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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실족, 무엇 때문인가?(글쓴이; 황효식 목사)

손진길 2024. 8. 31. 04:55
세례 요한의 실족, 무엇 때문인가?(글쓴이; 황효식 목사)
 
"당신이 정말 메시야 맞습니까?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나는 얼마 전에 "신앙의 혁명을 위하여" 제목의 글을 통하여「래리 클랩」의 가장 최근 저서(著書)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읽고 감동과 깨달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책의 핵심주장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그분 자체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의 형통과 안락을 원하기 때문에 결과가 신통치 못하다는 것이다.「래리 클랩」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인과법칙에 따른 생활방식에 얽매어 있다고 지적한다.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땅에서의 삶을 형통케 주셔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필자는 그런 잘못된 믿음으로 주님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 빠졌던 성경 속의 실제인물을 소개함으로서 우리 안에 구축된 강력한 마귀의 ()-인과법칙에 따른 생활방식- 얼마나 강고하고 질긴 것인지를 깨닫고 그것들을 ()하고자 하는 강력한 전의(戰意)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기를 소망한다. 세례 요한은 주님이 땅에 오셨을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공적(公的)으로 선포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였던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신앙인이 어느 , 갑자기 돌변하여 주님에게 "당신이 정말 메시야 맞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릴까요?"라고 물었다면 당신은 믿어지는가?
 
믿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실제 이야기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감옥에 갇혀있을 , 자신을 면회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하고 물었다(7:19~20) 우리는 성경의 대목에서 참으로 경악하게 된다. 아니「가롯 유다」같은 인간이나 있는 그런 의심을 어찌 세례 요한이 있느냔 말이다.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벌써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던 사람이다(1:41) 그리고 장성하여서는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사람이다. 그는 주님과의 경쟁을 은근히 부추키는 제자들에게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나는 주님의 평가를 가장 신뢰한다. 주님은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라고 평가하셨다. '여자가 낳은 중에 가장 '라는 것은 그때까지 태어난 인물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신앙인이 어찌하여 주님을 의심하는 그런 망령된 발언을 있단 말인가? 우리는 세례 요한의 무서운 실족을 보면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과 같은 분이 주님을 의심했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례 요한 같은 분도 의심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우리에게 위안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가? 스펄젼은 아무리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적이 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쩌다가 주님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가 주님의 메시야 되심, 자체로 만족하지 않고 주님이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주셔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헤롯왕의 잘못을 책망하고 감옥에 갇혔을 , 그는 주님이 머지않아 자신을 구해주시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쓴 것을 주님이 안다면, 그리고 주님이 진짜 '메시야'라면 자신을 반드시 구해 주시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주님은 면회 한번 오지 않았다. 아예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는 어쩌면 주님이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점점 "그가 진짜 메시야가 맞나?"하는 의구심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주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당신 메시야 맞아?"하고 당돌한 도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담은 직격탄이었다. 주님을 향한 일종의 화풀이이며 분노의 표시였던 것이다.
 
주님은 세례 요한이 머지않아 목이 잘려 죽을 것임을 알고 계셨다. 또한 그분 자신도 십자가에 박혀 죽을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급박한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이 장차 받게 영광과 족히 비교할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주님은 세례 요한이 땅에서 보상받기보다는 영원한 나라에서 보상받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지금 당장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예수가 진짜 메시야라면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 자신을 감옥에서 건져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공로주의의 함정이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구세주이기 때문이지 우리에게 건강을 주고 돈을 주고 명예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링컨이나 이순신을 존경하는 것도 그들이 존경받을 하니까 존경하는 것이지 나에게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하물며 주님은 말할 나위가 없다.
 
"
당신이 정말 메시야 맞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릴까요?" 라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희는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7:22~23) 말씀은 주님이 '메시야'라는 객관적 공정성과 () 초점을 맞추어야지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야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아시고 많이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문제는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그분의 뜻대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것 때문에 실족하기 쉽다. 우리는 주님이 지금 당장 뭔가를 주시기를 바란다. 내가 주님을 열심히 섬긴 만큼 주님도 나에게 뭔가를 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능력있는 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생각의 속에 가두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주님으로서 인정해야지 그분을 생각대로 통제하려고 해서는 된다. 그분이 뜻대로 움직여야 능력있는 분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마술이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것이지 뜻에 주님을 맞추는 아니다. 순교자가 위대한 것은 그들이 죽음 앞에서도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죽게 내버려둔다고 주님을 의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난에 빠졌을 , 흔히 거기서 당장 구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렇게 기도하기보다는 고난에서 견딜 있는 힘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럴 고난 속에서도 성령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으로 기쁨의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는 것을 주실 때에는 "하이고, 감사합니다!"하고 호들갑을 떨다가 주님의 응답이 없으면 "당신, 주님 맞아?"하고 토라지는 것은 어린아이 신앙이다.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구하는 것은 무속신앙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오직 예수! 주님 분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참된 크리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