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고냐(손진길 작성)

소설 여고냐8(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0. 4. 15. 05:27


소설 여고냐8(작성자; 손진길)


3. 여호야김왕의 통치와 세자 여고냐

 

세자 여고냐의 스승이 하달이다. 그는 지금 유다왕국 제1이다. 그리고 그의 학문의 수준도 대단하다. 그 이유는 천하의 기재인 하나니로부터 10년 동안이나 학문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과 무에 두루 뛰어난 하달로부터 학문과 무예를 배우고 있으니 세자 여고냐는 행운아인 것이다.

여고냐에게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오고 있다. 그것은 아나돗 출신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세자인 여고냐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처음 만난 장소가 외무대신 아히감의 저택이다.

여고냐는 스승 하달로부터 애굽 말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여고냐는 애굽제국메소포타미아의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자가 성군 요시야 시절부터 국제정세에 밝은 대신 아히감의 집안이다.

외무대신 아히감의 저택에는 많은 문객들과 재사들이 출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아스돗 출신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들어 있다(26:1, 24). 선지자 예레미야 역시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명망가인 사반 및 그 아들 아히감의 집과 친분이 있으며 또한 젊은 서기관 바룩의 부친인 네리야와도 친분이 있다(32:16).

어린 나이이지만 세자 여고냐가 아히감의 저택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만나고 당시 예레미야에게서 모세오경을 배우고 있는 청소년 바룩은 물론 그의 동생 스라야 그리고 아히감의 아들인 그다랴를 만나게 된다. 그들 3청소년은 외무대신 아히감에게서 바벨론의 말과 글까지 배우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학문이 높은 서기관 집안의 자제들인 청소년 미가야여후디도 만나게 된다. 그들 두 청년 역시 국제정세에 밝은 아히감의 제자들이다. 그들과 두루 사귀게 되자 여고냐의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 영적인 눈이 조금씩 뜨이고 있는 것이다.  

세자 여고냐의 부친인 여호야김왕과 왕비인 느후스다는 아들의 그러한 변화를 모르고 있다. 두사람은 일찍이 예루살렘의 왕자와 귀족의 딸로 성장하고 결혼하여 지금은 유다왕국의 왕과 왕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더구나 어린시절 선지자로부터 모세오경을 배우거나 국제정세에 밝은 대신의 제자로 살아본 경험이 없다.

그러므로 세자 여고냐를 선지자 예레미야나 외무대신 아히감에게 부탁하여 모세오경과 국제정세를 가르쳐 달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세자 여고냐가 스스로 그러한 취미가 있어서 자주 아히감의 저택을 방문하고 그 집에서 모세오경과 학문을 배우고 있는 10살 연상의 청소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특이한 사귐의 기회가 훗날 여고냐의 고달픈 인생에 큰 힘이 되고 있다. 그가 부친의 뒤를 이어 짧은 기간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왕이 되지만 불행하게도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오랜 세월 영어의 몸으로 지내게 된다. 그때 여호와신앙에 의지하여 그 험난한 세월을 버티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여고냐가 우연하게 접한 여호와신앙과 국제정세에 관한 지식이 훗날 고달픈 그의 인생에 그렇게 등불이 되는 줄 그가 미처 몰랐다. 더구나 여고냐가 37년간의 감옥생활을 하면서 마치 그 옛날 요셉처럼 여호와만을 의지하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자 작심한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석방이 되고 다윗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사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바벨론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7살에 불과한 세자 여고냐의 삶은 예루살렘 왕궁에서 부친인 국왕 여호야김에게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사부인 하달로부터 기초적인 학문과 애굽 말 그리고 무예를 배우고 있다. 그것은 친() 애굽적인 것이다.

그래서 여고냐는 외무대신 아히감의 저택을 자주 방문하여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제국에 관하여 배우고 있다. 여고냐는 이제 세상에는 애굽제국과 신바벨론제국이 있으며 그들이 패권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당금의 국제정세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인 여호야김왕은 그것이 아니다. 주전 609년에 유다왕국의 왕이 된 후부터 줄곧 애굽의 바로인 느고2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있다. 매년 조공을 착실하게 애굽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애굽제국의 군사력이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외교노선을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 세자 여고냐11세가 된 주전 605년에 외생적인 큰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여호야김왕이 유다왕국을 무난히 통치한지 4년이 지나자 갑자기 애굽의 군사들이 갈그미스와 시리아 땅에서 패전하여 나일강으로 전부 쫓겨가고 마는 큰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주전 605년에 신바벨론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느부갓네살이 대단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는 즉위하자 마자 메소포타미아 북부 하란으로 진격하여 과거 앗수르제국의 잔당들을 모조리 토벌하고 만다. 그 다음에는 그 서편에 있는 갈그미스 요새를 공격한다.

애굽의 바로인 느고2세가 서부 시리아를 다스리도록 갈그미스 요새에 30만명이나 되는 애굽의 정예병을 주둔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애굽의 군대가 느부갓네살 황제의 원정군 50만명을 당해내지 못하고 만다. 결국 그들은 갈그미스 요새를 버리고 해안길을 따라 애굽으로 후퇴하고 마는 것이다.

느부갓네살 황제는 단숨에 시리아 땅을 전부 정복하고 곧 남진한다. 사마리아까지 점령하고 이제는 유다왕국을 위협하고 있다. 그때까지 유다왕 여호야김은 어리석게도 애굽제국의 군사력만 믿고서 안보를 바로에게 전적으로 의존한채 자신의 왕국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여호야김왕은 신바벨론제국 느부갓네살 황제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길밖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보전하기 위하여 재빨리 말을 달려서 북쪽 국경으로 간다. 그리고 사마리아성을 방문하여 느부갓네살 황제에게 부디 살려 달라고 하소연을 한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황제가 통역을 통하여 여호야김왕에게 항복의 조건을 말하는데 그것이 영 이상하다; “다른 것은 필요가 없고 두가지만 하면 된다. 하나는, 이제부터 애굽의 바로를 섬기지 말고 짐의 신하가 되어 매년 조공을 바쳐라. 조공의 양은 애굽에 바친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 그것은 당연한 말씀이다.

 그 다음의 조건이 참으로 이상하다. 황제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귀족의 자제 가운데 가장 쓸 만한 인재를 골라서 20명만 바벨론성으로 보내라. 진짜 재능이 있는 인재인지를 짐이 바벨론 황궁에서 시험할 것이니 추호도 속임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알겠느냐?... ”.

신바벨론제국의 황제인 느부갓네살은 전쟁에만 능한 영웅이 아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속국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가 있는지를 알고 있는 소위 지략이 뛰어난 황제이다. 그는 한꺼번에 소국을 전부 무너뜨리고 황폐화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자면 자신의 군사도 많이 희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리하게도 느부갓네살은 두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첫째로, 일단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상대방을 항복하게 만든다. 그 다음에는 신하국으로 만들어 다른 나라를 치는데 군사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그대로 사용이 된 것이 8년 후인 주전 597년 유다왕국에 대한 대대적인 침입이다(왕하24:2).

둘째로, 귀족의 자제 가운데 뛰어난 자들을 바벨론으로 데리고 가서 친() 바벨론 인물로 만든다(1:3-4). 그들을 사용하여 속국을 영원히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군사적인 정복보다 더 효과적인 간접통치의 방법임을 느부갓네살이 벌써 알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성을 방문한 29세의 젊은 유다 왕 여호야김은 비슷한 연령의 느부갓네살 황제로부터 얼마나 심한 모욕을 당했는지 모른다. 자신도 일국의 왕인데 마치 적장을 대하듯이 한다. 머리를 9번이나 땅에 박도록 만든다. 그때마다 느부갓네살 황제 폐하, 만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게 한다.

만약 구호소리가 작으면 다시 시행하도록 한다. 따라서 9번의 절이 아니라 실제로는 12번 정도를 한 것이다. 그 결과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흐른다. 그것을 닦을 시간도 없다. 준엄한 느부갓네살 황제의 훈화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훈화가 끝나자 동시에 여호야김왕이 혼절하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느부갓네살 황제가 딱 한마디를 한다; “보아하니, 전장에서 전투를 한 경험이 전혀 없는 그저 귀하게 자란 왕자 출신의 국왕에 불과하다. 이 정도 혹독하게 다루었으니 절대로 짐을 배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잘 치료하여 예루살렘으로 곱게 돌려보내라”.

느부갓네살 황제의 판단이 정확하다. 피를 흘리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여호야김왕은 그저 황제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종에 불과하다. 귀족의 자제 가운데 영리하다고 알려진 자들을 골라서 20명이나 바벨론으로 보내고 만다. 그 가운데 다니엘과 그의 3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들어 있는 것이다(1:6).

여호야김왕은 애굽의 바로인 느고2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천하제일인 줄 알았더니 신바벨론에게 져서 나일강 유역에 처박혀 있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영구히 믿을 황제가 없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국제정세를 보고서 잘 선택하여 강한 쪽에 붙어야만 한다. 그것이 여호야김왕의 외교전략이다.

그런데 여호야김왕이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된다. 그가 주전 604, 603, 602년 그렇게 3해동안 바벨론으로 조공을 바치고 있는데 돌연 주전 601년에 들어서자 느부갓네살 황제가 다시 50만 대군을 이끌고 나일강으로 원정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실패이다. 

애굽의 군대가 사력을 다하여 나일강변을 사수한 것이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 황제가 아무런 소득이 없이  물러나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여호야김왕이 무릎을 치면서 말한다; “이제는 2마리의 사자가 서로 으르렁거리고 위협만 가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구나. 그러므로 어느 쪽에도 조공할 필요가 없다. 대신 그 재물로 나도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

여호야김왕이 주전 601년부터 유다왕국의 상비군을 4개 군단에서 8개 군단으로 늘린다. 따라서 정예병의 수가 96천명에서 두배인 192천명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성주들에게 별도로 지방의 예비군 8개 군단을 조직하라고 명령한다. 그 결과 유다왕국의 군사가 전부 40만명에 가까운 수가 되고 있다.

그러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세자인 여고냐의 나이가 어느덧 14세가 된다. 그러자 여호야김왕과 왕비 느후스다는 이제 세자빈을 간택하고자 한다. 과연 여고냐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찾아오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