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6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16. 17:11

창세기 제6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관계(6:1-2)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인의 족보와(4:16-24) 셋의 족보(4:25-5:32)입니다. 다 같은 아담부부의 자손들인데 창세기는 카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두 집안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대조하고 있습니다;

(1)  첫째,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인간을 창조했습니다(1:26-27). 그러나 아담의 아들들에게 그 형상과 모양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셋만이 아담의 형상을 닮아 있다고 창세기 제5장 제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형상은 셋의 가계를 통하여 유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타의 집안들은 모양은 사람이지만 하는 그들의 인생살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삶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2)  둘째, 카인은 유배를 가서 자신의 아성을 짓고 그 성을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불렀으며 자손들에게 대물림하고 있습니다(4:16-17). 그 반면에 셋은 아들 에노스를 낳고서 하나님 신앙을 대물림하고 있습니다(4:26). 한 마디로, 유한한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대물림하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3)  셋째, 카인의 후손은 이름과 직업만 열거가 되고 있습니다(4:18-22). 반면에 셋의 후손들은 자녀를 낳은 해와 그들의 향년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5:3-32). 특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에녹노아의 행적을 적고 있습니다(5:21-24, 6:8-10). 그러나 카인의 후손의 경우에는 5대째 라멕의 대에 오게 되면 죄악이 10배이상 증폭이 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일부일처제’(monogamy)의 심히 아름다운 전통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입니다(4:23-24).

위와 같은 차이 때문인지 창세기 제6장에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사람의 집안하나님의 집안의 구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카인의 후손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람의 집안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6:1-2).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을 파수하고 있는 셋의 후손을 하나님의 집안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6:2).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집안의 아들들이 타락을 하고 있습니다(6:2-7). 사람의 집안의 딸들이 너무 용모가 아름답게 태어나게 되자 그만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신앙보다는 여자의 외모의 아름다움에 끌리게 됩니다(8:1-2). 한 마디로,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사람의 모양을 더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힘과 권력이 있으면 일부일처제라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여러 여자를 아내로 삼기 시작합니다(2:20-25, 6:2). 이제는 결혼의 조건 가운데 하나님 신앙이라는 덕목이 사라지고 맙니다. 힘이 센 자는 아름다운 여자를 모두 차지합니다. 힘이 없는 자는 결혼도 할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요컨대 짐승의 사회와 같은 약탈식 결혼약육강식의 사회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 바 육신이 된 사회입니다. 영적인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혀 구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회를 떠나 버리시게 됩니다(6:3, 1:21-32).

하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28). 그들은 자신들이 인생의 주인이며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는 절대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6:5). 하나님 대신에 인간의 용맹함과 힘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힘이 센 거인 용사들 네피림이 존경의 대상이며 왕으로서 군림합니다(6:4). 그 네피림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만들어낸 세상의 치리자들입니다(6:4). 그들은 폭력을 조직화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힘이 약한 무죄한 자의 피가 땅을 적시게 됩니다. 동물들도 흉포화되고 맙니다(6:12-13). 온 세상이 흉악한 모습만 보이게 되고 맙니다. 더 이상 그와 같은 세상을 존재하게 할 실익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홍수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2.    육신적인 삶에 탐닉하는 인간들에게 임하는 심판의 내용에 대한 시사(6:3)

 

120년 후에 심판이 임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6:3). 그 내용은 묘하게도 또 하나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명이 보통 900년 이상(5:5, 8, 11)이었는데 그것을 120년 정도로 끌어내린다는 뜻이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가 있은 다음에 나타나는 신 인류의 수명을 보면, 노아의 향년이 950세인데 비해서 그 아들 셈이 600, 손자 아르박삿이 438, 증손자 셀라가 433세 등으로 그 수명이 줄어듭니다(9:29, 11:10-15). 마침내 9세손인 데라가 205세이고 10세손인 아브라함이 175세로 감소합니다(11:26, 32, 25:7).

드디어 창세기를 끝내면서 모세는 요셉의 향년이 110세라고(50:22)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자신의 향년이 120세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34:7).

그러므로 모세오경 가운데 창세기를 기록하고 있는 모세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홍수심판 후 새로운 인류의 수명이 자신처럼 120세로 감소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인류의 수명이 그렇게 많이 줄어들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홍수심판이라고 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지형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장대비만이 40일간 땅으로 쏟아진 것이 아닙니다(7:12). 70일 이상 해저지진이 발생을 하고 용암과 지하수가 동시에 땅 위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7:11, 24, 8:1-3). 그 결과 홍수 이전에는 완전한 평지였던 땅의 모습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해보아야 15규빗으로서 7미터 남짓했는데(7:20) 홍수 후에는 무려 해발 8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히말라야 산맥에 즐비하게 나타나고 가장 깊은 태평양 바다에는 해저 3천 미터나 되는 골짜기가 형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사해를 보더라도 해저 3백 미터가 넘는 골짜기입니다.

그렇게 높은 산과 낮은 골짜기를 바람이 지나갈 때에는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됩니다. 기상조건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일기의 변화가 극심해집니다. 무척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이 차례로 찾아옵니다. 그 영향으로 모든 생물들은 빠른 속도로 세포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 모든 세포의 수명이 단축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홍수심판의 결과 새로 생긴 땅에서는 먹거리가 줄어들고 수명이 줄어들며 사람들은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모진 환경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만은 여전히 해결해 주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2).

 

3.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6:5)

 

이 세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인간의 감각기능을 통하여 인지를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른 바 오감이라고 하는 것 곧 시각, 취각, 미각, 청각, 촉각 등으로 확인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오감에 의존하여 얻어진 정보를 두뇌가 종합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일단 그 실체가 확인이 되면 그 다음에는 머리에 저장이 되어 있는 과학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그 물체를 분류하고 그 운동의 양상까지 계산해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두뇌의 작용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에 속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고 있는 판단기능과 연산의 기능인데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적인 작용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두되 뿐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혼적인 작용에는 감정과 자유의지가 포함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따듯한 심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간의 감정과 정서도 그 존재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서 마치 그 추상적인 것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도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지만 인간의 오감과 판단기능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 soul)을 통제하고 있는 (, sprit)적인 차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적인 기능이 사람의 영혼 속 가장 깊숙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지성소와 성소의 구별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두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기에 하나로 합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합하여 하나의 성막이라고 부르듯이 영과 혼을 합하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의 존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 특히 그 영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나타나는 현상조차 마치 기적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11:1).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오늘 날도 말씀으로써 사람의 영과 혼과 육을 다스리고 있습니다(1:1-5, 4:12-13). 그리고 영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욥기와 주기도문이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들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 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1:8-1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9-10).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운 용모만을 보고서 그 육체를 탐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모두 아내로 삼고 있습니다. 여인의 속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내심과 성품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육신만을 탐하는 그들은 믿음의 길에서 이미 떠나게 된 자들입니다. 그 결과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죄악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마음 속 생각과 계획이 모두 악할 뿐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지켜 보시고 있습니다. 외모 뿐만 아니라 마음의 중심까지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에(삼상16:7)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은 절망적입니다. 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시고 전면적인 홍수심판으로 모두 쓸어 버리기로 결심하십니다(6:5-7).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절망으로 몰고 가고 있는 사람의 마음 속 생각과 계획의 악함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선하게 창조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찌하여 그러한 악의 화신으로 둔갑이 되고 만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서는 그 원인을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계획의 악함만 가지고서 모든 것의 근본원인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람의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본래 계획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구체화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 바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가장 깊숙한 것, 그 영적인 실체가 그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선한 영이라면 그 계획은 생명을 살리는 선한 것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악한 영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3:4, 12:30-31).

그렇다면 악한 영을 사람의 영성과 생각 그리고 마음에서 도려내는 대수술이 시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수술을 고려하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전면 심판하는 방향으로 결심을 굳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전면심판은 단 한번 노아의 홍수심판으로 끝납니다.

그 다음에는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둠으로써 자신에 대한 일종의 제어장치를 설치하고 있습니다(9:11-17). 그리고 악한 영을 도말함으로써 사람을 살려내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8:21, 2:23, 28).

그 실행이 약 2,500년 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으로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의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24:44-53, 2:5-11). 사탄의 머리를 깨뜨림으로써 악한 영들이 사람의 머리에 더 이상 악한 생각을 집어넣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3:15, 8:1-4).

그렇지만 그 도중에도 몇 번의 국지적인 심판이 역사 가운데 임하고 있습니다; 첫째,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임합니다(3:20). 둘째, 소돔과 고모라 등지에 불 심판이 임합니다(19:24-25). 셋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불신앙에 빠지자 모두 없애 버리려고 시도하십니다(32:10, 14:11-12).

그때마다 제한적인 징계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하는 백성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32:11-14, 14:19-25). 결국에는 그 걸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32:34, 11:29, 18:15, 18).

 

4.    창조주의 한탄과 근심, 그리고 모두 쓸어 버리기로 결심하심(6:6-7)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17:1). 후회, 한탄, 근심이라는 용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아니하시는 분이 바로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가 창세기에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5-7).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서 창조가 되어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 사람입니다(1:26). 그들만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구현할 수 있는 청지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생각과 행동이 패역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모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고 사탄의 화신인 뱀의 말을 더 신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속에 하나님처럼 전능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3:5-6).

만약에 그 욕망을 없애 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때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존엄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의지도 존엄성도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와 같은 로봇에게서 하나님이 무슨 찬양과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으며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때에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 수가 있습니다. 그 방법론을 마련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고민을 하시고 한탄도 하시고 근심도 하시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6:6).

그리고 전면적인 홍수심판이라고 하는 극약처방까지 동원이 되고 있습니다(6:7). 그렇지만 마침내 사람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론이 실행에 옮겨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독생자를 성육신시켜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 그 완전한 대속의 제사가 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1:12-14, 3:12-21). 그러한 맥락에서 그 구원의 길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라고 하겠습니다.

 

5.    노아의 가족만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는 이유와 예수님 일행(6:8-10)

 

홍수심판의 와중에서 노아의 가족만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는 이유를 모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Noah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among the people of his time, and he walked with God)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6:8-10).

풀이를 해보자면, 노아가 첫째, 의인이며 둘째 완전한 자이고 셋째, 하나님과 동행을 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 8명이 전부 방주를 타고서 구원함을 얻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6:18, 8:16). 그 점을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여기서 의인이라고 하는 말은 the righteous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때에 자신의 오른 쪽으로 분류를 하고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정확한 의미를 양과 염소의 비유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이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으로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25:31-37).

사도 바울 역시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서 의로움이 확정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랍비였던 시절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 복음은 유대교리와 선민사상을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의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사도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론은 선민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죄인인 이방인의 구원까지를 말하고 있습니다(2:38-42).

나아가서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을 했으며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까지 선전하고 있습니다(10:30, 2:32-36). 요컨대, 그것은 참담한 신성모독이라고 당시 사울은 판단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9:15-22).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고 인정하셨으므로 감히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이 그 하나님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바울은 로마서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둘째로,완전한 자라고 하는 뜻은 창세기 제17장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은 자신의 전능하심으로 사람의 인생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하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그 말씀대로 행동을 하면 완전한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황이 급해지고 여건이 여의치 아니하게 되면 사람들은 마치 그 옛날 사울 왕처럼 당황해 하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잡으려고 합니다(삼상13:8-14).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멀리 계시는듯하며 당장 해결을 해야만 하는 문제는 눈덩이처럼 크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힘있는 사람들에게 뛰어갑니다. 그 힘을 빌리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해결을 기다리고 있기에는 너무 사정이 급한 것입니다. 당장 사람들에게 사정을 하고 남의 힘을 꾸어 오게 되면 쉽게 문제가 해결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요? 당장의 문제는 해결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체질개선과 정상적인 해결방법이 아닌 것이기에 얼마 후에는 더 큰 문제가 발생을 하게 됩니다(12:45).

완전한 체질개선과 근본적인 해결책은 영생하시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상황이 급하고 사면초가(四面楚歌, 온 사방에 적군의 노래소리가 들림, 완전히 포위된 상태임)라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방법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14:13).

그때에는 자신을 추격해오던 원수들의 군대가 모두 수장(水葬, 물속에 장사를 지냄)되고 마는 현장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옛날 모세의 때처럼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제는 자신의 발로써 그 새로 생긴 마른 땅을 한걸음 씩 걸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사는 자가 구원을 받은 경우가 이미 있습니다. 에녹이 그러한 자였습니다. 그는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습니다(5:21-22). 365년간 하나님과 계속 동행을 하자 아예 그를 하나님이 휴거를 시켜주었습니다(5:23-24).

노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100년 이상이나 걸리는 대규모 방주건립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습니다(6:22). 사람들이 비웃거나 손가락질을 하여도 그는 개의치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는 것이 우선이지 사람들의 비웃음이 우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7:5).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사력(死力, 죽을 힘)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잠이 깨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데 하루 하루의 인생을 모두 바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행하는 자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임재를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가 바로 하나님 말씀의 화신(化神, avataara)인 것입니다. 그러한 뜻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10:34-38).

창조주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 독생자가 이 땅에 성육신을 했습니다(1:14).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12제자가 36개월간 동행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을 이며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0:35, 15:15).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이미 제자들에게 모두 전했으며 장차 진리의 성령님을 그들에게 보내어서 모든 말씀을 깨닫도록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동행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의 모습은 에녹이나 노아나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나 모두 동일합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대원칙이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그와 같은 하나님과의 동행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역사가 오늘 날에도 계속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6.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6:11)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2:7a). 그러자 사람이 그 생명의 기운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의식이 있는 존재가 되고 있습니다(2:7b). 그러나 그 육체적인 모집단이 흙이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면 더 이상 생명의 기운을 호흡할 수가 없게 되어 다시 분해가 되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3:19).

만약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더 이상 전파되어 오지를 아니한다면 그 육신적인 삶의 모습이나 결말은 동물의 상태와 별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되었으며 그 동안 하나님의 생기를 흡수하고 있었던 그 사람의 혼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차이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점을 지혜의 대왕인 솔로몬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19-21).

만약 인간이 짐승처럼 약육강식의 법칙 속에서 살게 되면 자신이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피를 땅에 많이 흘리게 됩니다. 그 약한 자의 억울한 피가 살아서 땅을 적시고 있습니다(4:10-12). 그러면 흙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이 그 피를 마시게 됩니다. 그 식물을 먹이로 삼고 있는 동물들이 인간의 피를 마시고 맙니다.

사람의 피의 맛을 보게 된 짐승들이 사람을 마구 공격하게 됩니다(9:4-6). 한 마디로, 온 세상이 흉포화되고 피바다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모세가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6:11-13).

한 마디로, 홍수심판 전의 인간사회와 동물의 사회, 그리고 생태계인 자연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표현이 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7.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6:14)

 

노아의 방주의 주 재료가 되고 있는 고페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에 관하여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합니다; 일반적으로 잣나무(‘사이프러스’) 계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40일간의 폭우 속에서 견디고 70일간이나 지속이 되는 지진과 지하수의 분출로부터 견디자면 잣나무 정도의 강도로써는 무리라고 판단이 됩니다. 따라서 그 보다 더 단단한 측백나무 계통으로 보기도 합니다.

일부에서는 지중해에서 가장 단단한 나무이며 방수효과마저 뛰어난 편백나무(junifer tree, 레바논과 헬몬 산에서 자라고 있음)로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방수제로 방주의 안팎에 역청을 칠했다는 모세의 기록에 힌트를 얻어서 고페르 나무가 일종의 강력한 인조 합판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주장은 합판을 뜻하는 히브리 용어의 발음이 고페르와 비슷하기에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잣나무이든지 측백나무이든지 상관이 없이 일단 얇은 판으로 만들어 여러 겹을 붙여서 합판을 만든 것으로 봅니다. 물론 합판을 만들 때에 얇은 판들 사이에 강력한 접착제와 함께 역청을 사용하여 방수의 효과를 극도로 높였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한번 시험을 해보고 싶을 정도로 재미가 있는 견해라고 하겠습니다.

역청을 방주의 안팎에 칠했다고 하는 것은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방수를 했다는 뜻입니다(6:14). 그런데 방주의 규모가 엄청납니다; “길이가 135미터 정도이며 높이가 13미터, 폭이 23미터 정도입니다”(6:15). 그렇다면 그 큰 배에 칠할 수 있는 많은 양의 역청을 어디에서 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노아가 살고 있는 지역에 석유의 매장량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방주를 건립한 장소는 산유국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의 부모가 아기 모세를 태우기 위하여 갈대상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방수를 위하여 밖에는 역청을 칠하고 안에는 나무의 진을 칠하고 있습니다”(2:3). 물론 역청이 인체에 좋지 못하기에 사람에게 친화력이 있는 방수제로 송진 같은 나무의 진액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애굽제국의 동북면 고센 지역에서는 석유가 부족하여 나무의 진액으로 대신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고센 지역은 오늘 날 이집트 나라의 동북면입니다. 이집트는 석유가 매우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고대의 문건이지만 구약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거대한 규모입니다. 그 큰 배가 엄청난 폭우 속에서도 깨어지지 아니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결합력을 높여야만 합니다. 배 내부에 세로로 기둥을 많이 세우고 가로로 여러 층으로 구분하여 마루를 깔아야만 합니다. 그 작업을 하나님이 노아에게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partition)들을 막고”(6:14)라고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칸들은 배의 결합력(일종의 binding energy)을 높일 뿐만 아니라 훗날 수 많은 동물들을 태울 때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6:19-20). 그리고 많은 먹거리인 식물들도 구별하여 싣기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6:21). 하여튼 노아의 방주는 여러 가지로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노아의 방주를 보면 하나님의 정확하시고 치밀하신 지혜가 번뜩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8.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가 300규빗, 너비는 50규빗, 높이는 30규빗이라(6:15)

 

방주의 규모가 실로 엄청납니다; “길이가 약 135미터, 높이가 13.5미터, 폭이 23미터 정도입니다(6:15). 그리고 방주의 3분의 1이 물속에 잠긴다고 하더라도 물위에 삼층 높이의 건물이 세워지게 됩니다. 상중하 삼층에는 각각 위에서 1규빗 아래에 옆으로 창들을 내고 문들도 옆으로 내고 있습니다(6:16)”.

여기서  1규빗이라고 하는 길이의 단위는 고대 사람들의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길이를 대략 45센티미터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규빗은 구약성경의 원문인 히브리어가 아닙니다.

히브리 원어는암마’(ammah)입니다. ‘암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고대어의 하나인 아카드어 아마투’(ammatu)에서 온 것으로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규빗팔꿈치를 의미하고 있는 라틴어큐비툼’(cubitum)에서 따온 말입니다.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히브리어암마는 라틴어규빗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영어성경에서 그대로 규빗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헬라어로 직접 기록이 된 신약성경을 보면 규빗은 헬라어로 페이콘’(πηχων)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21:17);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라틴어 규빗이 아니라 헬라어 단어인 페이콘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1규빗은 정확하게 어느 정도일까요?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 길이는 대략 45센티미터입니다. 그 이유는 실로암 비문에 히스기야 왕의 도수(導水, 물을 끌어옴) 터널(tunnel)의 길이가 1,200규빗으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길이를 측정해본 결과 533.1미터였습니다. 그러므로 1규빗  44.425cm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사용한 1규빗의 길이는 바벨론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대략 45cm 내외를 1규빗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성막 및 성전의 규모를 말하면서 그 길이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5-27, 왕상6-7, 대하3-4). 결론적으로, ‘1규빗을 약 45센티미터 또는 18인치 정도로 보면, 방주는 길이가 약 135미터, 폭이 23미터, 높이가 약 13.5미터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의 다른 견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라가슈의 제사왕 구데아(Gudea, 주전 2000년경) 의상에 새겨진 척도표에 따르면, 1규빗은 지금 단위로 약 49.5cm입니다. 그것은 보통의 규빗인데, 왕실에서 사용하는 규빗은 그보다 큰 55cm였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약 50.3센티미터에 해당하는왕실에서만 사용하는 규빗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척도표에서도 한 규빗은 45cm, 왕실 규빗은 55cm였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애굽 사람들은 약 67.5센티미터와 44.7센티미터에 해당하는 긴 규빗과 작은 규빗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일반 규빗과 왕실 규빗을 다르게 적용했던 것처럼 에스겔 선지자도 장대 규빗(long cubits)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장대 규빗은 보통의 규빗에 한 손바닥을 더한 것입니다. 즉 에스겔은 일곱 손바닥의 규빗을 쓰고 있습니다( 40:5). 이스라엘에서도 바벨론, 애굽과 마찬가지로 장ㆍ단의 규빗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 규빗은 45cm이고 장 규빗은 52cm로서, 애굽의 그것에 근접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이상의 내용은 창조신학연구소의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의 치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노아가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치수를 정하여 방주를 짓게 되면, 홍수심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방주를 건립했을 경우에만 40일간의 폭우와 70일간의 지진과 지하수의 분출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은 한국의 창조과학회의 실험결과에서도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선박의 설계도를 주전 25세기 노아의 시대에 벌써 하나님께서 밝혀 두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러므로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 하나님 경외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는 솔로몬 왕의 기록(1:7, 9:10)이 진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9.    홍수심판으로 죽는 것과 죽지 아니하는 것, 그 구분의 의미(6:17-20)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동물을 크게 보아 세 가지로 창조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새의 종류입니다. 둘째는 육지를 달릴 수 있는 땅의 동물들입니다. 셋째는 물 속에서 살 수 있는 물고기 종류입니다”. 그 가운데 홍수심판으로 멸절이 되고 있는 것은 새와 땅의 짐승들입니다.

150일 동안 물이 온 땅을 뒤덮어버리자 땅 위의 짐승들이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죽고 맙니다(7:24, 8:3-4). 새들도 발을 디딜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오직 아가미로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물고기 종류들만이 생존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멸종을 당하게 되는 사람과 동물들의 종자를 보존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 8명과 동물들의 극소수를 선별하여 종류별로 방주에 태우게 됩니다(6:18-19). 암수를 짝을 이루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새 종류는 7쌍씩 방주로 나아오게 합니다(7:3). 땅의 동물들은 정결한 종자는 7쌍씩, 부정한 종자는 2쌍씩 역시 방주로 찾아오도록 만들고 있습니다(7:2). 그것들을 노아가 방주 내 여러 칸에 구분하여 싣고 있습니다(6:14-16, 19-20). 그 동물들의 사료도 함께 여러 칸에 적재하고 있는 것입니다(6:21)”.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온 세상에 대한 전면심판이라고 하더라도 종자의 보전에 신경을 쓰시고 있습니다(6:18-20). 그리고 땅이 흉포화된 것이지 바다가 부패한 것은 아닙니다. 물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미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것이 물이라고 창세기가 기록하고 있습니다(1:2).

땅은 그 물을 빗물로 받아 들일 때에 부드러운 흙’(top soil)으로 변합니다. 그 부드러워진 흙이 비로서 공기를 통하게 하고 땅속에서 물을 통하여 양분을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부드러워진 흙이 식물을 자라나게 할 수 있는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생명을 얻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씨앗 역시 그와 같이 부드러워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13:23). 하나님의 나라가 그 온유한 마음 속에 임하는 것입니다(17:21).

 

10.  식물성만 먹고 살게 되는 방주의 동물들이 의미하고 있는 것(6:21-22)

 

노아의 방주 내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방주가 튼튼하게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홍수심판을 완전히 견디기에는 부족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하늘에서는 마치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처럼 장대비가 40일간이나 쏟아지고 있습니다. 해저에서는 지진이 발생을 하고 지하수가 70일간이나 분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심한 지각변동과 해일을 나무로 만든 배가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아의 방주가 깨어지지 아니하고 무사하게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동물들은 그러한 천재지변을 만나게 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미쳐 날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잡아 죽이지도 아니하고 그 세상이 뒤집히는 스트레스의 현장에서 식물성 사료만 먹고서 평온하게 지낼 수가 있었을까요?

그 유일한 설명은 이 세상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의 역사가 방주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방주를 안전하게 지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 내의 동물들의 삶을 그 옛날 에덴동산 낙원에서의 생활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원의 회복은 이미 노아의 방주 내에서 실현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놀라운 구원의 능력으로 성도들과 교회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옛날 에덴동산과 노아의 방주 내에서 이루어진 그와 같은 꿈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것임을 주전 70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6-9).

할렐루야!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때부터 벌써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천국의 모습처럼 놀라운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바라보게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