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예루살렘성전을 바라보는 의사 누가의 새로운 시각”(눅2:22-5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7. 11. 02:09

제목; “예루살렘성전을 바라보는 의사 누가의 새로운 시각”(2:22-52)

설교일; 주후 2024721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711일 목요일 작성)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지고 있는 의사 누가는 언제 사도 바울과 함께 서방선교에 나서고 있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실마리를 사도행전 제16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그 대목을 옮겨봅니다;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①이방선교사 바울을 포함하여 그의 동역자인 실라와 그들을 수행하고 있는 디모데와 의사 누가를 말함)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①의 경우임)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①의 경우임)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①의 경우임)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소아시아의)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마침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빌립보에서 부자 로마인에게 비싼 자색 옷감을 팔고 있었는데 그녀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①의 경우임)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6. 우리(①의 경우임)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 우리(②여기서는 바울을 제외하고 있는 것임)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16:10-17);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제2차 서방선교에 나서고 있습니다(15:40-41). 그들은 소아시아 남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선택하여 수행자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글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자신이 그 선교팀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위와 같이 우리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사도 바울은 지난번 제1차 선교 때 다녔던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를 재차 방문하고자 그렇게만 생각하고서 제2차선교에 나섰습니다(15:36, 41). 그러나 도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자신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달라고 요청하는 환상을 보고서 자신의 선교팀을 이끌고 처음으로 유럽의 관문인 마케도니아로 건너갑니다(16:9-10). 그때부터 사도 바울의 주치의인 의사 누가가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포함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는 대명사 우리가 그 짧은 글 속에서 무려 7번이나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셋째, 유럽의 첫 성읍인 빌립보에서는 유대인 회당이 없습니다. 그에 따라 사도 바울의 선교팀은 안식일날 유대인 여자들이 몇 명 모여서 기도하고 있는 강가의 한적한 장소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소아시아 두아디라에서 건너온 자주색 옷감장수 루디아를 만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그녀가 회심을 하고 있습니다. 거상인 루디아는 자신의 저택을 초대교회로 제공합니다(16:13-15).

그런데 바울일행이 다른 도시를 방문한 경우에는 가장 먼저 안식일에 유대교인들의 회당(synagogue)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17:1-4, 10, 17). 당시 유대인 교포사회에서는 장정 10명이 합의하면 자신들의 유대교 회당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회당을 방문하여 선민만의 구원을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를 희구하고 있는 유대교인들에게 진정한 여호와의 온세상구원의 뜻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 가운데 일부가 자신들의 선민구원사상은 창조주 여호와의 진정한 세상구원의 뜻이 아니라 편협한 집단이기심의 발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에 따라 회심을 하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구원주로 받아들이는 회개의 장으로 나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점이 있기에 사도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 점은 끝까지 사도 바울의 곁을 지키면서 서방선교에 동행하고 있는 주치의 누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딤후4:11).

따라서 의사 누가는 제3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성전과 국내외에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회당(synagogue)의 존재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와 사도들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그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1-8, 11-26, 4:1-4, 6:9-15, 9:20).

그리고 오늘의 본문과 관련하여 의사 누가는 그 부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서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한 이야기와 12살의 예수님이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2:22-52);

그 가운데 의사 누가는 성전에서 만난 경건한 노인 두사람이 아기 예수를 보고서 예언한 내용을 대서특필하고 있습니다(2:25-38).  그 이유는 장차 하나님의 복음의 시대가 어떠한 모습으로 도래하게 되는지를 그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미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깨달은 교훈과 메시지를 함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남아를 순산하였으므로 8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40일을 채운 후임, 12:1-5),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부터) 아기(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성전) (여호와의 임재가 그곳에 있으므로 상경의 의미로)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13:2)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12:6-8, 번제물로 어린양을 바칠 경제적인 여력이 없으므로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번제와 속죄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5:22, 여호와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시므온은 31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으므로 성령이 충만한 인물임).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그날 시므온이)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세상만민과 만물의 주인이시며 심판주이신)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메시아의 나타나심을 내 눈으로 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임, 8:56, 19:25-27).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2:28, 성령의 감동으로 늙은 시므온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꿈꾸고 있었는데 이제는 직접 예방하였으니), 31. 이는 만민 앞에(만민구원을 위하여 그들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선민 뿐만 아니라, 9:1-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스라엘에서 구원주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임)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그들에게 천사가 준 예언과 합치하고 있으므로, 1:33, 54-55, 2:10-11, 1:20-21) 놀랍게 여기더라“(2:22-33);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남아를 순산하였으므로 8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40일을 채운 후임, 12:1-5),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부터) 아기(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성전) (여호와의 임재가 그곳에 있으므로 상경의 의미로)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13:2)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12:6-8, 번제물로 어린양을 바칠 경제적인 여력이 없으므로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번제와 속죄로) 제사하려 함이더라“(2:22-24);

1)    유대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제사장을 만나고 율법이 정한 그대로 예물을 드려 피를 흘린 몸이 영적으로 깨끗하게 되는 속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레위기 제12장 제1-5절 규정에 따라 남아를 순산한 경우에는 40일 후이고 여아를 낳은 경우에는 80일 후입니다. 그날을 정결예식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2a). 그러므로 아기 예수를 순산한 마리아는 목수 요셉과 함께 40일만에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고 있는 것입니다(22b).

2)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23)라는 구절은 출애굽기 제13장 첫머리에 기록된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지배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유월절사건을 발생하게 하십니다. 그 사건은 어린양의 피가 대문에 뿌려져 있는 이스라엘인들의 집을 건너뛰고 그 대신에 그 피가 대문에 없는 애굽인의 집에 죽음의 천사가 들어가서 맏이와 가축의 초태생을 그 밤에 전멸시킨 것을 말합니다(12:29-30).

3)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을 위하여 불가피했다고 하지만 애굽인들과 가축의 수많은 죽음을 보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은 아프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 역시 여호와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이며 보시기에 좋아하고 또한 심히 좋아하는 생명체들이기 때문입니다(1:25, 31, 3:4). 따라서 큰 대가를 치르고 그 대신에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대해서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요구하십니다.

4)    그 내용이 크게 보아,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맏이는 전부 죽은 애굽의 장자와 같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3:2). 여호와의 것이기에 철저하게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같이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고 회개하는 이방인을 위하여 여호와께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이른바 제사장나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19:4-6).

5)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율법에 따라 사내 신생아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그로부터 32일이 지나면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기 위하여 제사장을 찾아가야 합니다(12:2-6). 특히, 번제물로는 어린양을 준비하고 속죄물로는 비둘기를 준비합니다(12:6). 그렇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어린양 대신에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2마리를 가지고 가면 됩니다(12:8). 참으로 생활이 어려운 자를 돌아보시는 자상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6)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양을 준비할 여유가 없어서 대신 비둘기를 마련하여 예루살렘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12:6-8, 번제물로 어린양을 바칠 경제적인 여력이 없으므로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번제와 속죄로) 제사하려 함이더라“(2:24). 그만큼 갈릴리 서편 산골마을 나사렛에 살고 있는 그들 부부는 가난합니다. 그 슬하에서 아기 예수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상속할 재산이 없는 예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지혜와 은혜를 얻고 있는 소년 예수라고 하겠습니다(40절과 52).  

(2)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5:22, 여호와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시므온은 31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으므로 성령이 충만한 인물임).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그날 시므온이)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2:25-27);

1)    예수 그리스도는 주전 2년경 베들레헴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40일이 되자 아기 예수는 예루살렘성전에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지나자 의사 누가가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여 당시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는 60년전에 노인 시므온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보았다고 하는 매우 신기한 이야기를 발굴하게 됩니다(25-30).

2)    노인 시므온은 오래 전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의사 누가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수집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시므온이 죽기 전에 자손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그 기이한 이야기를 유언삼아 남겨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사 누가가 예루살렘성전에서 시므온의 후손을 우연히 만나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것은 천우신조입니다. 요컨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찾기에 얼마나 열심이며 깊은 기도를 하였는지 능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성령님의 도우심이 각별하기 때문입니다.

3)    시므온이 노인이라고 하는 사실은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의사 누가는 노인 시므온이 매우 경건하고 의로운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5a). 특히 시므온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자입니다(25b).

4)    더구나 시므온은 성령이 충만하여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태어남을 볼 수 있다는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25c-26). 따라서 노인 시므온은 죽기 전에 메시아를 만나기 위하여 언제나 예루살렘성전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생활을 하면서 그의 나타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5)    그날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서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게 되는 날입니다. 바로 그날에 시므온에게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빨리 성전으로 들어가서 젊은 부부가 아기를 안고서 정결의식을 행하고자 오는 것을 마중하라. 그 아기가 바로 네가 학수고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이다”(27a의역).  그 순간 시므온의 눈에 아기 예수의 존재가 들어오고 있습니다(27b).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시므온은 그 아기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손쉽게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3)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세상만민과 만물의 주인이시며 심판주이신)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메시아의 나타나심을 내 눈으로 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임, 8:56, 19:25-27).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2:28, 성령의 감동으로 늙은 시므온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꿈꾸고 있었는데 이제는 직접 예방하였으니), 31. 이는 만민 앞에(만민구원을 위하여 그들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선민 뿐만 아니라, 9:1-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스라엘에서 구원주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임)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그들에게 천사가 준 예언과 합치하고 있으므로, 1:33, 54-55, 2:10-11, 1:20-21) 놀랍게 여기더라“(2:28-33);

1)   아기 예수님을 예방하고 있는 노인 시므온이 여호와를 찬양하면서(28) 성령님의 감동으로 3가지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게 되었으니 이제는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29). 둘째, 내 눈으로 직접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보게 되었으니 제가 꿈꾸고 있는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이 세상에 곧 이루어질 것입니다(30).

2)   셋째, 만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으니 그것은 선민의 영광이요 이방인들에게는 큰 복입니다(31). 아기 예수를 안고서 노인 시므온이 감격에 겨워서 예언하고 있는 그 말을 듣고 있던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놀랍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시므온의 예언이 그들 부모가 벌써 천사를 통하여 듣고 있는 그 내용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32-33, 1:21).

 

둘째로,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임)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대속의 구원주가 되신다는 것임) 세움을 받았고, 35. (대속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희생시킴으로 말미암아)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선민만을 구원하는 유대교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만민구원의 여호와의 뜻을 받아들이는지, 1:12-13, 3:18) 하더라. 36.  (북조 이스라엘왕국에 참여한 10지파 가운데 하나인)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금식기도의 목적은 흉악의 결박과 멍에를 풀어주는 것임, 58:6. 그 일을 이루어 줄 그리스도를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임),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태어나심)에 대하여 말하니라(만민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독생자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장 먼저 예루살렘성전에 임하고 있는 것임. 그와 같이 의사 누가는 선민우월사상의 본산인 예루살렘성전에서 만민구원의 그리스도의 시대가 여선지자 안나의 선포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하겠음).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산후 40일 후에 성전에서 드리는 정결예식까지, 22)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 아기(예수)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2:34-40); 역시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임)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대속의 구원주가 되신다는 것임) 세움을 받았고, 35. (대속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희생시킴으로 말미암아)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선민만을 구원하는 유대교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만민구원의 여호와의 뜻을 받아들이는지, 1:12-13, 3:18) 하더라”(2:34-35);

1)    이 대목에서 시므온이 예수님 가족을 축복한 후에(34a) 예언하고 있는 말씀(34b-35)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의사 누가가 발굴하여 그의 복음서 제20장에 수록하고 있는 포도원농부의 비유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은 풀이가 가능합니다;

2)    첫째,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대속의 구원주가 되신다는 것임) 세움을 받았고”(34c)는 그 의미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20:17, 118:22)는 말씀과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대교지도자들의 배척을 받게 되지만 그 때문에 기독교가 그곳에서 발생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 만민을 살리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둘째,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임)”(34b)라는 말은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20:18)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4)    그 이유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백성은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여호와의 놀라운 은혜를 얻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반면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배척하는 백성들은 영원히 패망하는 반대급부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5)    달리 말하자면, 인자(人子, son of man)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가 시금석의 역할을 하게 되기에 그에 따라 훗날 산산이 부서져서 파멸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5:24, 27). 그 점을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이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18. 그를(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

6)    셋째,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영적인 수술용 메스와 같습니다(35a, 4:12). 그 이유는 피조물인 사람들의 내심을 다음과 같이 드러나게 하고 말기 때문입니다(35b);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4:13).

(2)  36.  (북조 이스라엘왕국에 참여한 10지파 가운데 하나인)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금식기도의 목적은 흉악의 결박과 멍에를 풀어주는 것임, 58:6. 그 일을 이루어 줄 그리스도를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임),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태어나심)에 대하여 말하니라(만민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독생자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장 먼저 예루살렘성전에 임하고 있는 것임. 그와 같이 의사 누가는 선민우월사상의 본산인 예루살렘성전에서 만민구원의 그리스도의 시대가 여선지자 안나의 선포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하겠음)”(2:36-38);

1)    의사 누가가 주후 50년대 말에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여 주전 2년경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목수 요셉과 마리아가 그곳을 방문한 당시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서 그런지 그는 노인 시므온과 노파 안나가 성전에서 여호와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이야기를 얻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 두사람은 죽기 전에 자신들이 메시아를 만났음을 후손과 친지들에게 말해준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런데 노파 안나에 대해서는 의사 누가가 다음 7가지를 특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시므온도 나이가 많지만 안나는 더 나이가 많은 노파입니다(36d). 그녀의 나이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난 그때에 벌써 84세라고 누가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37b). 고대 유대사회에서 평균생존연령이 40세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84세의 노파라고 하면 그것은 고대사회에서 매우 드문 나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연령이 대단히 희귀한 것이기에 의사 누가가 여기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둘째, 안나(Anna)라는 여성의 이름은 히브리어 한나(Hannah)에서 온 것입니다(36c). 은혜 또는 은총을 의미하고 있는 히브리 여성의 이름 한나(חַנָּה֙)가 헬라어나 라틴어로 오게 되면 안나(ννα)로 발음이 변하고 있습니다. 셋째, 고대 유대인사회에서는 여자가 14세 정도이면 결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나는 혼인하고서 남편과 7년을 산 다음에 20살쯤에 과부가 되었으므로 그녀는 64년 정도 과부로 오래 지낸 여인입니다(36e&37a). 그 삶이 곤궁했음을 여기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4)    넷째, 다행스럽게도 84세나 된 그녀에게 아직도 친정아버지의 이름 누엘이 붙어 있습니다(36b). 그 이유는 부친의 가문이 이스라엘에서 나름대로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친정의 도움으로 그나마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던 여인으로 보입니다. 다섯째, 의사 누가는 안나의 집안이 사라진 북조 이스라엘의 10지파 가운데 아셀지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36a). 그것은 굉장히 특이한 기록입니다.

5)    주전 722년에 사마리아가 앗수르 군대의 침입으로 망하고 유민들이 앗수르제국 변방으로 끌려갔으며 그 대신에 변방의 이민족이 제국의 식민정책과 혼혈정책에 의하여 북조 이스라엘의 고토에 들어와서 우상을 섬기면서 오래 살게 됩니다(왕하17:22-24, 29-33). 그 결과 세월이 지나자 북조 이스라엘의 유민인 10지파는 피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동시에 그들의 여호와신앙마저 우상문화의 하나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왕하17:40-41).

6)    그렇게 7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옛날 탈북민 가운데 아셀지파의 한 가문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36a&b&c). 그것은 여호와신앙을 지키고자 한 그 집안의 결심이 확고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섯째, 그 집안의 후손인 안나가 여호와신앙이 투철합니다. 그녀는 사라진 이스라엘 10지파를 회복하여 줄 메시아를 앙망하고 있습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성전에서 금식기도에 매달리고 있습니다(37b).

7)    그녀의 간구를 기억하시고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만나게 되는 영광을 여호와께서 허용하십니다(38a). 일곱째, 안나는 마치 세례 요한과 같습니다. 그녀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기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인지하고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바라고 바라던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죄사함을 받고 다시 해방의 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2:38b 의역). 그래서 그런지 의사 누가는 경건한 노파 안나에 대하여 별로 주저함이 없이 마치 세례 요한처럼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36, 1:76);

(3)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산후 40일 후에 성전에서 드리는 정결예식까지, 22)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 아기(예수)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2:39-40);

1)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정결예식을 모두 마친 후에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갑니다(39). 오늘날에는 신작로가 생기고 길이 좋아져서 예루살렘에서 나사렛까지의 거리를 140km정도로 보고 있지만 그 옛날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주로 직선으로 건설되어 있는 그러한 신작로가 없었기에 150km이상의 거리이며 또한 도보나 나귀를 타고서 가는 걸음이기에 시일이 많이 걸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빨리 가도 7일 정도는 소요가 되는 멀고도 험한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태생이 베들레헴입니다. 그렇지만 갈릴리의 산골마을 나사렛에서 성장하였기에 훗날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게 됩니다. 당시에 남자이름 가운데 예수가 많으므로 고향을 앞에 붙여서 식별하기에 편리하게 한 것입니다. 그 점은 막달라 마리아나 가룟 유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막달라나 가룟은 그들의 고향의 이름인 것입니다.

3)    의사 누가는 과학자이면서 여호와 신앙인입니다. 따라서 그는 아기 예수가 고향 나사렛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를 아주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영과 혼과 육으로 갈라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40); 첫째, 신체가 튼튼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둘째, 지혜가 충만하고 지식의 흡수가 빨라서 혼의 성장이 탁월합니다. 셋째,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12:2-11, 유대인 종교력으로는 아빕월 첫 달이지만 태양력으로는 4월 중순임)이 되면 예루살렘(성전)으로 (23:14-17,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가더니, 42. 예수께서 12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여호와를 모시는 성전이 있는 높은 곳이므로) 올라갔다가, 43. 그 날(유월절 행사)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부모님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아무 말도 없이)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24:13, 19:25, 친족 글로바의 집이 있는 엠마오까지)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3일 동안 예루살렘 도성을 샅샅이 뒤진 후에 마침내, 참고로 예루살렘은 그 옛날 니느웨와 비슷한 규모로 보임, 3:3) 성전에서 만난 즉, (12살의 예수) (율법)선생들(랍비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뛰어난 것임).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자신의 부친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자신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임을 12살의 나이에 벌써 깨닫고 있는 것임) 하시니, 50. 그 부모가 (예수님)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시골 나사렛으로) 내려가사 (성장지인 고향)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그 다음해부터 공생애를 시작하는 30세까지 예수가 다시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한 기록이 없음. 그로 미루어 보아 부친 요셉이 이듬해 별세하고 장남인 예수가 목수일을 계승하여 가족을 먹여 살린 것으로 보임. 예수는 공생애 이듬해 곧 주후 29 4월에 비로소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여 소위 성전청결사건을 일으킨 것임, 2:13-25)”(2:41-52);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12:2-11, 유대인 종교력으로는 아빕월 첫 달이지만 태양력으로는 4월 중순임)이 되면 예루살렘(성전)으로 (23:14-17,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가더니, 42. 예수께서 12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여호와를 모시는 성전이 있는 높은 곳이므로) 올라갔다가, 43. 그 날(유월절 행사)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부모님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아무 말도 없이)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24:13, 19:25, 친족 글로바의 집이 있는 엠마오까지)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3일 동안 예루살렘 도성을 샅샅이 뒤진 후에 마침내, 참고로 예루살렘은 그 옛날 니느웨와 비슷한 규모로 보임, 3:3) 성전에서 만난 즉, (12살의 예수) (율법)선생들(랍비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뛰어난 것임)”(2:41-47);

1)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변방 갈릴리의 가난한 산골마을 나사렛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다윗대왕의 직계 자손으로 보이는(1:6-16) 목수 요셉이 자신의 족보와 신분을 다윗대왕의 아들 가운데 왕위에 오르지 못한 방계로 위장하여 숨긴 채(3:23-31)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벽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의 정치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처지가 얼마나 곤궁한지를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2)    그러한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래도 다윗대왕의 종손이기에 목수 요셉은 가족과 함께 매년 한차례 큰 돈을 들여서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3가지 절기 가운데 유월절 하나만이라도 매년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41). 그렇게 순례의 길을 12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동안에 아기 예수가 이제는 12살의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42).

3)    매년 예루살렘성전에서의 8일간의 공식적인 유월절과 무교절 일정이 모두 끝나게 되면 목수 요셉의 가족은 비로소 친지들과 함께 엠마오를 거쳐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11km 떨어져 있는 엠마오로 가서 일박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곳에 방계인 동생 글로바의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30리 정도의 거리에 엠마오가 자리잡고 있기에 그것은 반나절 걸으면 되는 길입니다(44-45, 당일에 예루살렘과 엠마오를 왕복하고 있는 것임);

4)    글로바가 목수 요셉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훗날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엠마오로 가고 있는 글로바를 일부러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24:13-18). 집안의 어른이며 제자들의 원로이기에 글로바를 예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가 나사렛 예수의 숙모이기에 그녀가 골고다 십자가 처형장까지 따라가고 있습니다(19:25). 또한 엠마오로 가고 있던 글로바의 아들 시므온이 훗날 예루살렘총회장이 되고 있습니다(24:13, 15:14).

5)    예수님이 12살이 된 그해 유월절에 그는 부모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절기가 끝났지만 홀로 예루살렘성전에 남아 있습니다(43). 그 이유는 랍비들이 토론하는 히브리경전 이야기에 그가 몰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친지들과 함께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장남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부모는 걱정이 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3일간이나 성읍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44-46a).

6)    그러한 기이한 일화를 현지에서 발굴한 의사 누가가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46. 사흘 후에(3일 동안 예루살렘 도성을 샅샅이 뒤진 후에 마침내, 참고로 예루살렘은 그 옛날 니느웨와 비슷한 규모로 보임, 3:3) 성전에서 만난 즉, (12살의 예수) (율법)선생들(랍비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뛰어난 것임)”(2:46-47).

7)    12살의 소년 예수가 놀라운 모습을 예루살렘성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창조주 여호와에 대한 이야기를 랍비들로부터 관심있게 듣고 있습니다(46b). 그 다음에는 질의답변시간에 랍비들의 토론과정에서 불거진 의문사항에 대하여 예리하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46c). 랍비들과 방청인들이 12살에 불과한 소년 예수의 질문내용이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47). 도대체 예수는 어떻게 그러한 여호와신앙의 경지에 올라있는 것일까요?... ;

 

(2)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자신의 부친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자신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임을 12살의 나이에 벌써 깨닫고 있는 것임) 하시니, 50. 그 부모가 (예수님)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시골 나사렛으로) 내려가사 (성장지인 고향)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그 다음해부터 공생애를 시작하는 30세까지 예수가 다시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한 기록이 없음. 그로 미루어 보아 부친 요셉이 이듬해 별세하고 장남인 예수가 목수일을 계승하여 가족을 먹여 살린 것으로 보임. 예수는 공생애 이듬해 곧 주후 29 4월에 비로소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여 소위 성전청결사건을 일으킨 것임, 2:13-25)”(2:48-52);

1)    장남 예수를 찾기 위하여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3일이나 거리를 샅샅이 수색하였던 부모의 입장에서는 성전에서 랍비들의 토론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아들을 만나자 당장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아들에 대한 책망의 말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야, 어째서 너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성전에 남아 있는 것이냐? 너는 부모가 걱정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냐?”(48절 의역);

2)    그 책망에 대하여 12세의 소년에 불과한 예수가 의연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의 아버지는 이곳 예루살렘성전 지성소에 임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지를 어째서 모르고 계시는 것입니까?”(49절 의역). 영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12살 예수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각성은 정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그 영적인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50). 그만큼 그들은 어려운 생계를 꾸려가느라고 그만 세상살이에 찌들어 있는 것입니다.

3)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장남 예수를 찾아서 함께 엠마오에 다시 들립니다. 걱정하고 있는 친지들을 안심시키고 그 다음에는 남은 가족들과 함께 나사렛 고향집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실과 함께 의사 누가가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51. 예수께서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시골 나사렛으로) 내려가사 (성장지인 고향)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2:51).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4)    첫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유대지방보다는 북쪽의 갈릴리지방의 고도가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이 갈릴리호수에서 남쪽으로 계속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51a).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진짜 임금인 만군의 여호와를 성전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상경(上京)하향(下鄕)의 개념이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둘째, 나사렛 고향에 도착한 후에 목수 요셉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모친 마리아만이 그 옛날 12살의 장남 예수가 예루살렘성전에 혼자 남아서 랍비들과 토론을 벌인 그 모습을 마음에 담고서 오래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51b). 그 이유는 아무래도 전승에서 전하고 있는 그대로 그동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마을에서 목수일을 열심히 하던 요셉이 그만 병이 들어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6)    셋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남동생이 4명이고 또한 여동생이 복수로 여러 명입니다(13:55-56). 최소한 여동생이 2명이라고 보면 부친 요셉이 책임지고 있던 식솔이 8명이나 됩니다. 부친상을 치른 다음에 장남 예수가 목수의 일을 승계합니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모친과 6명의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는 13세부터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할 때까지 다시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삶은 팍팍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7)    그러나 예수는 다른 한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52).  소년이 청년이 되어가면서 키가 자라고 인격이 성숙하게 되면서 이웃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경우에는 한가지 현상이 더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자라고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52). 어떻게 생활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일까요?

8)    최소한 두가지의 생활모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히브리경전을 빌려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예수님의 외가는 레위인 제사장 가문이므로 그들이 경전 두루마리를 상당히 소장하고 있습니다. 크게 멀지 아니한 마을 야비아나 가드헤벨에 들러 예수는 히브리경전을 구해와서 그것을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또한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9)    또 하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하여 나사렛 예수가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생활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히브리 경전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깊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얻는 방법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깨달음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자신이 30세가 되면 하나님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는 공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스스로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16:24)고 말씀하십니다. 그와 같이 세상적인 삶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영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삶과 교훈을 묵상하면서 각성하게 된다면 성도들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성도들이 그와 같이 천국의 시민으로 그리고 빛의 자녀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21세기의 한국교회와 한인교회가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이웃나라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르게 전파하는 기지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복음 안에서 하나로 통일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기를 기록하고 있는 의사 누가의 복음서를 자주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많은 깨달음과 성취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