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2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12. 17:31

창세기 제2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창세기 제1장의 인류의 창조와 제2장의 아담의 창조와의 차이는 무엇인가?(1:26-31, 2:4-8, 15-17)

 

창세기 제1장의 내용을 제2장에서는 단 한 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2:1). 그 다음에 제1장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2).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를 6일동안에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만물이 창조의 질서에 맞게 제대로 운영이 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마무리하시고 편히 쉬시는 날이 일곱째 날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안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2-3). 하나님도 안식을 원하고 있습니다. 안식을 즐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의 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2:3).

왜 안식의 날 제7일이 그토록 복되고 거룩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이 함께 거처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에덴동산에서 함께 동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 신앙이 특출한 자를 선발하여 거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선발된 자가 청지기 교육을 제대로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주인의 뜻대로 천지만물을 잘 운영하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을 살리는 복이 온 우주에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창조물들이 설계도대로 제대로 작동이 되고 있는 것을 점검하고 그들이 상부상조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돌보며 경영하고 있는 청지기를 바라보는 창조주의 마음은 흡족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안심하고 편히 쉬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청지기들이 주인에게 운영의 결과를 보고할 것입니다. 마치 전문경영인을 내세운 기업의 오너와 같습니다. 그래서 안식을 할 수 있는 일곱째 날이 참으로 복되고 좋은 날입니다.

따지고 보면, 창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정상적인 운영이 더 중요한 법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의 건물만 거창하고 아름답게 지어 놓으면 무엇을 합니까? 그 건물은 자신을 보람 있게 사용하고 제 값어치를 발휘하게 해주는 운영이 있을 때 비로서 빛이 나는 법입니다.

영국에서는 옛날 사치스러운 귀족들의 대저택이나 궁전이 오늘 날 다른 용도로 많이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토지생산에 의존하고 있던 귀족들이 자본주의 산업시대가 도래하자 그만 상대적으로 소득이 줄어들어서 그들의 궁궐과 같은 대저택을 계속 보유하고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서구의 웅장한 예배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건물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분을 하고 있습니다. 팔린 후에는 회교사원이 되든지 술집이 되든지 상관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남의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인 성도들도 대형교회로 성장하기 위하여 큰 건물만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서구의 전철을 밟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6일까지의 창조가 결코 사역의 마무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과 거룩하심을 성도들이 받아서 누리며 이 땅 모든 피조물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안식일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8:19-21). 어떻게 경영을 할 것인지? 어떻게 창조의 목적대로 사용할 것인지? 그 과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컴퓨터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하드웨어가 중요하지만 나중에는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해지는 법입니다. 그 점을 이미 알고 계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이 가장 중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3).  

여섯째 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땅 위에서 번성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땅을 다스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막상 창조를 한 순간에는 심히 좋은세상이었습니다(1:31).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제대로 발휘하여 만물의 관리자인 청지기의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따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불러서 새로이 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2:8). 교육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먹도록 허용한 과일만을 따먹고 먹지 말라고 금지한 과일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아니하면 되는 것입니다”(2:9, 15-17).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기거를 하고 있습니다. 강의 발원지가 되고 있는 그곳에서 과수원지기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2:10-15).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까지 돌보고 있습니다(2:9, 16-17).

그런데 가장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나무의 과일이 선악과입니다(3:5-6). 자꾸만 눈이 갑니다. 그래도 참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거를 하자면 창조주의 말씀을 지켜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일하게 주인과 종의 구분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법도(法度)입니다.

그 경계선을 범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의 천사장이었던 루시엘이 그 경계선을 침범했습니다(14:12-14). 그래서 천상에서 내쫓기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14:15-17). 아담이 사탄의 전철을 밟지 아니하면 됩니다. 그것이 청지기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철칙입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검토해보면 창세기 제1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처음의 인류는 모두 타락한 존재로 보입니다(1:26-30). 오직 아담만이 마치 노아의 방주와 같은 에덴동산으로 옮겨져서 청지기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2:7-8). 그렇다고 구 인류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4:14). 에덴동산 가까운 곳에서 더 먼 곳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 카인이 사람들에게 맞아 죽지나 않을까 겁을 집어먹고 있습니다(3:24, 4:12).

에덴의 동쪽 그 먼 곳 땅에는 수많은 () 인류의 자손들이 아직도 남아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4:16). 그렇지만 그들은 족보도 이름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기억에서 잊혀져 버린 존재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경영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6:1-3).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종으로서의 법도를 어겼기 때문입니다(26:4-5, 왕상9:6-9).

 

1-1.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라면 여덟째 날은 왜 없는가?(2:1-3)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경영을 청지기에게 맡기고 안식하고 계십니다. 그 날이 일곱째 날입니다. 그렇다면 여덟째 날은 없는 것일까요? 그 날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창조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과 사도 베드로의 글, 그리고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그리고 새로운 예루살렘의 창조가 다음과 같이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

(1)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65:17-18)“,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66:22).

(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것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

(3)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1-2).

여덟째 날 대신에 새로운 첫째 날이 다시 시작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재창조까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모태에서 태어난 자가 물과 성령으로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중생의 은혜도 존재하는 것입니다(3:3-12). 구체적으로, 인생 가운데 새로운 운명도 창조하시며, 고대사회와 같은 서열이 엄격한 사회에서 둘째가 첫째가 되는 변화의 역사도 창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25:23).

그러므로 이미 굳어진 틀을 보고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짐을 바라보고 사는 믿음의 삶이 훨씬 역동적인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창조적이며 생명력이 넘치는 새로운 인생을 주님 안에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2.    생기(生氣, 생명의 기운)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2:7)

 

사람은 코로 숨을 쉽니다. 숨은 기체의 흐름입니다. 그 기체는 피에 실려서 온몸을 돌고 있습니다. 그것을 세포가 받아들여서 양분을 태움으로써 생체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육신적인 삶입니다. 그와 같은 신진대사의 활동은 모든 생물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특이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soul)이 되니라”(2:7). 하나님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기에 사람이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환언하면,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영원한 생명도 창조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전도서의 표현과 선지자 에스겔의 표현이 이해가 됩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1),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37:10).

자연환경이 줄 수 없는 생명의 기운을 창조주가 사람의 코에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러자 육신의 활동이 아니라 새로운 활동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혼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갑자기 ,,(知情意, intelligence, emotion, free will)라는 세 가지 기능이 작동하게 됩니다;

(1) 첫째, 학습을 통하여 지식을 축적하기를 시작합니다. 냉철하게 정보를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지식체계를 활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행동방향을 결정함으로써 본능적인 행동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두뇌활동이 왕성해진 결과입니다.

(2) 둘째, 감정을 마음 속 깊이 느낍니다. 그것을 절제하고 순화를 시킵니다. 예술행위가 가능해지며 때로는 상대방을 감동시키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은 감수성이 예민해진 결과입니다.

(3) 셋째, 이념과 사상이 형성됩니다. 간혹 이데올로기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본능적인 삶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보다 가치가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모든 ()적인 활동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인간에게 주입됨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대언합니다. 뼈에 힘줄과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이며 몸을 형성합니다(37:7-8). 그 다음에 생기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자 곧 살아나서 극히 큰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37:9-10). 그것이 생기의 힘입니다.

그런데 원시적인 정령신앙에서는 그 생기가 자연에 공기로 또는 바람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들은 오늘 날에도 서로 만나게 되면 코를 마주 비비면서 키아 오라라고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생명의 기운이 상대방에게 들어가기를 바라고 함께 생명의 기운을 공유하면서 살자는 뜻입니다.

그 의식을 바라보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코를 마주 대시고서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면서 키아 오라라고 외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상상을 하게 됩니다.

 

2-1. 들에는 초목이, 밭에는 채소가, 그 경작의 의미(2:5-6, 15)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육지를 창조하시고 땅은 식물을 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붉은 땅이 갑자기 푸른 대지로 바뀌었습니다(1:12). 그렇지만 풀과 채소와 유실수가 서로 제멋대로 뒤엉켜 있는 상태입니다. 누가 그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정돈을 할 수가 있을까요? 한 마디로, 경작인이 필요합니다.

경작인을 양성하자면 교육이 필요합니다. 지식도 필요하고 문명의 도구도 사용을 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그 교육의 장소가 에덴 동산이고 교육을 받고 있는 자가 아담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세계 4대문명을 건설하게 해줄 물줄기가 흘러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연을 가꾸고 돌볼 수 있는 경작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1)  첫째,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2:5b). 들과 밭으로 구획정리를 하고 들에는 유실수와 풀이 자라도록 하고 밭에는 채소를 심고 가꾸며 잡초를 뽑아줄 수 있는 경작인이 필요하다는 표현입니다.

(2)  둘째,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2:5a),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2:6). 안개와 이슬만으로도 식물이 자라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성하게 자랄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적절한 시기에 비가 내려야만 합니다. 경작인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게 해주셨기에 에덴동산에서부터 강물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2:10).

(3)  셋째,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마치 에덴동산처럼 만들어주겠다는 표현이 나중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11:14).

 

2-2. 강의 발원지가 되고 있는 에덴동산의 위치와 4대강 유역문화의 특징(2:10-14)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중력의 법칙을 만드셨기 때문에 위치에너지가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게 됩니다(1:9).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위치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세계 4대강의 동시 발원지이면서 가장 높은 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지금부터 그 위치를 찾아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쉽게 발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에덴동산의 유일한 출입구가 동문인데 그 길이 봉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회전하는 화염 칼을 배치하여 그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3:23-24).

고대의 4대 문명은 강의 하류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비손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둘러서 흐르고 있습니다. 홍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라비아 서해안과 아프리카의 동해안으로 보입니다(2:11). 그 지역의 특징은 귀금속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금과 진주 그리고 호마노 등입니다.

(2)  둘째, 기혼 강은 이디오피아 내륙지방 구스에서부터 이집트로 흘러가는 나일 강으로 보입니다(2:13).

(3)  셋째넷째 강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수렴이 되고 있는 두 강입니다. 오늘 날의 명칭으로는 유프라테스와 티크리스입니다. 그 강의 이름을 모세는 유브라데와 힛데겔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앗수르 강 상류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를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2:14).

역사적으로, 고대 4대문명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기술은 이스라엘 중심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근동 지역의 강들 만이 언급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3. 금제의 두 나무를 동산의 중앙에 배치하고 있는 이유(2:9, 16-17)

 

정부종합청사 정문 앞에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누구나 한국사람이라면 국기에 경의를 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심이 되는 상징의 조작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청지기 경작인의 교육의 전당이 에덴 동산입니다. 그 가장 중심에 두 그루의 유실수가 심겨져 있습니다(2: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의 나무입니다. 그 두 그루의 나무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둘째, 지혜로써 심판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그루의 나무를 쳐다보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며 지혜를 가르쳐 주시는 스승이시며 심판주라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계속적으로 새겨 나가야만 합니다.

동시에 자신은 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에덴동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동산 가장 중앙에 가장 높은 위치에 그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서 직분을 맡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사무엘 선지자는 두 번이나 왕이 될 자에게 기름을 부은 자입니다. 첫 번째는 용력이 출중해 보이는 사울을 하나님의 명으로 선택을 했습니다(삼상10:21, 24). 사울 왕은 외적을 막아내는데 있어서 유용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인기를 얻게 되자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두 번째 왕을 선택할 때에는 용력 대신에 그 마음의 중심을 보고 있습니다(삼상16:7). 그 마음의 중심이 여기서는 에덴의 중앙입니다.

 

2-4.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 주고 있는 애완동물들(2:18-20)

 

동물들 가운데는 유독 사람을 주인으로 알고서 잘 따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축들은 사람과 같은 방에서 기거를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따로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완동물은 마치 동무처럼 방을 같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가까이에 있으면서 주인을 따르고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어 줍니다(2:18-20).

그들 대부분은 성격이 온순합니다. 체온도 따뜻합니다. 마치 따뜻한 피가 통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하자가 있습니다. 사람과 같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판단능력이 한참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동물과 함께 친구가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지낼 수가 있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무인 사람이 가까이에 없을 경우에는 애완동물이라도 키우면서 외로움을 달래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현상이 현대사회에서도 흔합니다.

동무는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지냅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만들어준 마치 장난감과 같은 애완동물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동무 삼아 지내고 있습니다(2:19-20). 한동안은 만족을 합니다.

그러나 장난감이 싫어지는 아이와 같이 그만 실증을 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완동물 다음에 하와를 창조하여 평생의 반려자로 삼게 합니다. 비로서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가정이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2:21-25).

이상의 내용에 비추어 보게 되면 두 가지의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아담과 애완동물들은 서로가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를 나눈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에덴동산에서는 서로가 말이 통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자 그때부터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말이 소통이 되지 아니하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더 좋은 예는 뱀과 하와가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3:1-5).

(2)  둘째, 사람과 애완동물은 사귐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애완동물은 완전한 반려자가 아닙니다. 결코 사람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가 없듯이 그 차이는 엄연한 것입니다.

 

2-5. 복합영농의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는 제2장 제20

 

하나님은 애완동물로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담이 그들을 동무로 여기고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이름이 그들 종족의 이름이 되었습니다(2:19). ‘라고 부르게 되면 의 종족이 되고, ‘고양이라고 부르면 훗날 고양이종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동물 이름 짓기 놀이는 애완동물의 정도에서 끝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에게 종족의 이름을 붙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2:20).

모든 동물에게 종족의 이름을 지어주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뜻은 많은 동물을 가축으로 삼아서 축산업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의 첫 번째 직업은 땅을 경작하는 농사꾼입니다(2:5, 15). 그런데 아담은 목축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합영농이 에덴동산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훗날 아담부부가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는 직업적으로 보자면, 세상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3:23). 그래서 그런지 그의 후손 가운데서 맏아들 카인은 농사꾼이고 둘째인 아벨은 양을 치는 목축업자가 되고 있습니다(4:2).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3.    결혼의 영적인 의미

 

인간은 천지자연과 동물들에 둘러싸여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적인 허전함과 혼적인 공허함을 달래어주고 함께 인생을 살아줄 존재는 과연 그 가운데 무엇일까요? 2장 제18절에서부터 제25절까지가 그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의 가까이에 애완동물을 두고서 동무로 삼아 인생을 살아가도 그 결핍증은 사라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2:18-20). 그러므로 사람의 갈증은 사람으로 채워 주어야만 합니다(2:21-22). 그것도 함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물려받고 있는 나머지 반쪽으로 말미암아 해갈이 가능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의 뼈를 하나 꺼내어서 그것을 소재로 하여 하와라고 하는 특별한 여자를 창조하십니다(2:21-22a, 3:20). 그 손을 이끌어서 아담에게 아내로 맞이하도록 데려다 줍니다(2:22b). 그러자 아담의 놀라운 사랑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23).

 그와 같은 사랑의 고백으로 하나가 되는 부부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영육간의 화합을 이루고 새 시대를 열어갈 수가 있다는 선언입니다(2:24). 나아가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아니한 가정을 꾸밀 수가 있다는 결론을 모세가 내리고 있습니다(2:25).

다시 정리를 해보자면, 하나님께서 남자인 아담의 욕구를 아시고서 특별하게 그 골격을 채워주도록 창조하신 하와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의 손을 이끌어서 하나님이 직접 아담에게 데려다 줍니다. 그리고 결혼제도를 통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 영적인 의미는 아담의 영혼이 육체와 더불어서 만족을 얻고 완전함을 얻도록 가정을 세워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가정생활을 영위해 나갑니다. 마침내 그 가정에 영적인 충만함과 사회적으로 부끄럽지 아니한 만족감과 완전함이 깃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24-25).

그렇다면 결혼제도에 있어서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인식은 다음 4가지입니다;

(1)  첫째, 내게 아내로 주신 하와라는 여자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맞춤형으로 창조하여 준 여자라는 인식입니다.

(2)  둘째, 그녀의 손을 잡아서 나의 신부로 맞이하도록 인도해주신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인식입니다.

(3)  셋째,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의 고백을 통하여 한 몸이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 그리고 육신에 불과한 애완동물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이하게 흙으로 빚어진 육체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살아있는 사람, 곧 영혼육이 모두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와 똑같은 존재를 만났을 때 비로서 완전한 만족감을 얻을 수가 있다는 인식입니다.

(4)  넷째, 창세기는 일부일처’(一夫一妻, one husband and one wife)라는 결혼제도(monogamy)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해주시는 혼인 제도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을 설명할 때에 특징적으로 일부이처라는 제도 또는 약탈형식의 일부다처제도’(polygamy)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5)  구체적으로 라멕의 경우와 홍수심판 전의 영적으로 문란한 세상사람들의 상황이 그러합니다(4:19, 23, 6:2-7). 그 가운데 창세기는 의인인 노아 한 사람만은 한 사람의 아내와 살고 있음을 인상 깊게 보여주고 있습니다(6:8-9). 얼마나 그 사실이 중요한지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서 은근하게 강조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6:18, 7:7, 13, 8:16, 18).

창세기 제1장을 끝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의 결과에 대해서 매우 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그렇지만 제2장에 들어와서는 다른 스토리가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는데 에덴동산에서는 남자인 아담만을 선택하여 청지기의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1:27, 2:8, 15, 18-19).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절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물려받은 인간 역시 완전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아담의 경우에는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무언가 비어 있고 불안한 것입니다. 그 부분을 채워주고자 나중에 특별한 여자의 창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따라서 단수인 남자나 여자 한쪽에게 모든 형상과 모양을 담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정리를 해보자면,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합쳐 놓았을 때 비로소 완전한 인생이 전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2장 말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4-25).

좋은 사례로서 그와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창세기 제24장 말미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24:67).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랑의 얼굴을 보지도 아니한 채 멀리 북부 시리아에서 남쪽 가나안으로 시집을 온 처녀가 리브가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그녀를 아내로 삼고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의 가정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뒤를 잇게 되는 새로운 세대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는 약속의 가정입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은 어떠하든지 간에 성도들, 곧 영적인 장자들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창세기 제2장과 제24장의 가정을 꾸미고 지켜 나감으로써 이 땅 위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축복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