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4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15. 08:00

창세기 제4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임신하는 고통과 생육 및 번성의 축복과의 관계(1:27-28, 3:16, 4:1-2)

 

임신하는 고통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생육과 번성의 축복이 먼저일까요? 창세기 제1장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먼저 복을 주고 있습니다(1:27-28). 그 다음 제3장에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은 여자에게 하나님은 그 처벌의 일환으로 임신의 고통을 크게 더하고 있습니다(3:16).

그러므로 임신의 고통보다는 자녀생산의 축복이 본래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애초부터 생육과 번성의 복을 주고자 하는데 그 과정에 있어서 임신하는 고통이 뒤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마치 고난을 통과한 다음에 영광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8:17-18).

그런데 인간의 잘못과 실수 때문에 임신의 고통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아담부부가 하나님의 청지기로 분수를 지키고 사명에 충실했으면 고통은 그리 크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이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망각하고 그만 욕심이 컸습니다. 감히 피조물인 처지에 하나님만큼 큰 지혜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능력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지위를 탐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이 더해진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하와를 불쌍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임신과 해산의 고통을 훨씬 뛰어넘는 큰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16:21).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유추가 됩니다; 첫째, 복잡하고 다양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어느 한 쪽에만 전부 담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기에 하나님도 복수로 기술이 되고 있을 정도입니다(1:26). 둘째, 생육과 번성의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남자와 여자로 만든 것입니다.

생육과 번성이 복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더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창조가 처음에는 단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창조로 보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유전자가 결합을 이루어 나갈 때에 폭발적인 조합의 다양성이 나타납니다.  

후대로 갈수록 엄청난 차이가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차이의 발생은 마치 이진법을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와 같습니다. 오늘날 컴퓨터가 단지 이진법만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용량의 정보를 그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잡하고 다양한 온갖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의 유전자에 나누어서 담기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도 오늘 날 인류의 생육과 번성을 통하여 수십 억 개의 특징과 개성으로 분화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육과 번성을 위하여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 복을 얻고 성취하는 과정에 있어서 크나큰 고통이 따르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는 하와가 임신의 고통과 해산의 위기를 넘겨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고통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낳자마자 하와가 다음과 같이 자신의 하나님 신앙을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4:1). 그 뜻은 인류의 번영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하와의 건강을 돌보아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임신과 해산의 고통 가운데에서도 산모를 건강하게 지켜 주셨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죄를 범하고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나서 살고 있지만 아담과 하와의 하나님 신앙은 더 깊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애굽 땅에 노예로 끌려가서 비로서 철이 들고 있는 요셉과 같습니다.

 

2.    직업의 분화와 문명의 발달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2:10-15, 20, 3:21, 4:2)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두 가지 종류의 청지기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첫째, 땅에서 식물을 경작합니다(2:15). 둘째,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돌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농사를 지으면서 동시에 목축업을 경영하고 있는 것입니다(2:19-20).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아담부부에게 가죽 옷을 지어서 입혀 주시는 것을 보면, 가축을 치면서 아담부부가 옷감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3:21). 아담부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두 아들을 낳게 됩니다. 카인과 아벨입니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배운 그대로 농사꾼이 되고 목축업자가 됩니다. 카인이 농업을 경영하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고 있습니다(4:2). 그렇게 직업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직업의 분화와 더불어 고대문명의 발생도 모두 에덴동산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에덴동산에서 큰 강 네 개가 발원(發源)을 하고 있습니다(2:10). 동산 바깥으로 강물이 흘러 나가면서 세상의 문명이 발생합니다; 첫째, 비손 강은 금속문화를 일으킵니다(2:11-12). 둘째, 기흔 강은 북()아프리카에 농업을 발전시킵니다(2:13). 셋째, 힛데겔과 유브라데 강은 농업과 상업 그리고 공업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일으킵니다(2:14).

가장 오래된 최상의 문화와 문명이 큰 두 강이 만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고대문명이 발생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농업과 목축업 교육만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교육까지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1:26).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의 원리와 지혜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능력을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자신들의 달란트로 세상에 문명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25:15).

 

 

3.    제사를 드리는 마음의 자세는 어떠하여야 하는가?(4:3-6)

 

아담부부가 에덴동산 바깥에서 얻은 두 아들의 이름이 카인과 아벨입니다(4:1-2). 그들은 세월이 지난 후에 장성하게 되자 자신들의 직업을 가지게 됩니다(4:2-3). 카인은 농사꾼이 되고 아벨은 목축을 하게 됩니다(4:2). 각각 소득을 얻게 되자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그들이 제물을 드리는 이유는 한마디로, “하나님이 내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8:18)는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그들의 어머니인 하와의 신앙고백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4:1).

아담부부의 하나님신앙이 자식들에게 대물림이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과 실천은 훗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를 했을 때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 족보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대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이 등장하여 그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아브라함에게 깨닫게 해줍니다(14:18-20, 7:1-4).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드리고 있습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14:20).

그러므로 제물을 드리는 마음가짐은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전리품도 얻게 해주셨기에 모두를 드릴 수는 없고 10분의 1이나마 드린다고 하는 겸손함입니다.

과연 그 마음 속 겸손함과 깨달음이 제대로 대물림이 되고 있을까요? 그러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모세가 적고 있습니다; “자신의 제물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 주시면 별문제가 없지만 그러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 속마음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인이 하나님의 처사가 못마땅하여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4:4-5의역).

그것은 자신이 준 제물을 왜 감히 감지덕지하며 받지 않느냐는 항의의 뜻입니다. 불만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습니다. ‘감히 내가 준 선물을 퇴짜를 놓다니, 괘씸하기가 그지없다는 사고방식이 카인의 속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인 자신과 동격으로 보거나 아니면 아래로 깔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만입니다. 그리고 패역함입니다. 하와의 죄성이 그대로 카인에게 유전이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더 큰 죄악이 발생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엄중하게 경고하기를 시작하시고 있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4:6).

 

4.    카인의 잘못은 어떠한 죄악으로 치닫고 있는가?(4:5-10)

 

첫째로, 카인의 잘못의 시작은 이미 살펴본 그대로 유전적인 교만함입니다. 그런데 그 교만함이 윗대보다 더한 것입니다. 어머니 하와의 경우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낸 세월이 오랩니다. 그래서 아담부부와 하나님 사이는 무척 친합니다. 너무 친하다가 보니까 그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금단의 열매를 하나 따먹어도 너그럽게 양해를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인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난 후에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밀함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우신 심판주이며 동시에 창조주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카인의 경우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교만함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라고 속이는 마음, 그것이 교만의 본질이며 사탄이 주고 있는 마음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위신을 여지없이 깎아 내리고 자신을 창조주의 위치에 세우고자 하는 반역의 마음가짐입니다.

그 점을 아시고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 사탄이 인간에게 교만한 마음을 주고 죄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서슴지 아니하고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1:14). 그리하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1:15). 한 마디로 정리를 하자면, 죄와 사망은 사탄의 권세입니다(8:2). 사탄이 죄를 가지고 카인을 죽음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서 하나님이 카인에게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자신의 마음을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만을 욕심으로 그리고 반역의 죄악으로 키워 나가고자 하는 사탄의 흉계를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그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카인이 완전범죄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아우 아벨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다고 하면서 넓은 들판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곳에서 기습적으로 동생을 단단한 농기구로 쳐죽입니다(4:8).

시신을 흔적도 없이 땅 속에 파묻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시침을 떼고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완전범죄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아벨과 카인의 주위를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카인은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그가 모르고 있습니다(4:24, 11:1). 근본적으로, 몸은 시공간에 갇혀 있지만 영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갇혀 있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의식을 못해서 그렇지 영은 모든 시공간에 동시에 항상 존재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깨달음 그대로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 그 사실을 모르고서 아벨의 소재를 물으시는 하나님에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뻔뻔하게 거짓보고를 하고 있는 카인의 모습이 보기에 심히 딱하다고 하겠습니다(4:9).

셋째로, 하나님의 물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살해당한 현장에서 흘린 아벨의 피가 살아서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4:10). 더구나 그 무죄한 자의 피를 받아 마시게 된 땅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4:11). 그것은 받아 마셔서는 아니 되는 피입니다. 무죄한 자의 억울한 피를 마시게 되면 땅은 황폐화됩니다.

나아가서 그 피의 양이 많아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저주하시고 심판을 행하십니다(6:11-13, 15:16, 왕하21:11-13). 그래서 땅이 카인의 살인행위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인이 생각하고 있는 그와 같은 완전범죄는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은 24시간 피조세계를 돌보고 계십니다(1:1-2). 그러므로 카인의 모든 행적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더구나 그 마음 속까지 통찰하고 계십니다(4:11-13). 그런데 왜 카인의 범죄에 대하여 미리 예방조치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왜 억울하게 아벨이 희생되는 현장을 지켜 보고만 계셨던 것일까요?

미리 카인에게 경고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조치로 보입니다. 별로 실효성도 없으며 강제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카인이 자신의 마음 속 욕심과 죄의 소원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살해하는 최초의 사람이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그 모든 사실은 한 가지의 결론으로 치닫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선의 형상이 악의 욕심을 이길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생명을 죽이는 역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를 회수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선과 악 가운데 어느 것이든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고귀한 자유의지를 인정해줌으로써 사람이 짐승과 다르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부인하거나 하나님께 반납하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영원히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의 소멸입니다. 그리고 죽음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완전한 사망입니다”.

 

5.    살인자와 땅과의 적대관계(4:11-12)

 

피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9:4).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기에 사람의 피를 흘리면 하나님께서 처벌을 하십니다(9:5-6). 그런 줄도 모르고 카인이 그만 동생 아벨을 암살하고 그 피를 땅에 흘리게 됩니다(4:8). 그러자 무죄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4:10). 그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도 덩 달아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땅은 무죄한 자의 피를 마시기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인이 살인을 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땅이 아벨의 피를 받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땅은 무죄한 자의 피를 받아 마셨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어 황폐화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4:10-12 의역).

한마디로, 피조물인 땅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되지만 카인같이 악한 자가 나타나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되는 불이익이 있습니다(8:19-22). 그러므로 땅은 죄악을 범하는 카인과는 적대관계에 서게 됩니다. 카인의 범죄로 말미암아 무죄한 자의 피가 땅을 적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이 저주를 받게 되어 황폐화됩니다. 그에 따라 땅은 카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카인은 농사꾼입니다. 그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경작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토지는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더 무성해지고 땅의 협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급격하게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 점을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1-12).

척박한 산지에서 떠돌이 농사를 짓고 있는 유민(流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약탈식 농업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소위 화전민(火田民)들입니다.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가 타고 나면 그 재를 가지고 농사를 짓습니다. 재가 일종의 거름이 되어 땅의 힘이 약간 생기기에 얼른 옥수수나 감자 등의 구황(救荒, 흉년을 견디는 것, 또는 가뭄이 든 밭에 심을 수 있는 것)작목을 심습니다.

그 다음에는 황폐화되는 그 땅을 떠나서 또 다른 곳에 화전을 일구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약탈식 떠돌이 농사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인죄를 저질러서 땅과 적대관계를 가지게 된 카인의 운명이 되고 맙니다.

 

6.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면 어떠한 일이 발생하는가(4:13-14)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는 두 가지의 큰 유익이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그 코로 받아 마실 수가 있습니다(2:7). 아담부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거할 때에 그들은 영생의 존재가 부럽지 아니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니 생명의 기운이 늘 그들에게 전이가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2)  둘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를 이 세상에서 해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뒷배만 봐준다고 하더라도 이방의 황제조차 겁을 집어 먹습니다. 블레셋의 황제 아비멜렉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멀리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맺고 80년 후에는 이삭과도 동일한 조약을 맺습니다(21:22-24, 26:26-31). 그 이유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1:22, 26:28). 잘못 대접하게 되면 그들의 땅에 큰 재앙이 발생을 합니다(20:7, 26: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호의를 베풀고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카인이 가끔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자신을 낳았을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4:1).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께서 비록 카인의 성의가 없는 제물에 대하여 퇴짜를 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끔 대화를 하고서 살았습니다(4:6).

그렇지만 이제는 더 먼 곳으로 귀양을 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4:12). 하나님 없이 비우호적인 땅에서 삶을 영위하도록 쫓겨나는 것입니다. 앞일이 걱정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방호막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서 제멋대로 살고 있는 흉악한 자들이 유민처럼 떠돌고 있는 동방 땅으로 유배를 가야만 하는데 목숨이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4:13-14).

그래서 하나님이 카인에게 안전장치 하나를 마련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카인에게 표를 주사(Then the Lord put a mark on Cain),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4:15).

하나님께서 카인에게 주신 (a mark)가 과연 무엇일까요? 카인의 얼굴이나 이마에 붙여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신적인 능력이 일부 나타나는 장치인지도 모릅니다. 신의 위력이 일부 나타나기에 보통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훗날 위험한 이방지역 땅에 살게 된 카인이 그곳에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자신의 아성(亞城)을 마련한 것을 보면, 그는 전쟁의 기술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인 능력을 일부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4:16-17). 요컨대, 그것은 무력적인 신위였을 것입니다. 정복자의 능력을 일부 주신 것으로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7.    카인이 건설한 에녹의 성’(4:16-17)

 

카인이 떠돌이들과 유목민들이 사는 땅 에서 자신의 성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의 이름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 에녹’(Enoch)입니다(4:17). 왜 카인은 자신의 이름 카인’(Cain)으로 그 성을 부르고 있지 아니할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카인이 에덴의 동쪽 그 먼 곳 이방인들의 땅 에서 자기 세력을 이루고 성을 마련할 때까지 긴 세월이 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랜 투쟁의 역사 가운데 비로서 자신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성을 마련하였지만 이미 자신이 늙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늙은 자신의 이름보다는 젊은 힘을 지니고 있는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그 성을 부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을 아들에게 상속해주었습니다.

(2)  둘째,에녹이라는 아들의 이름자 속에 카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이 생겼습니다. 카인은에녹’(Enoch)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회고를 해보면, 카인 자신이 어머니 하와에게서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아들이라는 놀라운 부모님의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4:1). 그러나 정작 카인 자신의 인생은 그와 같은 찬양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생으로 살아오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만은 좋은 것으로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 이름자가 바로 에녹입니다. 카인은 그 좋은 이름으로 자신이 건설한 성이 불려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들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생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처럼 형제를 죽이고 유배를 떠나는 인생이 되지 아니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그 성의 이름자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을 모르고 살고 있는 유민들의 땅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에녹의 성이 서게 된 것입니다(4:16-17).

참고로, ‘카인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고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카인은 직업이 농업입니다. 그는 농사꾼입니다. 정착식 농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떠돌이 생활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또 다른 의미는 창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마엘이나 에서와 같은 들 사람에게 어울리는 뜻입니다(16:12, 25:27, 27:40).

왜 그와 같은 반대의 뜻이 드러나고 있을까요? 카인의 생애를 참고해야 합니다. 카인은 그만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먼 이방 땅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유목민이 아닙니다. 목축을 할 줄도 모릅니다. 이제는 꼼짝 없이 굶어서 죽거나 아니면 이방사람들에게 맞아서 죽을 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디 살려달라고 매어 달렸습니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살인죄를 저지른 카인에게도 살 길을 하나 열어 주셨습니다. 떠돌이 생활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창을 잘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카인이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뜻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해치고자 접근하는 자들을 먼 발치에서 모두 척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싸우고 또 싸워서 드디어 하나의 성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8.    세상문명의 발달과 그 가운데 남아 있는 하나님 신앙(4:17-22)

 

카인의 아들인 에녹의 자손에 대하여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4:18). 카인의 5대손이 라멕입니다.

그 사이에 카인의 아들 에녹, 손자 이랏, 증손자 므후야엘, 고손자 므드사엘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름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가지고 그들의 생애를 유추를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에녹의 이름자는 봉헌이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므흐야엘이나 므드사엘은 그 이름자가 로 끝나고 있습니다. 고대 중동의 땅에서 은 신이나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로 끝나는 그들의 이름은 조상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도록 소망하면서 붙여준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살인자 카인의 후손이라고 하여 모두가 악한 자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교육을 받은 자들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엿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카인의 5대손인 라멕의 대에 오게 되면 획기적인 변화 두 가지가 발생합니다; ①첫째, 그는 일부일처제가 아니고 일부이처제를 선택한 첫 번째 사람으로 성경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두 아내의 이름이 아다씰라입니다(4:19). 둘째, 두 아내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 새로운 문명의 주인공들이 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두 아내가 경쟁을 하더니 그들의 소생들이 뚝뚝 떨어져서 살면서 각각 다른 직업군(職業群)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분화된 직업의 탄생이면서 동시에 다음과 같이 문명의 발달로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 첫째 부인 아다의 소생 야발이 기업적인 목축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4:20).

(2)  둘째, 야발의 동생 유발이 음악을 발전시키고 수금과 퉁소를 연주하는 자들의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4:21).

(3)  셋째, 둘째 부인 씰라의 소생인 두발가인이 대장장이가 됩니다(4:22a). 그는 청동기와 철기를 사용하여 기구를 만들었습니다(4:22b).

(4)  넷째, 그의 여동생 나아마의 이름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등재가 되고 있습니다(4:22c). 동일한 이름이 욥기에 등장합니다.

  욥의 세 친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아마사람 소발입니다(2:11). 그는 동방의 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와 세상의 이치를 아는 자입니다. 한 마디로, 소발 역시 욥처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카인의 자손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 신앙의 모습이 남아 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가 되고 있는 이름이 나아마라고 하겠습니다.

 

9.    카인의 5대손 라멕의 시대상과 죄악의 증폭(4:23-24)

 

카인의 5대손인 라멕이 두 아내를 불러 놓고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카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77배이리로다 하였더라”(4:23-24).

하나님신앙을 가지고 있는 아담부부에 비하여 놋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그 죄악이 훨씬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카인을 해치는 자에게는 7배의 보복을 하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4:15). 그런데 5대손인 라멕의 시대가 되면 그 보복이 77배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11배나 더 흉폭한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작은 분규가 전투로, 그리고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 모습을 라멕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내게 상처를 입히는 자를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고 아예 죽여버렸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도 내게 상처를 입히는 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그 병사(여기서는 소년으로 표현되고 있음) 역시 죽여버렸다”(4:23).

결론적으로,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죄악상이 더욱 증폭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십 배의 보복이 없으면 아니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입니다. 오늘 날 남북한의 관계와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10.  카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이 주신 다른 씨 ’(4:25)

 

아담은 아내 하와에게서 세 번째 아들을 얻게 됩니다(4:25a). 아담은 그 이름을 ’(Seth)이라고 짓고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내게 카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입니다(4:25b). 여기서 생각을 깊이 해보아야만 하는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로, 왜 둘째 아벨이 죽고 다른 아들 셋을 얻게 되었다고 아담이 그렇게나 기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아벨이 죽고 이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여전히 가득합니다. 오죽하면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그 가슴 속에 묻고 지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아들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고 하여 그 진한 슬픔과 그리움을 그렇게 금방 씻어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그 깊은 연유가 무엇일까요? 욥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욥의 열 자녀가 같은 날 집이 무너져서 모두 죽게 됩니다(1:18-19). 그리고 나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욥의 신원이 회복됩니다.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42:10). 그렇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자녀 열명을 주는데 그칩니다(42:13)”.

2배의 축복이라면 스무 명의 자녀를 주셔야만 되는데 열명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흔히 세상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고 나면 그만이며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12:26-27).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자들이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 자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열조들이 모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아벨도 천국에 있으며 욥의 열 자녀도 천국에서 살아 있습니다.

다시 열 명의 자녀를 더 주셨으니 훗날 천국에서 욥은 스무 명의 자녀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2배의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동일한 계산법이 창세기에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아담부부는 을 얻고서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벨도 천국에서 살아 있고 또 이 세상에서 아들 하나를 더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의 의미가 각별합니다. 그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씨를 주셔야 아담부부가 자녀를 생산할 수가 있다고 하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남자에게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씨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부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자녀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씨를 주실 때에 비로서 이 세상에 자녀가 탄생을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고 있다는 정확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오늘 날 생물학적인 지식과 의학적인 상식에 젖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크게 경종을 울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고 인간은 그 생명이 이 땅에 오는데 사용되고 있는 일종의 통로가 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모세의 다음 지적이 옳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20).

히브리서의 저자는 열조가 얻고자 한 그 땅이 사실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천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셋째로,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은 대안을 주셨다는 뜻과 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신입니다. 다른 대안을 얼마든지 창조하여 사람들에게 주실 수가 있는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새로운 구원과 생명의 길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65:17, 3:14-15).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 앞에서는 절망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종교탄압으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와 제사장이 자신만 남기고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모두 사라진 줄로 생각을 했습니다(왕상19:10). 그래서 남쪽 유다 왕국으로 도망을 했습니다.

가나안 남부의 변경인 브엘세바에 이르고 있습니다(왕상19:3). 그때 절망에 빠진 엘리야가 간구하고 있습니다. 부디 자신의 생명을 걷어가 달라고 말합니다(왕상19:4). 하나님 신앙이 조국에서 사라졌는데 자기 혼자서만 투쟁을 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너무나 무시하고 있는 성급한 판단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엘리야에게 식물을 주고 그를 일으켜 세워 계속 남행하게 하여 드디어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인도합니다(왕상19:8). 그곳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곧 바알 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아니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7천명을 이스라엘 땅에 남겨놓을 생각이라고 말씀하십니다(왕상19:18).

그러자 엘리야는 비로서 깨닫게 됩니다. 대안을 마련하고 계시는 한없이 크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의 좁은 안목과 자신의 입장에만 갇히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안을 가지고 있는 광대하신 창조주입니다”. 엘리야가 그와 같은 사실을 똑똑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 참으로 겸손한 엘리야의 인생이 전개되고 마침내 회오리 바람 속에서 불 말과 불 마차를 타고서 승천을 하게 됩니다(왕하2:11). 한 마디로, 독생자의 성육신, 대속의 십자가, 부활과 승천, 성령님의 강림과 각 개인별 임재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구원과 영생의 대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1.  셋의 아들 에노스의 의미와 그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이유(4:26-5:3)

 

에노스’(Enosh)의 의미는 약한 자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한 마디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mortal body)를 가진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신의 운명과 처지를 깨닫게 된 사람이 셋입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부르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신앙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셋과 에노스의 가계를 통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이 대물림이 되고 있습니다(4:26). 그 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서서히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5:3). 반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점을 모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5:1-2).

어느 사이에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제1장 제26절과 제28절 사이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했는데 제5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오직 셋의 자손에게만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신앙을 대물림한 의인의 가계가 하나님의 형상을 보전하고 있으며 그 가계가 바로 셋의 가문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6장에서는 그 셋의 가계를 하나님의 집안으로, 나아가서 카인과 땅의 사람들 및 그 후손들을 사람들의 집안으로 구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