 행1:8). 그러므로 훗날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3:29),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3) 하나님께서는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모두 하나님의 존귀한 피조물이며 구원의 대상이라고 여기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확고하신 하나님의 뜻이 구약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선지서가 ‘요나’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와 요엘이 메시아와 성령님의 오심에 관하여 많이 예언하고 있겠습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하만물과 만민을 모두 창조하신 하나님을 단지 선민들만의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이사야는 자신 가까이에 있는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크신 권세와 능력 3가지에 대하여 알아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사33:13cd); ①하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권세를 지니고 계십니다. ②둘, 모든 피조물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③셋, 선민들이 그 두 가지 사실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되고 있습니다.
(10) 둘째, 제14절입니다; “14. (a)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b)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c)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d)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사33:14); 선민들인 ‘시온의 죄인들’(사33:14a)과 이방인들인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사33:14b)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1)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 생전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또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요5:24-29). 그러므로 이 땅에서 제멋대로 살다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만다고 하는 생각을 접고서 영생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두 번째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2) 두가지 종류의 심판에 대하여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①첫째가, 이 세상에 임하는 역사적인 심판입니다. 그것은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여기서 ‘삼키는 불’(사33:14c)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②둘째가,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에 처해지는 종말 심판입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게 되면 죽은 자까지 부활시켜서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요5:25-29). 그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산 자는 지옥불에 던져지게 됩니다(계20:14-15). 그것을 이사야는 본문에서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는 것”(사33:14d)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1) 셋째, 제15절 및16a입니다; “15. (a)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b) 정직히 말하는 자, (c)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d)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e)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f)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사33:15), “16. (a)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사33:16a); 이사야는 ‘높은 곳에 거할 수 있는’(사33:16a) 방법,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이 대목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생활수칙입니다. 성도들이 그 생활수칙을 지키며 남은 인생을 살아갈 때에 구원을 확보할 수가 있다는 예언입니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성도의 삶의 방법론을 알기 쉽게 6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사33:15a); 인간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정의’(justice)입니다. 그것은 국가의 법률에 의하여 판단한 것이므로 집단 이기적인 판결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의롭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언하고 있는 의로움은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에게 가장 선한 것을 ‘공의’(righteousness)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원하고 있는 성도들은 이 땅의 정의의 구현이라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비추어서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의무입니다.
2) “정직히 말하는 자”(사33:15b); 정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사회적인 ‘정직’이고 ②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입니다; 사람들 앞에 속임이 없을 때 그것은 사회적으로 ‘정직’(honesty)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창조주 앞에 종으로 서있다는 정확한 인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섬기는 가장 기본적인 분수이며 법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먼저, 피조물인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눅5:8). 하지만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똑바로 진실하게 대답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반영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은 ‘upright’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모습 또는 두려우신 창조주 앞에 서게 된 욥의 모습을(욥38:3, 40:7)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본문에서 하나님 앞에 선 두려움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때에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사33:15c); 남의 것을 착취한 것이므로 불의의 재물입니다. 그와 비슷한 것이 전리품입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합니다. 그 모범을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창14:19-24). 그리고 복음서에서는 삭개오가 다음과 같이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4)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사33:15d); 성도는 뇌물을 받지 않도록 손을 흔들어 퇴짜를 놓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뇌물은 다음과 같이 공정한 재판을 어그러뜨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23:8).
5)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사33:15e);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고 사람의 꾀를 쫓는 것이 잘못입니다. 더구나 무죄한 자를 해치고자 하는 음모에 가담해서는 안됩니다. 그 핏값을 반드시 찾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9:6).
6)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사33:15f);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완전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사람이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1.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그렇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 뜻을 묻고 그 말씀 그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구원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젊은 요셉은 어두운 방 귀부인의 은밀한 유혹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항상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있습니다(창39:9). 그것이 그의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연히 악을 쳐다보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사33:15f).
(12) 넷째, 제16절입니다 “(b)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c)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d)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33:16b&c&d);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좋은 집에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집은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고 반석이 되어 주시는 요새와 같은 집입니다(사33:16b). 그와 같은 거처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성도에게 평생 동안 제공해주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1) 집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도들의 필요를 이미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일을 하는 동안 마치 머슴에게 세경을 주시듯이 양식을 마련해 주십니다(사33:16c). 그러한 은혜를 모세가 다음과 같이 입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40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셨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8:3-4).
2)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마시는 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실 물을 제공하십니다. 물이 부족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도록 하여서라도 반드시 제공해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원한 생명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물은 이 땅에서 목숨유지를 위하여 마시는 음료수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사33:16d).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약속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3)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의 의미에 대해서 좀더 설명을 해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 간략하게 풀이해보자면, 말씀의 성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요1:14). 그러므로 그 살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소화하며 실천하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십니다(요19:34). 그 보혈에는 죄사함의 은혜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요3:13-17). 그러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속의 은혜와 생명력을 믿고서 죄와 사망을 이기며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요1:12-13, 29, 16:33).
셋째로, “17.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메시아가 거하시는 곳은 아름다우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메시아의 나라는 광대하다는 것임, 계21:16), 18. 네 마음은 (세상적으로) 두려워하던 것(강대국의 위협)을 생각해 내리라. (세상적인 약탈물을)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라졌다는 것임) 공세를 계량하던 자(약소국의 조공을 얼마로 정할지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상대방의 군사력의 규모를 판단하던 전문가)가 어디 있느냐? 19.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패권국과 제국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예언임)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이민족인 외세의 지배가 끝나고 말 것임). 20. 우리 절기의(절기를 따라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하여 순례자들이 몰려드는)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새)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영원한) 장막이라(사65:17-18, 고후5:1).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21.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나라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성에 창조주 여호와와 어린양의 보좌가 자리잡고 있음, 계21:3, 22) 그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창2:10, 계22:1-2)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지금의 바다가 사라지고 없으며 새 예루살렘성은 성문으로만 출입이 된다는 것임, 계21:1b, 25-27) 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창조주 여호와가 율법으로 이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고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여 이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게 하실 것임, 눅22:28-30, 롬8:18-21) 23. 네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세상무역의 시대가 바다의 사라짐과 더불어 역사 가운데 사라진다는 것임)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그 대신에 창조주 여호와께서 하늘의 곳간을 열어서 세상의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릴 것임, 요6:11-15, 12:31-32), 24.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무병하며 영생을 누릴 것임, 사65:20, 계22:2-3)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대속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그 제자로 살아간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될 것임, 계21:27)“(사33:17-24); 먼저 본문 제17-21절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새 예루살렘성에 관한 16가지 이야기를 예언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구절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1) 첫째, 제17절입니다; “17. (a)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b)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사33:17); 새 예루살렘성의 첫번째 특징은 왕께서 그 가운데 자리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사33:17a). 그리고 두번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새 예루살렘성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광활하다는 것입니다(사33:17b);

1) “17.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사33:17a);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의 중심을 의미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과 함께 왕으로 오시는 분이 과연 누구일까요? 다윗의 시편을 참조하면 부활 승천하신 메시아입니다; “1. 여호와께서 내 주(메시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과 (왕의 통치권의 상징인) 규를 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시110:1-2). 따라서 이미 시편 내용에 따라 그리스도가 왕으로 이 땅에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사야가 그 점을 새삼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사33:17a).
2) 또한 이사야는 성도들이 장차 그 광경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3:17a). 그 예언은 성도들의 부활을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이 있어야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살전4:16-17).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 메시아로 탄생하셔서 30세부터 여러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신 적이 있으시기 때문에(눅3:23) 제자들이 부활하여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에는 매우 친숙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간에 다시 만나는 장면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사33:17a).
3) 만약 제자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주님께서 창조주로서의 위엄을 강하게 보이신다면 이 대목 이사야 예언의 표현이 달라질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17.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사33:17a)가 아니라 “거룩하신 위엄 가운데 우러러 보며”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성도들은 친숙한 모습으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환영하며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4)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사33:17b); 새 예루살렘성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까요? 다윗과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성에 비해서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바라본 예루살렘성의 규모가 훨씬 큽니다(겔45:1-8). 하지만 훗날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바라본 새 예루살렘성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12,000스다디온(1스다디온은 약192m임)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계21:16).
5)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약2,304km이므로 새 예루살렘 성의 면적은 약 530만km2입니다. 참고로, 그 규모는 중국의 절반을 약간 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성의 규모가 그 정도라면 그 성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하나님나라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요? 그것은 부활의 몸을 입은 성도가 자신의 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실로 “광활한 땅”(사33:17b)이라고 이사야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으로는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규모라고 하겠습니다;

(2) 둘째, 제18절입니다; “18. (a)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b)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c)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d)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33:18); 새 예루살렘성에 입성하게 되면 성도들이 그 옛날의 일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야만 무엇이 사라져버렸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것들 4가지가 없는 것이 새 예루살렘성의 특징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1) 하나, “18.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사33:18a);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던 일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 새 예루살렘성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악한 영에 사로잡혀 죄와 사망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둘,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33:18b);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늘 계산하면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로 필요한 것인지를 먼저 따집니다. 그 필요에 맞추어서 알맞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와 같은 계산 속의 인간관계와 자연과의 관계가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3) 셋,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33:18c); 인간은 흔히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본래 그리스의 도시국가(polis)에서 태어나 함께 살고 있는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도시국가라는 공동체에서 태어나 살고 있으므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내는 것이 시민의 의무입니다. 정당한 세금을 물리기 위하여 국가가 공세를 계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적은 세금을 바치고 더 많은 이익을 국가로부터 얻어내기 위하여 항상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그런 머리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는 세금으로 하나님나라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넷,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33:18d); 세상나라는 항상 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파수꾼을 내보내고 망대의 봉화를 점검하며 계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고 외국으로 탈출하는 백성들을 단속하기 위해서도 망대에서 살피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적의 침입이 없으며 탈출할 성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의 세력을 모두 섬멸한 다음에 새 예루살렘성이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기 때문입니다(사65:17-18).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탈출한다는 것은 영벌의 지옥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할 성도가 없는 것입니다.
(3) 셋째, 제19절입니다; “19. (a)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 (b)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c)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사33:19); 천국을 의미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성의 특징 3가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쉽지 아니한 내용이지만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하나, “19.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사33:19a); 남을 강제로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강포한 백성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처벌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성에서 강포한 백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2) 둘,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사33:19b);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사투리로서 지방말을 의미합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서로 알아듣기 힘든 방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라가 클수록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중국인이지만 서로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당국은 북경말을 표준어로 삼아서 ‘만다린’을 별도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선민이라고 하여 모두가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는 자를 구별하십니다(눅16:22). 따라서 같은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방언이 달라지는 것처럼 완전히 구별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스도의 비유 가운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죽고 나면 비록 같은 유대인이지만 천국과 지옥에 따로 분류되어 들어가며 그들은 서로 건너가지 못하게 완전히 격리되고 만다는 것입니다(눅16:26, 요5:29, 마25:46).
4) 셋,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사33:19c); 유대인들은 사람을 종교적으로 2가지로 대별하고 있습니다; 선민과 이방인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이사야는 달리 구별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는 성도와 그러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이 이상하여 새 예루살렘성의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세상사람과 달리 성도들은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삶에 탐닉하고 있는 세상사람들의 말이 이상하여 알아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가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라는 뜻입니다(계21:27).
(4) 넷째, 제20절입니다; “20. (a)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b)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c)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d)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사33:20); 짧게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1) “20.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사33:20a); 시온성과 새 예루살렘성의 차이 한가지를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온성은 불안정하지만 새 예루살렘성은 안정된 처소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시온성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수도 또는 떠나실 수도 있지만(왕상9:4-7)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어린양이 곧 성전이시므로(계21:22) 언제나 그 성안에 좌정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선민사상에 젖어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시온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2)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사33:20b); 솔로몬성전이 선민들의 시온성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성전은 본래 성막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장소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막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광야에서 이동식으로 만든 것입니다(출25:14-15, 40:36-38, 민2:17).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백성들과 함께 끊임없이 이동했습니다. 솔로몬성전이 완성되자 비로소 그 안에 성막이 자리잡고 안정이 되었습니다(왕상8:6-11).
3) 하지만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여전히 이동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완전한 약속의 땅 곧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은 성도의 믿음이란 선민들의 시온성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왕으로 계시는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저자의 진술과 같은 것입니다;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4)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사33:20c); 새 예루살렘성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영원한 성전입니다(계21:22). 따라서 더이상 성도들은 성막의 말뚝을 뽑아서 이동을 계속하지 아니해도 됩니다. 피곤한 이 세상에서의 불안정한 신앙과 믿음이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사33:20d); 성막의 휘장과 덮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줄입니다. 그것은 오래 사용하면 끊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육신도 오래 사용하면 끊어집니다(고후4:16). 더이상 목숨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영혼이 계속 그 육신에 내주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 장막의 줄이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더 이상 끊어지지 않습니다(고후5:1). 부활의 몸을 입고 성도가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와서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5) 다섯째, 제21절입니다; “21. (a)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b) 그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c)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사33:21);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합니다;
1) “21.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사33:21a); 생명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성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영생의 은혜가 넘치고 있습니다(사33:21a). 그 생명의 기운이 성도들의 코로 스며들고 있습니다(창2:7). 그 에너지를 받아서 성도들이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신30:20, 계21:23-24, 22:5).
2) “그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사33:21b); 창세기의 에덴동산의 모습이 새 예루살렘성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에덴동산에서 물이 흘러나와 세상의 큰 강의 근원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2:10-14). 훗날 사도 요한이 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1.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12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3)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사33:21c); 새 예루살렘성에는 바다가 없습니다(계21:1). 그리고 해와 달이 없습니다(계21:23, 22:5). 그 말은 바람이 없으며 물질적인 에너지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동력이 되고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생명과 모든 움직임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계21:23-24, 22:5). 그러므로 노 젓는 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사33:21c). 그리고 큰 배와 같은 탈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힘입어 모든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계21:25-27). 그것을 하나님의 ‘견인’(牽引, pulling or towing)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합치할 때에 그 강력을 힘입어 자신과 물체의 이동이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6) 마지막으로 선지자 이사야가 본문 제21-24절에서 구원의 성 새 예루살렘과 하나님나라 그리고 바깥세상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본문 예언은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중심이 새 예루살렘성이며(사33:20-21, 계21:2) 그곳 중앙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시110:1, 계21:3, 22, 22:1). 그 두 보좌가 있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과(사33:21, 요4:14, 계22:1-2) 비쳐 나오는 생명의 빛으로(사33:22, 요1:4, 계21:23-24, 22:5) 새 예루살렘성을 비롯한 하나님나라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깥세상과의 관계가 특이한 방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사33:23-24). 과연 어떠한 내용들이 예언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7) 첫째, 제21절을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21. (a)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b)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c) 그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d)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사33:21); 여호와 하나님과 성도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사야는 그곳에 3가지가 있으며 한가지가 없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있는 것들과 없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하나님나라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본문에서 이사야는 여호와의 ‘위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사33:21a). 둘, 하나님나라에는 성도들이 창조주와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사33:21b). 그런데 여호와는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영광 곧 생명을 창조하는 그 능력을 빛으로 쪼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생명력을 그 영광의 빛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말씀들이 다음과 같습니다;
2) 모세가 신명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신30:20).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십니다;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막12:27). 사도 요한의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3) 셋, 하나님나라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습니다(사33:21c). 그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새로이 창조하시는 하늘과 땅에는 바다가 없습니다(계21:1). 그렇지만 하나님나라에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존재하게 됩니다(사33:21c).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생수가 나와서 강을 이루고 큰 호수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계22:1-2a).
4) 사도 요한의 계시록을 참조하면, 강 주변에는 생명나무가 자라고 그 잎사귀로 만국을 치료하게 됩니다(계22:2b). 그리고 달마다 다른 모양으로 생명나무의 과일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게 되면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창3:22). 또한 생명수의 효능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계십니다;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5) 반대로, 하나님나라에는 노 젓는 배와 큰 배가 없습니다. 그런 종류의 배는 하나님나라에 들어올 수가 없도록 통행이 금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33:21d).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①노를 사용하지 아니하는 작은 배까지 통행이 제한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돛을 사용하지 못하게 조치하고 있습니다(사33:23). ②그리고 하나님나라 바깥에서는 노 젓는 배와 큰 배가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선박들이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는 것입니다. ③때가 되면, 작은 돛단배의 통행금지가 풀리게 됩니다. 제23절의 내용에 따르면 하나님나라 바깥의 재물을 반입하기 위하여 작은 배에 돛을 달게 된다고 합니다.
(8) 둘째, 제22절입니다; “22. (a)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b)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c)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d)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33:22); 이사야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성도들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절을 쪼개어 살펴보겠습니다;
1) “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사33:22a); 하나님나라도 하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입법부와 사법부 그리고 행정부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가장 먼저 사법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사법부의 최고책임자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2)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사33:22b); 하나님나라의 입법부는 여호와의 말씀을 생활에 반영할 수 있도록 율법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3)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사33:22c); 하나님나라의 행정부의 수반이 바로 여호와이십니다. 모든 행정기능은 하나님의 손발이 되어 일사불란(一絲不亂, 헝클어지지 아니한 한 줄기의 실과 같음)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4)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33:22d); 하나님나라의 입법, 행정, 사법 등 모든 기관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작용이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 바로 성도를 구원하는 작업입니다. 성도들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만들기 위하여 창조주의 모든 역량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 손발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입법, 사법, 행정부의 모든 관료와 조직들이라고 하겠습니다.
(9) 셋째, 제23절입니다; “23. (a) 네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b)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c)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사33:23); 하나님나라에서는 작은 배라고 하더라도 돛대를 달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사33:23a). 그 이유는 별도로 재물을 실어 나를 일이 평소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사야는 때가 되면 돛을 달고 물건을 많이 실어서 반입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3:23b).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이사야는 평화스럽고 평범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탈취’라는 강경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사33:23b). 그 뜻은 강제로 하나님나라 바깥에서 재물을 뺏아온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전쟁을 통하여 전리품을 획득하는 것과 같습니다(창14:15-16). 이사야는 그 전리품을 나누는 방법까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2) 골고루 분배합니다. 발을 저는 절름발이까지 소외시키지 아니하고 전리품을 나누어 줍니다(사33:23c). 함께 전승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나라가 바깥 세상나라와 전투하는 때가 있으며 그때에는 전리품을 얻어서 성도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다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특이한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10) 넷째, 제24절입니다; “24. (a) 그 거주민은 (b)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c)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사33:24); 여기서 ‘그 거주민’은 하나님나라에 사는 성도를 말하고 있습니다(사33:24a). 그들은 하나님나라에서 두 가지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1) 하나, 하나님나라에서는 병원균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병에 걸릴 일이 없습니다(사33:24b). 하나님은 일찍이 모세에게 자신의 두 가지의 능력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보니 불치의 문둥병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다시 명령을 받아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보니 문둥병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습니다”(출4:6-7의역).
2) 이 세상에서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병의 발생과 치유의 능력을 모두 행사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서 완전한 치유의 능력만을 행하시지 못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둘, 하나님나라에서 성도들이 죄사함의 은혜를 완벽하게 받고 있습니다(사33:24c). 죄를 사함 받고서 하나님나라에서 창조주와 함께 살고 있으므로 자연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모세가 언급했던 말씀, “그는(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신30:20b)의 완전한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있는 무서운 사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학대를 당하고 남을 속이는 자가 기득권층이 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학대를 당하고 속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동족인 선민의 사회의 모습이 그러하므로 이방 족속들의 사회야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사회적인 정의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한 선민의 사회이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자리잡는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에 개입하시고 강력한 구원의 방책을 마련해주십시오. 우리들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사33:1-2 의미). 이사야는 그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메시아의 시대를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인류에게 묻고 있습니다; “황제의 논리로 강자가 힘으로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을 계속 영위할 것입니까?” 그 결과는 뻔합니다; 하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강대국들이 서로 싸우다가 결국은 모두 공멸하고 말 것입니다. 둘, 약소국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마치 ‘고래싸움에 끼인 새우’처럼 그 등이 터져 나가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세상을 그냥 두고 보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심판의 하나님께서 그 몸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긍휼의 하나님께서 마지막 종말심판을 행하시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한번 더 제공하시는데 그것이 이사야가 이미 제7장, 9장, 11장에서 예언한 바 있는 메시아의 오심입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는 민족과 개인들에게 임할 종말심판의 내용을 이사야가 차제에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진노로 모든 육체와 삼라만상이 모두 불타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종말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동족들에게 부디 메시아를 영접하고 구원과 영생을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세월을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만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구원의 은혜가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