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3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13. 17:30

창세기 제3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뱀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탄의 특징(3:1-5)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동물들이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동무처럼 사이 좋게 지내고 있습니다(2:18-20). 훗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에서도 동일한 모습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11:5-6), “ 거룩한 모든 곳에서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9).

아담부부와 동무가 되고 있는 동물들 가운데 뱀이 있습니다. 사탄은 뱀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과 이간을 시키려고 획책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뱀을 선택한 이유는 가지로 보입니다;

(1)   첫째, 뱀은 성품이 간교하기 때문입니다(3:1). 그것은 사탄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강자에 대해서는 간사합니다. 비위를 맞춥니다. 그렇지만 속마음은 교활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거꾸러뜨리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점을 이사야 선지자가 지적하고 있습니다(14:12-20).

(2)   둘째, 뱀이 아담부부와 친하기 때문입니다. 동무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틈을 노리기에 적합합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그리스도 예수의 발꿈치를 물기 위하여 사탄은 스승의 신임이 두터운 가룟 유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3:15, 13:18, 27). 오늘 날도 사탄은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가장 당사자와 가까운 사이에 있는 자를 이용하는 책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뱀의 가운데 사탄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뱀은 아담부부 앞에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의도와 말씀에 대하여 가장 정통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게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분별할 있는 신적인 능력을 얻게 것이기에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단의 열매로 분류하고 있다 자신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3:4-5).

그러므로 열매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말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3:22a). 그러나 열매를 따먹는 사람은 반드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생명나무의 과일을 동시에 따먹는 것입니다(3:22b). 그렇게 되면 아담부부와 자손들은 가운데 영생을 누리게 되는 저주스러운 존재가 되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3:24).

창조주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게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방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이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를 의인으로 만든 다음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그리스도의 제자로 한평생 살아가게 함으로써 영생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4:17, 3:14-17).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성화를 이룬 성도들을 주님께서는 부활시키고 천국으로 인도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고 영생을 누리도록 만들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22:28-30, 28:18-20, 21:27-22:5). 내용이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뱀을 통하여 아담부부에게 결코 죽지 않게 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렇게 진리와 비진리를 적절하게 혼합을 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을 하면서 사람들의 욕심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술책을 구사하는 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사탄의 화신들입니다. 거짓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1-1.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뱀의 질문의 의미와 노림수(3:3-6)

 

에덴동산에는 적어도 수천 그루의 유실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운데 동산의 중앙에 오직 그루의 나무의 열매만이 금단의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있는 사탄이 아담부부의 동무인 뱀을 통하여 참으로 교묘하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냐?”(3:1) 질문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질문입니다. 평소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아담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일을 알고 있는 뱀이 전혀 모르는 것처럼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침을 떼고서 하고 있는 질문 속에 일종의 저의가 담겨 있습니다.

저의는 가지 생각을 아담부부에게 주입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첫째, 뱀의 질문에 답을 하다가 보면 동산의 유실수는 먹을 있는 것과 먹을 없는 것으로 다시 구분이 됩니다. 먹을 있는 것보다는 먹을 없는 것에 대한 관심이 다시 촉발됩니다. 그것이 이슈화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이슈로서 끄집어내고자 하는 사탄의 획책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2)   둘째, 사람이란 먹을 있도록 허용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먹지 말라고 금지한 것에 대하여 미련이 크며 억울해 하는 심성의 소유자인데 사탄은 교묘하게도 심리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1)      비록 하나님께서 아담부부에게 수백 가지 종류의 유실수를 먹도록 허용했을지라도 2종류의 유실수를 먹는 것으로 규정을 했기 때문에 그들 부부는 마치 모든 유실수를 먹게 것과 같은 억울한 심정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래서 하나님의 처사가 원망스러워집니다. 은근히 반감이 생깁니다. 먹을 있는 명분이나 방법이 있다면 한번 맛을 보고 싶어집니다. 그와 같은 아담부부의 심리를 사탄이 너무나 알고 있으며 가장 효율적으로 악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무서운 사탄의 책략입니다.  

 

1-2.            아담부부는 진리와 ()진리를 교묘하게 구사하는 사탄의 전략에 말려들고 있는가?

 

사탄의 말에 인간의 욕심이 충동을 받고 있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한다고 사탄이 뱀을 통하여 거짓정보를 흘리고 있습니다(3:4). 오히려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구별하고 지혜를 얻어서 재판관이 있다고 합니다(3:5).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관이 수가 있다고 하니 피조물의 입장에서 그보다 행운이 없을 것입니다. 피조물을 창조주의 위치로 끌어올려줄 것인가? 그와 같은 엄청난 효능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금단의 열매로 분류를 하신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번 격발이 의심과 욕심은 이제 듣고 싶은 만을 듣고, 보고 싶은 만을 보는 것으로 낙착이 되고 있습니다. 표현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여자가 나무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만큼 탐스럽기도 나무인지라, 여자가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3:6).

장로 야고보가 정답을 너무나 정리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사람을 낳느니라”(1:14-15).

 

1-3.            사탄의 화신인 뱀의 말을 따른 결과 나타나는 번째 현상은 무엇인가?(3:7)

 

뱀의 말을 듣고 욕심에 이끌리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는 갑자기 자신들의 몸이 벗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3:7a). 그래서 본능적으로 무화과 나무의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 있습니다(3:7b).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5) 묘사가 되고 있는데 갑자기 수치를 느끼고 치부를 가리기에 급급합니다. 그와 같은 현상이 가장 먼저 발생하고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지혜에는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창조력을 가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둘째, 세상적인 사람의 지혜입니다. 차이는 창조주의 지혜와 피조물의 지혜라는 엄청난 차이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을 돌보고 살리며 영적인 안목을 가지게 해줍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사람의 지혜는 자기 중심적이며 육신적인 안목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욕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갑자기 자신의 아내이지만 육신에서 정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당황하여 급히 무화과 나무의 잎으로 가리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 안에서 아담과 하와는 가정을 이룬 최초의 인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버지이시며 중매쟁이였습니다. 창조주와 함께 살고 있었기에 생명의 영적인 기운을 항상 받고서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은연중에 아담부부의 안목이 되고 있었다고 있습니다. 따라서 벌거벗었으나 세상적인 정욕으로 바라보지 아니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욕심과 정욕이 발동하는 육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영이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 죄인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홍수심판 직전의 인류의 모습이 점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6:3).

 

2.      그들이 바람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3:8a)

 

에덴동산에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소리를 듣자 아담부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차를 하시는 알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바람이 ,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3:8a)라고 표현이 되어 있기에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비단결 같은 바람이 불고 있으니까 바람도 쏘일 하나님께서 나들이에 나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깊이 생각을 해보면, 다른 사실을 하나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차를 하실 때에는 바람이 동행을 하고 있음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왕상19:1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사람도 그러하니라”(3:8).

요컨대, 에덴동산에 갑자기 바람이 분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차를 하신다는 신호입니다. 아담부부가 얼른 사실을 알아채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찾아오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때에 아담 부부는 생명의 기운이 왕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으로 반갑고도 기쁜 일입니다.

 

2-1.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3:8b)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담부부는 얼른 나무 사이에 숨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재미있게 숨바꼭질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족처럼 여기고 있는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고 있는 장면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모습입니다.

() 것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것만 같은 앞에서는 되도록 눈을 피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이 되는 상대방 앞에서는 시침을 떼고서 없이 뻔뻔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에 너무 익숙해지는 경우에는 그만 후안무치(厚顔無恥, 얼굴피부가 두꺼워지고 수치를 모르게 되는 ) 되고 맙니다. 누구 앞에서나 뻔뻔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까지 무시합니다. 그리고 잘못 만든 책임을 오히려 묻고자 합니다. 그토록 기가 막히는 일이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죄인들의 마지막 항변에도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창조주의 책임을 지시고자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대속의 사건의 의미입니다; “창조주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는 독생자를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파송을 하고 있습니다(1:1-4, 14). 비천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게 합니다. 인간 사이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성장을 하면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험합니다(4:15). 그리고 창조주를 원망하는 죄인들의 소리를 모두 듣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처지에 대하여 눈물을 흘립니다(11:35).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스승을 배신하는 베드로의 모습까지 긍휼의 눈으로 쳐다보십니다(22:61). 결과 그들의 모든 죄를 청산하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고 맙니다(23:42-43). 창조주가 사람을 잘못 만든 책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지신 것입니다(2:5-8)”.

그러므로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이상 창조주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킬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이제부터는 사람들이 변명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자살을 시도하더라도 자신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를 깨워서 심판의 자리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5:29).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이상 창조주의 책임을 운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가 세상에 이후에 발생하게 되는 가장 변화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주님이 오신 이전, 주전’(主前, Before Christ) 이후인 주후’(主後, After Christ)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시대는 인간에게 모든 책임이 넘어온 시대가 되었으므로 그때부터 종말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한번이라도 듣게 되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도 종말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법은 개인에게 도달된 시점부터 발효가 되고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 변명도 윤회의 법칙도 통하지가 아니합니다. 자신이 복음을 들은 인생이 마지막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바람이 때에 이상 비겁하게 나무 뒤로 숨지를 말고 똑바로 걸어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최우선으로 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주님의 의견을 말씀 가운데서 먼저 찾아보고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주인의 뜻대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하는 각오를 밝혀야만 합니다. 그리고 결심대로 실천을 때에 다시 하나님의 생기를 영원히 공급받을 있는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2:7, 30:19-20, 20:22, 2:1-4, 22:1-5).

그와 같은 구원과 영생의 길을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을 모두 구원하시고 싶어서 친절에 친절을 더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50:20, 1:14-18). 애타는 마음에 이제는 각자가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야만 때입니다.

 

3.      아담부부의 잘못에 대한 진단

 

에덴동산에서 아담부부는 바람이 부는 날이면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나서 함께 대화를 나누던 사이입니다. 마치 가족과 같은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을 있는 하나님을 피하고 있습니다(2:7, 3:8).

그러므로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찾고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9). 나무 사이에 숨어서 아담이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0).

마디로, 아담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 육체적인 생각에 빠지고 있습니다. 나무 뒤에 숨으면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게 된다고 하는 물리적인 사고방식이 이제는 아담부부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은 모든 것을 투시합니다. 옷을 입고 있든지 벗고 있든지 그것이 장애물이 되지를 못합니다. 나무 사이에 숨는다고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창조가 되었습니다(1:26-27).

특히, 아담부부는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서 에덴동산에서 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하나님과 친밀하며 가족과 같은 사이입니다(2:7-8, 20-25). 그런데 아담부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3:10). 그만 영적인 눈이 멀어버리고 육신적인 정욕이 작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한한 육체적인 존재가 되어 하나님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금방 알아채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중하게 확인의 수순에 들어갑니다. 그것이 진단입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3:11).

위와 같은 사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발생한 번째 문제입니다. 아담부부가 하나님의 생기를 이상 코에 받아 넣을 없도록 선악과가 작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디로, 그들의 영적인 삶에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여기서 선악과의 성분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성경에 기록이 없는 이상 무리하게 유추를 필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하와의 생각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2:17, 3:3). 사탄의 말을 듣고서 그만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제멋대로 믿은 것입니다(3:4, 6). 그래서 선악과를 겁도 없이 따먹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2)   둘째,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선과 악에 대하여 판정을 있는 만물의 심판자가 되고 싶었습니다(3:5-6).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있습니다. 창조주만이 심판주이십니다. 피조물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구분을 뛰어넘고자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신분의 변화를 원할 같으면 하나님의 뜻을 묻고 먼저 허락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절차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지 않는다고 사람이 먼저 생각을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평소 아담부부는 하나님께서 선악과와 생명의 나무의 열매를 금단의 열매로 규정을 하셨는지 이유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답을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서 얻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사탄의 화신인 뱀의 말을 듣고서 얻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입니다.

뱀의 말과 해석이 달콤하다고 하여 아담부부가 말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욱 신뢰하고자 하는 , 그것이 죄가 되고 있습니다.

환언하자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려는 사탄의 화신인 뱀의 말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담부부의 잘못이며 모든 비극의 시작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종인 아담부부가 그만 청지기로 교육을 받고 있던 중에 자신들의 의심과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사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약간 다른 각도에서 아담부부의 잘못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아담부부는 자신들의 판단을 절대시하고 있습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아니하고 있다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독자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다음 가지로 보입니다;

(1)   첫째,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선악과를 금단의 열매로 정하고 있다는 사탄의 말을 듣고서 말이 옳다고 스스로 판단을 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자신이 창조주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조치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것입니다. 감히 피조물의 좁은 소견을 가지고 함부로 창조주의 광대하심과 높으심을 무시하고서 속단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은 피조물의 생각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생각은 창조주의 생각입니다(55:8-9). 하나님의 높고도 넓으신 생각은 과연 무엇일까요?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 말씀의 주관자이신(11:27, 1:1) 그리스도 예수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것이요, 또한 그보다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니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0-17).

마디로, 창조주께서는 영생하는 자신의 영까지 사람의 영혼 속에 내주시켜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아담부부는 점을 깨닫지를 못하고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판단해버리는 과오를 저지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을 회복하는 길은 먼저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 영생의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창조주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전문가가 따로 있는데 비전문가이며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하려고 합니까?

인생을 창조한 주인이 따로 있는데 마치 자신이 주인인양 모든 것을 책임을 지려고 합니까? 분수를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경망한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는 것이 마디로 라고 정의할 있을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진단에 따른 처방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3:11)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아담이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 잘못의 근본원인을 발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질문을 하셨는데 아담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아내의 잘못이라고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여자를 자신에게 아내로 데려다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디로, 적반하장(賊反荷杖, 도적이 도망을 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인을 도적으로 몰면서 몽둥이를 들고서 공격하는 )입니다.

아담의 외로운 처지를 동정하여 하나님이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창조하여 아내로 삼아 주었더니 아담이 자신의 책임을 면하고자 지극히 배은망덕(背恩忘德, 은혜를 배반하고 베푼 덕을 잊어버리는 )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2:20-25, 3:12).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그를 돕고 있습니다(1:26). 그러나 아담은 영혼의 소리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당장의 책임추궁을 면하고자 약은 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남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고 있는 육신적인 삶의 특징에 해당합니다.

마디로,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유한한 육신적인 삶을 선택하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판정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7-19).

에덴동산의 맛있는 과일을 그냥 따먹을 있는 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득세하고 있는 동산 바깥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육신적인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3:23). 결과는 실로 허무합니다(1:2-4, 3:20).

육신적인 삶의 결과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처참한 말로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없는 공간에서 평생을 지내야만 하는 아담의 운명입니다(2:7-8, 3:22-24). 그렇다면,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가닥의 구원의 길을 마련해주실 것인가요?

아담의 답변이 그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로지 그의 아내 하와가 주는 과일을 먹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3:12). 과연 그러한지 하나님께서 진범을 가려내고자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3:13a). 하와가 즉시 답변을 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3b).

책임의 소재는 다시 사탄의 화신인 뱀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렇지만 유혹을 받아들인 하와의 책임도 만만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처벌이 임합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3:16).

본래 약간의 고통으로 아기를 낳도록 되어 있었지만 고통을 엄청나게 크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남편이 없이는 수가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남편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한평생 남편의 종이 되어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의 여성의 지위는 사실 그러합니다.

실로 가혹한 처벌입니다. 매우 맛있어 보이고 지혜를 줄만큼 아름다운 선악과 하나를 따먹고 맛이 좋아서 하나를 따서 사랑하는 남편에게 주었을 뿐인데 처벌이 극히 심한 것입니다(3:6, 16). 하와가 아담보다 무거운 처벌을 받고 있을까요? 이유는 그녀가 먼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3:5-6).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고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것입니다(2:17, 3:5). 결코 죽지 아니하고 도리어 창조주가 있다는 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신뢰한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과 하와는 목숨을 걸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자녀를 생산하여 남편에게 바치고 남편의 종으로 평생 살아가야만 하는 숙명을 안게 것입니다(3:16). 비록 자업자득(自業自得, 스스로의 잘못으로 얻게 되는 처벌)이기는 하지만 아직 진범이 남아 있습니다. 진범과 꼬임을 받은 억울한 여자와의 한판 승부가 훗날의 역사 가운데 드라마틱하게 펼쳐질 것입니다(3:15).

드디어 진범을 추적하시는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사탄의 화신인 뱀에게 처벌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지 이상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일일이 질문을 하시고 책임의 소재를 추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유독 뱀에게만은 행위에 대한 질문이 없습니다. 마디로, 변명의 기회를 주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담과 하와의 답변으로 뱀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하나님이 스스로 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7-28).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 가운데 뱀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뱀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주인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에 뱀의 변명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뱀의 속에 사탄이 들어가서 역사를 결과라는 사실까지 하나님이 이미 파악을 하시고 있습니다. 아울러, 아담과 하와의 답변을 듣기 전에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 어떻게 시작이 것인지 모두 통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그냥 에덴동산 중앙에 심어 두신 것이 아닙니다. 청지기 교육을 받고 있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지를 눈이 따갑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섬기며 아담부부가 종의 법도를 지키고 있는지를 감찰하고 있습니다.

결과를 채점하여 합격여부를 판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청지기교육의 합격자를 가려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합격자는 우주만물의 관리자로 세상으로 파송이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걸작품인 아담과 하와가 탈락을 하고 있습니다. 분수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감히 피조물인 주제에 스스로 창조주처럼 되고자 욕심을 부린 것입니다. 그렇게 도를 넘고 있는 아내 하와를 통제하지 못한 아담의 죄도 큽니다.

이제는 사탄의 화신인 뱀에 대하여 강력한 처벌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3:14). 걷거나 달리지를 못하고 배로 기어 다닌다고 하는 것은 벌레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교한 꾀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3:1). 흙으로 고기덩어리를 집어 삼키는데 평생을 바쳐야만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다가 뱀은 흙으로 돌아가고 것입니다. 그때부터 뱀은 아름다운 다리도 사라지고 영민했던 두뇌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짜 진범이 남아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도전은 항상 사탄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1:9-12, 2:5). 그와 같은 문제의 핵심을 하나님이 정확하게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도구에 의하여, 흉계에 휘말려서 처참한 처벌을 받게 아담과 하와의 후손을 이제는 구원해야만 하는 처방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방책이 다음과 같이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것이니라 하시고”(3:15).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완전한 여자의 후손은 역사 가운데 마리아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물학적인 부모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남자와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렇지만 나사렛 예수만은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습니다. 남자가 없이 오로지 성령으로 여자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1:18).

남자를 가까이 적이 없는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1:26-27). 처녀인 마리아가 잉태를 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1:31-33).

마리아는 반문을 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일이 있으리이까?”(1:34). 천사가 답변을 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1:35),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1:37).

완전한 여자의 후손으로서 세상에 오시게 그리스도 예수가 사탄의 머리가 되고 있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27:50-54, 8:1-2). 일은 사탄이 예수님의 발에 못을 박음으로써 성사가 것입니다(3:15, 27:35). 예언이 4,000 후에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어집니다(19:17).

결과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성령의 강림을 맛보게 되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의 기운을 얻게 됩니다(1:8, 2:1-4). 다시 에덴동산에서처럼 청지기의 교육이 시행이 됩니다. 교회가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28:18-20). 성도들은 풍성한 말씀의 꼴을 먹고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성이 됩니다(6:39, 10:10, 21:15-19).

드디어 세상으로 파송이 됩니다. 우주만물에게 하나님 앞에서 법도와 분수를 지키며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치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청지기를 통하여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완성이 되어 나갈 것입니다(고전15:24-26). 결론적으로 그러한 내용이 바로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매우 장기적인 종합처방이라고 하겠습니다.

 

5.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라(3:18)

 

하나님과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함께 거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같습니다. 우선 외적인 모습이 비슷합니다. 나아가서 내적인 성품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한 것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1:26).

그런데 선과 악을 판정하는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아무리 옆에서 지켜보아도 아담과 하와는 도저히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지혜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만물을 분의 뜻에 따라 관리를 하는 정도의 지혜와 능력을 부여 받은 하인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욕심이 많은 하와는 점이 불만이었습니다. 사탄이 사실을 간파하고서 하와의 동무인 뱀을 통하여 충동을 것입니다. 하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결혼생활을 영위하면서 보니까 그저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남편도 출세를 시키고 자신도 하나님처럼 만물 위에 군림을 수가 있을까요? 하와는 마치 옛날 사탄처럼 창조의 질서를 어기고 자신이 감히 창조주가 되고자 패역(悖逆, 패륜과 반역) 시도한 것입니다(14:13-15). 친정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을 배신합니다(2:22). 그리고 창조주에게 반역을 도모합니다(3:5-6).

패역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금단의 방법으로 얻고자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도 하나님처럼 만들고자 선악과를 먹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며 원죄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생각을 해보자면, 동안 하와의 마음 속에서만 꿈틀거리고 있던 욕망이 뱀의 설명을 듣자 깨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죄라면 하와는 억울합니다.

그와 같은 원초적인 욕망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와 자신의 속마음 속에 내장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욕구를 실현하고자 행동에 나섰다고 하여 천하의 죄인으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생기를 영원히 거두어 가버리시는 죽음의 처벌을 하시니 미칠 지경입니다(3:19).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참으로 착한 같습니다. 가혹한 처벌에 대하여 토를 달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들을 낳게 되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4:1).

어떻게 상황의 전개가 그렇게 발전할 수가 있을까요? 도대체 사람은 패역 사건을 통하여 어떠한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일까요?

(1)   첫째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분이 확실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생명력을 생기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마는 존재입니다(2:7).

1)      자신이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에노스 의미를 깨닫게 때에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게 됩니다(4:26a).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생의 구원을 달라고 간구하게 됩니다(4:26b).

2)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야 아담과 하와가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존재의 한계를 인식하게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깨달음을 아들 (Seth)에게 전수합니다. 셋은 그의 아들 에노스에게 그렇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아담부부는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에덴동산 안에서 하나님의 두터운 보호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마치 철부지 요셉과 같았습니다(37:2-11).

1)      그러나 동산 바깥으로 쫓겨나서 애굽과 같은 인간세상에 나갔을 때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39:1-2).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훨씬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 살려달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동행과 형통의 복을 달라고 빌고 빌었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역사건의 결과 자신들이 가는 곳마다 한평생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라는 척박한 환경입니다. 결코 우호적이지 아니한 땅과 인간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오늘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지구온난화와 이상기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3)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평생 흘려 일하면서 계속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도 하나님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할 따름입니다; “다시는 패역할 마음을 먹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부디 에덴동산에서 다시 있도록 구원해주십시오”.

4)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함께 못박히게 되는 죄인의 심정 그대로입니다(23:42-43).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에서 살게 이후부터 아담부부와 그들의 후손인 인류의 소원은 낙원의 회복 그것 밖에 없습니다.

 

5-1. 모든 자의 어머니 하와와 열국의 어머니 사라(3:20, 17:15-16)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에게 하나님은 가지 처벌을 하십니다; 첫째, 비우호적인 환경에서 고생스럽게 평생을 살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3:19). 둘째, 아내는 고통 가운데 자녀를 낳고 남편에게 바친다는 것입니다(3:16). 그래서 아내를 돌아보는 아담의 마음은 참담합니다.

그녀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 먹은 관계로 자신도 공동정범(共同正犯, 같은 범죄의 주범들)으로 처벌이 되고 있습니다. 그때 열매를 받아 먹었던가? 가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1)   첫째, 금단의 열매를 아내 혼자만 먹고서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없이는 자신의 인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27, 2:21).

(2)   둘째, 자신이 비록 하나님의 종이지만 가정에서는 우두머리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선악과를 따먹고서 하나님처럼 심판주가 되어버린다고 한다면 꼼짝 없이 자신이 그녀의 하인이 판입니다. 그것은 아니 노릇입니다. 그래서 서슴지 아니하고 아내가 주는 선악과를 단숨에 먹어 치워버렸습니다. 어찌 되었던지 간에 이제는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다시 주워서 담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아내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고생을 하여 자식을 낳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으로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가 있을까요? 영생에 대한 소망밖에는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에덴동산에서 많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결코 한번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소중하게 간직해둔 이름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2:20). 이름 하와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뜻은 모든 자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3:20).

비록 땅에서 영생을 누리지는 못하게 되었지마는 그래도 하와가 그렇게 고생하여 낳게 되는 후손들을 통하여 후세에 영원히 그들에게 기억이 되고 살아남게 되기를 희구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영생을 희구하는 아담의 마음이 아내의 이름 가운데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되는 아브람 부부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뜻은 열국의 아버지입니다(17:5). 다음으로 사래를 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17:16).

사라가 많은 나라와 백성들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와 뜻과 흡사하지만 가지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첫째,하와 영생을 희구하는 뜻이 강하지만 사라 자손 번성의 뜻이 강합니다. 마디로, ‘하와 내세적이지만 사라 현세적인 셈입니다.

(2)   둘째,사라라는 이름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결코 후세적이거나 내세적인 희망사항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라 후손의 나라는 지도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고 1,900 가까운 공백을 딛고서 20세기 중엽에 다시 가나안 땅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으로만 가능한 현대사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붙여준 이름자의 무서움을 새삼 느끼게 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모든 자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하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 구원과 영생을 호소하고 있는데(3:20) 소원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들어주고 계실까요? 그들에게 가죽 지어 입히시는 것으로 은연중에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3:21).

인간의 원죄를 가리어 주고 다시 영생의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역사가 있게 것이라는 약속이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역할을 수행하는 분이 바로 여자의 후손 것입니다(3:15). 그렇다면 아담은 하와의 후손이 훗날 그들을 구원해줄 것이기에 뜻을 미리 담아서 아내의 이름으로 삼고 있다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작명(作名, 이름을 짓는 ) 대가(大家, 으뜸이 되는 전문가) 아담인 셈입니다. 참고로, 내용을 말하고 있는 히브리서의 언급은 다음과 같습니다; “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 “그들이 이제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5-2. 가죽 옷과 생명나무의 (3:21-24)

 

인간의 치부는 무화과나무의 잎으로는 가려지지가 않습니다(3:7). 사람의 눈은 가릴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 지어 입힌 것으로 보입니다(3:21).

어린 양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고 치부를 가릴 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아무 양의 가죽으로 가리더라도 그와 같은 효능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아니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소위 무지개 언약 선언하십니다(9:8-17). 내용은 비가 무지하게 땅으로 쏟아질 같으면 구름 속에 자동적으로 무지개가 떠오르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무지개가 일종의 안전변(a safety valve)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름다운 무지개가 하나님에게 언약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9:11),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9:14-1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시고 자신의 분노를 제어하시는 것입니다.

  같은 방법이 출애굽기에 나타납니다. 유월절 밤에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이십니다(11:5-6, 12:29). 그렇지만 어린 양의 피가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발라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문을 가려 주십니다(12:13, 23). 죽음의 천사가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집의 장자들은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어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영적으로 성도에게 임하여 있으면 하나님께서 피를 보시고 죄를 묻지 아니하고 죽음의 심판을 가려주십니다(5:29, 6:53-57). 점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6-8). 그와 같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여기서의 가죽 이라고 하겠습니다(3:21).

하나님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마저 따먹고서 가운데 영생하게 되는 비극을 지극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보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3:22).

그래서 가지 예방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내보냅니다(3:23). 동산의 바깥에 나가서 땅에 식물을 경작하면서 먹고 살도록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둘째,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아담과 하와를 막고 있습니다.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에덴동산에는 출입문이 동쪽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성막이나 예루살렘성전과 동일합니다(38:13-16, 43:1-2, 47:1). 출입문으로 접근하는 길을 아예 차단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접근하는 경우에도 멀리 쫓아내고 맙니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에 이를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허용하시기 전에는 길이 없습니다. 길이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음과 같이 뚫리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3-1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안내하는 천국에 드디어 옛날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열매를 얻을 있는 길이 다음과 같이 열린 것입니다; “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가운데로 흐르더라.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열매를 맺고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22:1-2). 결국, 창세기의 기록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으로 연결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