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베들레헴을 찾아가서 아기 예수를 경배한 목자들의 이야기”(눅2:1-21)
설교일; 주후 2024년 7월 14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7월 8일 월요일 작성)
의사 누가는 자신이 저술하고 있는 복음서에서 베들레헴을 간단하게 ‘다윗의 동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2:4). 그러므로 다윗대왕의 후손인 목수 요셉이 로마제국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호적을 정리하기 위하여 조상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눅2:1-5);
그런데 히브리 바이블인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베들레헴의 의미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다음 4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성읍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베들레헴의 북쪽 교외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창35:19-20). 그 옛날 야곱은 벧엘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이어서 헤브론에 살고 있는 부친 이삭을 만나고자 계속 남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그만 애처 라헬의 죽음을 맞이하고 만 것입니다. 산모인 그녀는 예루살렘 북쪽 20리 지점인 라마에서 둘째 아들을 낳다가 난산으로 운명을 달리하고 맙니다(창35:16-18, 렘31:15, 마2:18). 야곱은 크게 슬퍼하지도 못하고 시신을 3일간 남쪽으로 운구하여 베들레헴 초입에서 장사를 치룬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창35:19-20). 따라서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의 슬픔이 진하게 묻어 있는 고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맞이하고 있는 슬픔의 고장이 바로 베들레헴인 것입니다.
둘째로, 베들레헴의 남쪽 들판에서 야곱이 양을 치고 있을 때에 자신의 첩 빌하가 장남 르우벤과 통간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창35:21-22). 첩 빌하는 자신의 뒷배가 되어주던 야곱의 애처 라헬이 죽고 말았기에 새로운 권력자를 찾아서 차기 족장이 될 수 있는 장남 르우벤과 야합을 하고 그것이 지나쳐서 육체적인 결합을 하고 만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은 결코 장남 르우벤을 차기 족장으로 삼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유언으로 남기고 맙니다(창49:4). 그와 같이 가장 가까운 가족의 배신과 자식의 패륜이 발생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셋째로, 베들레헴 남쪽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에 양치기의 망대가 있는데 그 이름이 ‘에델망대’입니다. 그 들판은 야곱이 인간적인 배신을 경험한 장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훗날 예루살렘성전에서 제물로 사용이 되는 흠이 없는 양을 제공하기 위하여 양치기들이 그곳 넓은 들판에서 열심히 양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델망대는 그곳 양치기들이 머무는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그에 대한 고양주 목사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사회에서 매우 무시 받던 계층이었다. 서로의 양떼를 훔쳐오는 일도 있었고 직업적 특성으로 인해 손 씻는 규례와 같이 율법에 명시된 정결례를 제대로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종종 자신을 선한 목자에 비유하셨다. 구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목자로 묘사되었으며, 따라서 메시아 역시 목자의 이미지를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지를 묻는 헤롯에게 종교지도자들이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 2:6)고 대답한 부분에서도 이러한 사고를 엿볼 수 있다. 한편, 베들레헴 지역의 양이 특별한 양이었다는데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조석으로 흠 없는 양을 희생제물로 바쳐야 했는데, 이런 양을 원활히 공급받기 위해 성전 당국자들은 자체적으로 소유한 양 떼를 사육하는 곳이 베들레헴 근교였다는 것이다. 성전에 바쳐질 흠 없는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첫 증인이요 경배자로 서 있었다는 사실 또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출처; 2020년 12월 17일자 기독교개혁신보);
넷째로, 베들레헴은 다윗의 조상인 보아스의 고향이며 그곳에서 룻을 아내로 취하고 있습니다(룻4:13-17). 불쌍한 과부를 사랑하고 아내로 맞이하여 그 가족에게 살길을 마련해준 보아스의 선행이 빛나고 있는 고장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미담이 살아 있는 곳에서 훗날 보아스와 룻의 손자인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이 선지자 사무엘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차기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삼상16:12-13).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다윗왕조의 발생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선지자들의 예언 그대로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눅2:4-7, 미5:2, 사11:1-10).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어째서 왕궁이나 부자의 집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비천하게 태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당시에 많은 보아스의 자손들이 한꺼번에 호적을 정리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눅2:1-1-7).
그 시기를 마태복음에서는 헤롯대왕의 말년인 주전 4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마2:1-12) 의사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달리 주장하고 있습니다; “1. (주후 14년에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서거하고 양아들 디베리우스 곧)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15해(주후 28년)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다의 총독으로(재임기간 주후 26년에서 36년), 헤롯(안디바)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재임기간 주전 4년에서 주후 39년), 그 동생 (헤롯)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재임기간 주전 4년에서 주후 34년),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안나스의 재임기간은 주후 6년에서 14년까지이고 가야바의 재임기간은 주후 18년에서 36년까지임. 그런데 안나스는 사위인 가야바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대교의 실세이므로 일부에서는 그를 명예 대제사장이라고도 말하고 있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제사장)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눅3:1-3).
한마디로 풀이를 해보자면,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태양력으로 주후 28년에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해에 6개월 늦게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고 있다고 보면, 그 시기는 세례 요한이 주후 28년 4월 유월절 무렵이고 예수님이 역시 30세가 되는 해 곧 주후 28년의 10월 초막절 즈음입니다(눅3:3, 16, 21-23). 그러므로 그들의 탄생은 주전 2년경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렇지만 의사 누가는 유대왕 헤롯(대왕) 때에 제사장 사가랴가 예루살렘성전에서 분향단을 돌보다가 천사장 가브리엘로부터 세례 요한의 출생고지를 받은 것으로 이미 기록하고 있습니다(눅1:5-20). 그에 따라 사실 세례 요한은 주전 2년이 아니라 주전 3년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누가복음 안에서도 자체 1년의 오차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차이를 생각할 때에 비록 역사적인 고증을 충실히 한다고 하더라도 1-2년의 오차는 있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그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에 따라 이제부터 베들레헴의 남부 들판에서 밤중에 열심히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에게 어째서 그리스도의 탄생의 복음이 천사의 음성으로 들려오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현지를 방문하여 아기 예수를 예방한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목자라고 하는 것은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믿음의 열조라고 불리고 있는 인물들은 창세기 제11장과 제12장을 참조하면 메소포타미아 중심지 갈대아인의 우르지역에서 살던 아르박삿의 후손인 족장 데라와 그의 장남 아브람과 장손 롯입니다(창11:31-12:5).
1) 그들은 주전 21세기에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대사회 최고의 문명지역인 고향을 떠나 서쪽 변방 미개지역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dispatched). 그곳에 두가지의 혜택을 주고자 합니다; 하나는, 여호와신앙을 전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선진문명을 전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2) 그들은 본래 갈대아인의 우르지역에서 농업을 경영하여 부유하게 살고 있던 셈족입니다. 그런데 소득이 높고 안정적인 삶을 떠나서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유목민의 삶’(nomad life)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이방지역 함족의 땅에서 살아가게 되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계승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창13:7, 26:14, 30:43);
3) 출애굽기에서는 애굽제국에서 왕자급으로 대접을 받던 모세가 40세부터 무려 40년 동안 미디안 땅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치기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출3:1, 행7:23, 30). 모세가 광야에서 목자의 삶을 오래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그가 동족을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간 지내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얻고 있으며 그가 훌륭한 목자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행7:36-38, 히11:26-29).
(2) 둘째, 가나안 지역의 원주민인 함족은 서진하여 온 이민족 셈족을 별로 고맙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반대로 생각합니다. 살기 위하여 유프라테스 강의 이서(以西)지역으로 떠나온 별볼일이 없는 유목민으로 여기고 맙니다. 그 결과 그들을 히브리인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하고 차별합니다(despised).
1) 특히 고대사회 제2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는 애굽인들은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히브리인을 부정을 탄다고 말하면서 아예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함께 식사도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창43:32). 그와 같은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셈족인 목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2) 그 점은 야곱일행이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하여 목축업에 종사하게 되는 과정에서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창46:34). 그와 같은 맥락에서 훗날 독생자의 영광을 내려놓고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백성들이 진정한 목자 구세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배척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요1:11, 7:32).
(3) 셋째, 야곱이 자손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여호와신앙의 모범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창47:7-10, 29-31). 그리고 야곱은 7년 연속 흉년으로부터 집안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이민초청을 해준 11번째 아들 요셉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제49장에서 마지막 유언을 하면서 애굽의 총리를 역임한 애굽의 귀족인 아들 요셉에게 여호와의 큰 축복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1)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23.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었음이라”(창49:23-24). 돌이켜보면, 17세의 청소년 요셉은 10명의 이복형들에게서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단에 그만 노예로 팔려간 자입니다(창37:28).
2) 그러나 그는 애굽에서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아갔기에 형통함을 얻게 됩니다(창39:2-9). 나중에는 애굽제국의 전국총리로 발탁이 되어 7년 연속 풍년의 곡식을 저장하여 그 다음의 7년 연속 흉년으로부터 애굽인과 주변의 이방인들을 살리는 대업을 이룩하게 됩니다(창41:41-57).
3) 그와 같이 여호와신앙을 가진 요셉을 살려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인물로 사용하는 것이 창조주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입니다(창45:5-11, 50:20). 동일한 맥락에서 먼 훗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됩니다(요1:12-18). 나사렛 예수가 바로 만민을 구원하는 구세주(Savior)인 참된 목자라고 하겠습니다(요3:13-18, 10:11).
(4) 넷째, 훗날 목자의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인물이 이스라엘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다윗 대왕입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면서 자신의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사나운 짐승을 물리친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삼상17:34-36). 그러한 그가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 자손을 멸시하고 있는 이방인 블레셋 족속의 용장 골리앗을 상대합니다(삼상17:25, 40). 상대적으로 왜소한 다윗이 5개의 돌을 물매에 넣고 빠르게 던져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된 것은 순전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그에게 함께하였기 때문입니다(삼상17:45-54);
그와 같이 여호와신앙인으로 온전히 살아가는 자는 여호와의 양인 백성들을 보호하며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다윗과 같은 목자가 바로 훌륭한 Leader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그때(예수님의 탄생시기)에 가이사 아구스도(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를 말하며, 재위기간은 주전 27년에서 주후 14년 8월까지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여기서는 주전 5년경으로 봄)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첫번째 임기는 주전 4년에서 4년간, 두번째 임기는 주후 6년에서 4년간임) 처음 한 것(첫번째 임기중에 행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조상인 보아스가 베들레헴 사람이며 그의 손자가 이새이고 이새의 막내아들이 다윗대왕임, 룻2:4, 4:11-22. 목수 요셉은 다윗의 후손임, 눅1:27),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마1:25, 약혼녀 마리아가 순산할 때까지 목수 요셉이 그녀와 합방하지 아니한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음. 따라서 약혼한 마리아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음)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목수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을 자신의 장남으로 여기고 있는 것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그 옛날 다윗가문의 스룹바벨을 따라 유대 땅에 들어온 이새의 후손들이 많으므로 그들이 일시에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에 몰려들고 있음. 그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숙소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임. 더구나 가난한 갈릴리 산골 나사렛 출신이 목수 요셉이므로 근근이 마굿간에서 기거하게 된 것임)”(눅2:1-7);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그때(예수님의 탄생시기)에 가이사 아구스도(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를 말하며, 재위기간은 주전 27년에서 주후 14년 8월까지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여기서는 주전 5년경으로 봄)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첫번째 임기는 주전 4년에서 4년간, 두번째 임기는 주후 6년에서 4년간임) 처음 한 것(첫번째 임기중에 행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눅2:1-3);
1) 제3복음서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와는 달리 그리스도 복음의 근원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눅1:1-4).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공생애를 함께한 사도나 제자들의 이야기를 청취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탄생지 베들레헴과 성장지 나사렛 그리고 복음전파지역을 일일이 직접 방문하여 자료를 많이 수집한 후 그것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깊이 연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그에 따라 뚜렷하게 두가지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사렛 예수의 호적이 비록 다윗의 후손인 목수 요셉의 장남으로 등재가 되어 있지만 그것은 의붓아버지 요셉의 호적에 그렇게 올라가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으며 그 부친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눅1:34-35) 그 모친은 아론의 후손인 엘리사벳의 친족인 마리아라는 주장입니다(눅1:5, 36).
3)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세상구원의 뜻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의사 누가가 나사렛에서 수집하여 그의 복음서 제3장에 수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가 인상적입니다;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3:38).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가 외치고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은 그 출발점이 이 세상을 창조한 아버지 하나님의 피조물 사랑과 영생구원의 뜻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요3:13-17).
4) 의사 누가는 본문에서 나사렛 예수가 다윗의 후손인 목수 요셉의 호적에 장남으로 등재가 된 사연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주전 5년경에 제국내의 모든 신민은 호적을 정리하라고 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절). 그에 따라 가나안 지역까지 관장하고 있는 당시 시리아의 로마총독 구레뇨가 구체적인 시행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빠짐없이 조상들의 고향을 방문하여 호적을 정리하라”(2-3절).
5)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분을 감추고서 멀리 갈릴리의 산골마을 나사렛에서 살아가고 있던 목수 요셉도 어쩔 수가 없어서 뒤늦게 고향 베들레헴을 방문하고 있습니다(4절). 그 시기가 주전 2년경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 제3장 제1절과 제23절의 기록에 따르면 선지자 세례 요한과 메시아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이 그들의 나이가 30세가 되는 주후 28년경이기 때문입니다.
6)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서는 주후 14년 8월에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별세합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제2대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지나면 주후 28년에 디베료 황제는 로마통치 15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눅3:1). 바로 그해 4월 유월절 무렵에 30세가 된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 등장하여 회개의 물세례를 시행합니다. 6개월이 지나자 10월 초막절 무렵에 역시 30세가 된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찾아와서 물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눅3:21-23).
7) 그렇다면 주전 2년경 베들레헴을 방문하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어떠한 일이 그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의사 누가가 현지를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의 저자와는 달리 의사 누가가 베들레헴 부근에서 밤중에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음성을 듣고서 아기 예수를 예방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한 목수 요셉 부부가 경험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저자가 현지에서 취재하지 아니하면 도저히 얻을 수가 없는 자료인 것입니다.
(2)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조상인 보아스가 베들레헴 사람이며 그의 손자가 이새이고 이새의 막내아들이 다윗대왕임, 룻2:4, 4:11-22. 목수 요셉은 다윗의 후손임, 눅1:27),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마1:25, 약혼녀 마리아가 순산할 때까지 목수 요셉이 그녀와 합방하지 아니한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음. 따라서 약혼한 마리아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음)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목수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을 자신의 장남으로 여기고 있는 것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그 옛날 다윗가문의 스룹바벨을 따라 유대 땅에 들어온 이새의 후손들이 많으므로 그들이 일시에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에 몰려들고 있음. 그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숙소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임. 더구나 가난한 갈릴리 산골 나사렛 출신이 목수 요셉이므로 근근이 마굿간에서 기거하게 된 것임)”(눅2:4-7);
1) 주전 1023년경 선지자 사무엘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집을 은밀하게 방문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뜻을 어기고 있는 초대왕 사울 대신에 새로운 왕을 여호와의 뜻에 따라 선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여호와의 뜻을 전달하고 있습니다(삼상16:12-13). 그런데 이새의 조부가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부자 보아스입니다(룻2:1-4). 그리고 조모가 모압 출신으로서 여호와신앙을 지닌 룻입니다(룻1:22, 4:13).
2) 그에 따라 다윗대왕의 후손인 목수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나귀를 타고서 멀리 갈릴리의 산골마을 나사렛에서부터 호적을 정리하기 위하여 조상들의 고향 베들레헴을 방문하는 것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당연한 일입니다(4-5절);
그런데 베들레헴에 당도하자 목수 요셉은 두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하나는, 약혼녀인 마리아가 만삭이 되어 당장 해산을 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6절).
3) 또 하나는, 사정이 급한데 베들레헴 성읍에서는 자신들이 들어가서 지낼만한 빈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호적을 정리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을 방문하고 있는 이새의 후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으면 사정이 급하므로 목수 요셉이 웃돈이라도 주고서 방을 잡을 것이지만 그런 여유가 없는 가난한 목수입니다. 어쩔 수가 없어서 급히 구한 것이 외양간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게 됩니다(7절). 그것은 과연 어떠한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을 의사 누가가 목자들의 예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4) 의사 누가는 예루살렘과 유대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시리아총독부에서 엄청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인물로 보입니다. 그에 따라 그는 서방선교에 나서고 있는 사도 바울의 주치의로서 활동하고 있는 유능한 의사이면서 동시에 정보수집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리고 문서를 작성할 때에 용어의 선택이 뛰어납니다. 그러한 면모가 본문의 구절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5) 풀이를 해보자면 첫째, 아내 마리아가 아니라 약혼녀 마리아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약혼녀에 불과한 마리아가 임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목수 요셉이 그녀와 합방을 한 사실이 있다고 하면 약혼녀가 아니라 아내 마리아라고 정확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둘째, 첫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6) 그것은 약혼녀 마리아가 낳은 아들을 목수 요셉이 자신의 장남으로 베들레헴을 방문한 김에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호적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혼녀 마리아가 목수 요셉과의 합방 이전에 잉태한 아들이므로 단지 의붓아버지 요셉에 의하여 그 호적에 올라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사실을 모친 마리아가 지차들에게 훗날 알려주었는지 그들 동생들이 큰형 예수를 결코 혈통적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여기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요7:5).
둘째로, “8. 그 지역(베들레헴 남부 들판)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델망대, 창35:19-21)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어두운 밤에 먹이를 구하는 짐승이 가축을 공격할 수가 있으므로 목자들이 높은 언덕 에델망대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는 것임, 양치기 야곱의 경우는 창31:40, 목자 다윗의 경우는 삼상17:34-36),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행9:3-5,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여호와의 영광과 비슷함) 크게 무서워하는지라(눅1:12, 갑자기 영체를 만나면 육신을 가진 피조물은 두려워서 떨게 되는 것임).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그 옛날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모습 및 천사의 외치는 소리와 비슷함, 출33:18-23). 11. 오늘 다윗의 동네(베들레헴, 4절)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Savior)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Christ the Lord)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비천한 목자와 같은 사람을 찾아오신 겸손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복음임, 마11:27-30, 25:40, 9:13, 눅19:9-10),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버림받은 이방인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임, 눅11:29-30, 그것은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임)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12군단도 더 되는 많은 천사를 말함, 마26:53, 계5:11)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δόξα, 독사)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요1:12-13, 주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중에 평화(εἰρήνη, 에이레네)로다 하니라”(눅2:8-14);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8. 그 지역(베들레헴 남부 들판)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델망대, 창35:19-21)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어두운 밤에 먹이를 구하는 짐승이 가축을 공격할 수가 있으므로 목자들이 높은 언덕 에델망대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는 것임, 양치기 야곱의 경우는 창31:40, 목자 다윗의 경우는 삼상17:34-36),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행9:3-5,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여호와의 영광과 비슷함) 크게 무서워하는지라(눅1:12, 갑자기 영체를 만나면 육신을 가진 피조물은 두려워서 떨게 되는 것임).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그 옛날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모습 및 천사의 외치는 소리와 비슷함, 출33:18-23)”(눅2:8-10);
1) 예루살렘성전에서 20리 남쪽에 떨어져 있는 베들레헴 남부에는 큰 들판이 있습니다. 그곳 초지에서 목자들이 흠이 없는 양을 얻고자 수많은 양떼를 돌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조석으로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하는 흠이 없는 양들을 공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목자들은 한밤중에도 언덕 위에 있는 에델망대에서 들판의 양들을 살피고 있습니다(8절). 밤중에 먹이사냥에 나서는 짐승들이 기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 그와 같은 일은 오래 양치기로 살아온 경험이 있는 야곱이나 다윗의 고백에서 적나라하게 엿볼 수가 있습니다; “40. 내(야곱)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31:40), “34. (청소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17:34-35).
3) 목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놓고 야간에 기습하는 짐승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목자들에게 주의 영광이 나타나며 천사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9-10a). 그와 반대로, 양떼를 온전히 돌보지 아니하고 품삯만 얻고자 하는 불성실한 목자들에게는 하늘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한다고 하겠습니다(요10:12-13). 그리고 천사가 전하고 있는 내용은 소수의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 백성에게 적용될 수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10b). 요컨대, 만민구원의 복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확실하게 선포가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2) “11. 오늘 다윗의 동네(베들레헴, 4절)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Savior)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Christ the Lord)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비천한 목자와 같은 사람을 찾아오신 겸손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복음임, 마11:27-30, 25:40, 9:13, 눅19:9-10),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버림받은 이방인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임, 눅11:29-30, 그것은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임)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12군단도 더 되는 많은 천사를 말함, 마26:53, 계5:11)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δόξα, 독사)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요1:12-13, 주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중에 평화(εἰρήνη, 에이레네)로다 하니라”(눅2:11-14);
1) 창세기 제24장 첫머리를 살펴보면 참으로 이상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 내(아브라함)가 너(늙은 종)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24:3-4). ①하늘의 하나님, ②땅의 하나님, 그리고 ③약속의 아들을 위한 신부감이라는 3가지 용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2) 첫째, 하늘의 하나님은 창조주 여호와이신 성부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창1:1-2). 둘째, 땅의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성육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11-12절). 셋째,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쳐질 뻔 했던 약속의 아들 이삭의(창22:1-14)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신앙이 살아있는 집안의 처녀가 필요합니다(창22:20-23, 24:18-24, 58).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구원주(Savior)로 오시는 그리스도(11절)의 신부는 끝까지 그의 제자로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요3:29-30, 계21:2).
3)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는 그 처음 모습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입니다. 비록 성육신한 아기이지만 그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숨어 있습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창조주의 본모습을 보게 되면 피조물인 인간은 죽임을 당하게 됨, 출33:20),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공생애 복음사역과 대속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거룩하신 사랑과 공의의 모습을) 나타내셨느니라”(요1:14&18).
4)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 독생자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새 언약의 시대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실현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있어서 독생자의 성육신은 참으로 복된 소식입니다(렘31:31-34, 사9:1-7, 욜2:28-32). 그 소식을 에델망대에서 한밤중에 양떼를 돌보고 있는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전달하고 있습니다(13-14절). 어째서 베들레헴 성읍에 있는 주민들이 아니라 남부의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면서 파수꾼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목자들에게 그 기쁜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5)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참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4-16), “17. 세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21:17). 아주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6) 첫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자를 살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 백성들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물리치는 일입니다(창3:15, 롬8:1-2). 그 일은 맹수와 싸워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의 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을 목전에 두고서 사도들을 양을 치는 목자로 발령하십니다. 목자의 인도함과 보살핌이 있어야 양들은 안전하게 꼴을 먹고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출19:4-6, 사66:20-21).
7) 셋째, 그와 같은 이미지가 중요하기에 에델망대의 양치기들에게 하늘에서 천사들의 복된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12-13절). 급히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목자들이 가장 먼저 경배하는 것이 옳다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합창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신의 주님으로 삼는 그 일이 바로 피조물인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14절, 롬5:1).
셋째로,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heaven, 천국을 말함)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에델망대에서 북쪽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구주 그리스도의 탄생인 아기 예수)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①그리스도의 탄생, ②큰 기쁨의 좋은 소식, ③하나님께 영광 영접하는 자에게 평화)을 전하니, 18. 듣는 자(예수님의 부모와 축하객)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창37:11, 마리아는 이미 자신에게 준 천사장 가브리엘의 말이 사실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어 그것을 명심하게 됨, 눅1:26-38. 그리고 마리아가 훗날 예수의 동생들에게 전해준 것으로 보임. 그에 따라 동생들은 예수가 목수 요셉의 혈통이 아님을 알고서 그를 생전에 다윗의 후계자인 메시아로 여기지 아니한 것으로 보임, 요7:5).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21.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창17:12, 21:4, 약속의 아들 이삭과 마찬가지로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그때부터 예수로 부르게 됨),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눅1:31, 그 이름이 예수임)”(눅2:15-21);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heaven, 천국을 말함)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에델망대에서 북쪽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구주 그리스도의 탄생인 아기 예수)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①그리스도의 탄생, ②큰 기쁨의 좋은 소식, ③하나님께 영광 영접하는 자에게 평화)을 전하니”(눅2:15-17);
1) 천사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는 것을 창세기 제18장과 제19장에서 생생하게 엿볼 수가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2천사들과 함께, 16-17절)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본 즉, 사람 셋이(현신한 여호와와 2천사가)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창18:1-2), “1. 저녁 때에 그(마므레에서 소돔을 향하여 간, 창18:22) 2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한 2천사, 창18:1-2)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창19:1).
2) 인간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한 천사들은 여호와께서 맡긴 일을 마친 다음에는 즉시 보고 차 천국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천사들이 땅에 현신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천사들이 공중에서 에델망대의 목자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음성으로 전달한 것입니다. 그 일이 끝나자 그들은 즉시 천국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15a).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그리스도의 탄생을 확인하기 위하여 베들레헴 현지를 방문하고자 합니다(15b).
3) 베들레헴 성읍에 들어가서 목자들이 아기 그리스도를 예방하고 있는데 그 장소가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잣집 안방이나 좋은 객실이 아니라 외양간에 마련되어 있는 구유에 아기 그리스도가 강보에 싸여서 누워 있기 때문입니다(16절). 너무나 평화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들은 편하게 아기 예수님을 예방하고 그들이 천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목수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17절).
(2) “18. 듣는 자(예수님의 부모와 축하객)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창37:11, 마리아는 이미 자신에게 준 천사장 가브리엘의 말이 사실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어 그것을 명심하게 됨, 눅1:26-38. 그리고 마리아가 훗날 예수의 동생들에게 전해준 것으로 보임. 그에 따라 동생들은 예수가 목수 요셉의 혈통이 아님을 알고서 그를 생전에 다윗의 후계자인 메시아로 여기지 아니한 것으로 보임, 요7:5).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2:18-20);
1) 16절에 따르면 외양간에는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 있고 그 주위에는 부모인 목수 요셉과 마리아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목자들이 전해주고 있는 천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들이 전부 놀라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은 부모와 기타 방문객이 같은 장소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이상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2) 그것은 아무래도 기록자인 의사 누가가 그 장소를 방문한 자들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여백으로 남겨두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 같이 의사 누가가 현지를 방문하여 증언을 수집하고 기타 물증을 수집하여 정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체계적으로 기록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완벽한 기록이 결코 아닙니다.
3) 왜냐하면, 복음서는 어디까지나 특징적인 사건 중심의 서술이지 완전한 상황묘사와 모든 인물에 대한 완전한 기록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편하게 예방한 후에 그들이 들은 천사들의 말을 예수님의 부모에게 전해주고서 여호와의 은혜를 찬송하면서 에델망대로 되돌아가고 맙니다(20절).
4) 그런데 의붓아버지인 목수 요셉보다는 산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 대한 천사들의 증언을 더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19절). 그 이유는 아기를 잉태하고 10달간 복중에서 돌보아 마침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공로자가 바로 산모이기 때문입니다(창3:16).
5) 장남 예수를 생산한 다음에 비로소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합방을 하게 됩니다(마1:25 반대해석). 그 결과 많은 자녀를 얻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들만 하더라도 그 이름이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입니다(마13:55). 예수의 친동생인 그들 4명이야 말로 다윗대왕의 자손인 목수 요셉의 피를 이어받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6) 그들은 큰형 예수가 부친의 혈통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진작에 모친 마리아로부터 듣고서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19절). 그 이유는 백성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다윗의 혈통으로 오인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그렇게 믿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그들의 이종 사촌인 사도 요한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5. 이는 그 형제들(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5);
(3) “21.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창17:12, 21:4, 약속의 아들 이삭과 마찬가지로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그때부터 예수로 부르게 됨),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눅1:31, 그 이름이 예수임)”(눅2:21);
1) 천국에 보좌를 가지고 있는 독생자가 그 영광을 내려놓고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요컨대 창조주가 피조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종이며 동시에 유대교인의 한사람입니다. 그 옛날 약속의 아들 이삭이 부모에 의하여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것처럼 여호와의 종인 아기 예수 역시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됩니다(21a).
2) 목수 요셉과 마리아는 사내아기에게 할례를 행한 다음에 그 이름을 사람들에게 예수라고 소개합니다(21b). 의붓아버지 목수 요셉은 아내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전해준 천사장 가브리엘의 전언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장남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눅1:31, 2:21c).
3) 참고로 사도 마태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더욱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0-21).
4) 약간의 풀이를 해보자면, 목수 요셉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자신의 장남으로 삼은 것은 자신의 꿈속에서 천사가 전해준 여호와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목수 요셉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생물학적인 부친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믿음으로 말하자면, 목수 요셉은 인자(人子, son of man) 나사렛 예수의 세상적인 아버지로서 별로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에서 저자인 사도 마태는 동방박사 3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다윗의 별을 보고 그 인도함을 따라 멀리 유대 땅까지 찾아와서 아기 예수를 예방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1-12). 그와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저자인 의사 누가가 베들레헴 남부의 들판에서 밤새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음성을 듣고서 아기 예수를 찾아와서 예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2:8-20).
마태복음에서는 그 신분이 대단한 동방박사들, 헤롯대왕 등이 등장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 신분이 비천하다고 볼 수 있는 양치기들이 아기 예수의 예방과 관련하여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목자들에게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와 같이 기쁜 소식을 듣게 된 자들에게 평화라고 하는 천사들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목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구약에서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창세기에서는 여호와신앙을 이방지역에 전파하기 위하여 안정적인 고향의 농업을 떠나서 스스로 유목민이 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믿음의 조상들의 행적을 다시 눈여겨보게 됩니다.
더구나 출애굽기에서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던 모세, 그리고 역사서인 사무엘 상하에서는 부친의 양을 전심전력으로 돌보고 있던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고 그 길을 여호와신앙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되고 있음을 재삼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창세기 제49장에서는 이스라엘로 불리고 있는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 총리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보호하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목자의 은혜와 승리가 늘 함께하시기를 구체적으로 축복하고 있습니다(창49:23-25).
그 이유는 17세의 청소년 요셉이 억울하게 이복형들의 시기와 보복으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단에 노예로 팔려가지만 그가 애굽에서 여호와신앙인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실천하였기에 마침내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애굽제국의 총리가 되고 7년 연속 흉년으로부터 애굽백성은 물론 주변국의 백성까지 구하게 되는 위업을 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만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천상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아들로 성육신하시는 나사렛 예수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분이 바로 창세기 제49장에서 이스라엘이 시사하고 있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창49:24)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서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음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세상적인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고 비록 비천한 취급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주님의 제자인 목자로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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