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1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11. 02:08

창세기 제1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글의 저자는 여호와의 선지자인 모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과 주신 능력으로 애굽에 들어가서 동족 히브리인 240만명을 애굽제국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을 시킨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법칙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가나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족의 미래지사와 함께 모세 자신의 운명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백성들이 풍요에 취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방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차 창조주를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하여 편리한 우상을 만들어 섬길 것입니다. 결과, 제사장의 나라는 멸망할 것이며 거룩한 백성들은 이방 땅에 흩어져서 유민이 되고 것입니다(29:24-28, 31:16-21).

그리고 모세 자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함부로 휘두른 잘못 때문에 가나안 땅을 밟지도 못하게 되는 운명입니다(4:21, 32:48-52). 따라서 모세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의 율법서를 저술하여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전수를 시켰습니다.

자신의 육신은 이상 그들과 함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적은 그의 글만은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 훗날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다섯 권의 가운데 번째가 바로 창세기입니다. 번째 기록이기에 창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성격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전체 기록의 서론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의 오경의 서론으로서 창세기를 구성하여 저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의 기록을 전체 신약 구약 66권의 서론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창세기의 기록이 성경의 주제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용어와 개념의 정의에 있어서도 뛰어나다고 하겠습니다. 내용으로 보더라도, 창세기에는 우주만물의 주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이 정확하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이유와 과정 그리고 운영의 방안이 소상하게 기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야기 형식의 글로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생존했던 시기는 주전 15세기입니다. 시대에는 글이 있었지만 그것은 극소수만이 배우고 사용하는데 불과했습니다. 글을 필요로 하는 계층이 한정이 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글을 적을 있는 점토나 양피지 그리고 파피루스의 값이 비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하여 글이 아니라 말로써 기억을 시켜야만 했습니다.

비록 그의 저서 가운데 글로 적었다고 하는 표현이 일부 나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소수를 위한 보존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대중에게 선포하고 가르치는 데는 여전히 말이 필요했으며, 듣는 자들이 내용을 암기하기에 편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해하기에도 쉬워야만 했습니다. 방법이 바로 이야기 형식입니다. 마디로, 모세오경과 모든 정경의 서론이 되고 있는 창세기는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외우며 오랫동안 기억을 있도록 드라마틱한 이야기 형식으로 저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시작하면서 모세는 태초에있었던 일을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태초에 천지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가장 오랜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사람이 인식을 시작할 때부터 그의 주변에 천지만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디로 자연이며 환경입니다.

유식한 말로, ‘인간은 자연과 환경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자연과 환경을 바라보는 관념이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연발생(自然發生)적인 이라는 사고입니다. 둘째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과학적인 사고의 기초입니다. 후자는 철학과 종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설명은 시간적인 개념으로서의 태초 의미입니다. 영어로 in the beginning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번역이 정확하게 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후자와 관련하여 가지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1)   첫째로, 무엇이 천지와 만물을 만들고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헬라 철학과 인도 고대 종교가 약간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1)      원시적인 형태의 영지주의(靈智主義) 헬라의 철학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아니하는 세상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아니하는 지혜가 창조한 세상입니다. 지혜가 실체이며 피조세계는 그것이 반영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지혜가 소위 아르케이며 영적인 지식입니다.

2)      세상이치를 깨달으면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행복하게 경영할 있으며 세상사람들의 영혼에 빛을 던져줄 있습니다. ‘철학 ()’ 사상으로 발전이 되는 내용입니다.

3)      한편, 인도 사상과 종교는 약간 다릅니다; 지혜가 아니라 일종의 우주의 생명에너지가 만물을 창조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에너지의 존재가 소위 브라만입니다. 생기를 일부 나누어 받은 자가 사람입니다. 브라만의 파편이 사람이며 그것은 아트만입니다.

4)      이제 헬라의 철학이 주장하고 있는 생명창조의 힘이 지혜이며 인도의 고대종교가 말하고 있는 생명창조의 힘이 우주의 에너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의 공통점은 유물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헬라와 인도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중동 가나안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은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점을 창세기 첫머리 모세의 기록에서 생생하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2)   둘째로, 히브리인들은 지혜와 우주의 에너지에는 주인이 있다 사고를 했습니다. 표현이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주장입니다;

1)      지혜는 훗날 헬라의 철학에서 그노시스’(영지) 또는 로고스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사도 요한은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과 같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1:1). 그리고 세상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 독생자에 의하여 창조되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 14). 나아가서 사람의 생명과 인생의 빛도 독생자 하나님의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4).

2)      한편, 우주의 에너지는 생명의 에너지이며 그것은 영적인 에너지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또는 생기라고 표현을 했습니다(1:2, 2:7). 그것이 성령입니다. 이상의 설명은 가지의 사실로 귀결이 되고 있습니다; “철학이 추구하고 있는 지혜 그리고 고대 종교가 주장하고 있는 생명의 기운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발현되고 있다는 것이 창세기의 주장입니다”.

3)      그것이 히브리인들이 믿고 있는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신앙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 1절에서 이미 모세는 성경의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철학과 기타 종교가 지식적인 추구와 물질적인 해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면, 성경의 유일신 사상은 창조주의 존재와 사역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1:2a)

 

땅에 대해서는 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창조의 소재로서의 땅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영적인 의미로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전자와 관련하여서는 다소 폭넓은 사고가 필요합니다. 이유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고가 하나의 통념이 되어 있는데 관념에 대하여 약간의 수정이 요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혼돈의 세계에 아름다운 우주의 질서를 창조하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1:1-2)라고 버젓이 창세기에 명시가 되어 있는 사실을 전부 부인을 수가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세상은 비록 질서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창조에 사용될 있는 소재인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창조의 소재에 해당하는 물질인 구체적으로 성격이 가지로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 혼돈하고 둘째, 공허하며 셋째, 흑암이 너무나 깊다는 것입니다.

가지를 마디로 무질서인 카오스’(chao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질서한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질서가 있게 재배치를 하심으로  우주’(cosmos)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첫째,혼돈 뜻은 질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공허 뜻은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깊은 흑암 서로 만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소재의 단위인 입자 서로 만나거나 부딪힘이 있었다고 한다면 흑암의 세계에 일종의 불꽃이 튀기고 생성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만남이나 접촉의 확률이 제로인 세계입니다. 얼마나 고독하며 적막강산(寂寞江山, 천지에 아무도 없어 막막하기 그지 없음)인지 모릅니다. 외롭고 쓸쓸하기가 그지없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죽음과 절망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카오스 사도 바울은 죄와 사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8:2b). 반대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죄에서 해방되고 생명이 약동하게 됩니다(8:2a).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와 같은 영적인 법칙이 지배하고 있음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b)

 

무질서는 엄청난 팽창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은 분규가 전쟁으로 번집니다. 죄는 자꾸만 확대재생산이 되고 있습니다(4:23). 그렇게 팽창되고 있는 세상을 하나님의 영이 억제를 시키고 있습니다(1:2). 먼저 하나님의 능력이 깃들고 있는 물의 으로 뒤덮어버립니다. 그리고 수면 위를 하나님의 영이 끊임없이 순찰을 하고 있습니다. 마디로, 틈이 없이 제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어를 참고해보면 위에라는 전치사에는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휘페르’(ùπερ)입니다. 둘째는에피’(επι)입니다. 휘페르는 영어로 초월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over’ 또는 ‘beyond’입니다. 에피는 ‘on’ 의미를 지니고 있는 ‘above’입니다. 에피가 여기서 사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자신의 영으로서 수막’(물의 ) 위를 바짝 붙어서 점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우주 바깥으로 뚫고 나오지 못하도록 감찰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야 우주과학자들이 우주의 무한 팽창이론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빅뱅이 있은 이후 우주가 무한대로 팽창하고 있다는 가설을 손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주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 장막) 대한 이론이 대두가 되었으며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3,400년전에 모세가 이미 창세기 첫머리에서 기록해 놓은 내용을 이제 와서야 가능성을 발견하고서 이론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지식과 과학적인 지식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시차를 새삼 깨달을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태초부터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발휘될 있는 귀한 소재입니다. 세상에서 식물은 99% 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동물도 거의 70% 물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있는 물로 말미암아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임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생기가 유체역학적으로 살아있는 것들을 살아 숨쉬게 만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호흡과 물의 흐름이 끊어진다면 목숨과 육체는 수명을 다하고 것입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말라버리고 것입니다. 마치 성경의 다음 표현과 같습니다; “인생은 날이 풀과 같으며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03:15). 요컨대, 생명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능력이 전달되고 있기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2:7).

 

3-1.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1:3)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피조물인 사람들은 아무리 빛이 있으라!”고 목이 터지라고 외쳐도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세상이(1:2) 별안간 아름다운 빛으로 밝아지지가 아니합니다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자 캄캄한 세상에 빛이 나타나고 갑자기 밝아졌습니다(1:3).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권세가 있는 말씀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그 점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먼저그 말씀은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환상 가운데 현신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The Word of the Lord came to Abram in a vision: 15:1).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정체에 대하여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1-4).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독생자가 창조주의 신분을 내려놓고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을 하게 된다는 사실까지 사도 요한이 뒤이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1:14-18). 사도 바울의 설명도 동일합니다(2:5-8).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함께 묵상해보면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한 자가 말씀이신 독생자이심을 알게 됩니다독생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창조가 눈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21:1-2). 세상나라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그와 같은 새 세상 창조의 원리가 본문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태초에 창조의 소재가 되고 있는 땅의 입장에서 본문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하자 땅은 꼼짝 없이 그 명령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아무런 질서가 없으며 서로 만남이 없던 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재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서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부딪히기를 시작합니다불꽃이 튀고 빛이 생성됩니다공허하던 텅 빈 공간이 갑자기 빛으로 환해 집니다어둠이 밀려나고 있습니다(1:5). 부딪히고 쪼개어지고 다시 부딪히는 역사가 반복됩니다일종의 입자들의 연쇄반응입니다오늘 날의 핵분열이나 핵융합도 기본원리는 그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겉으로 보면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피조세계의 입장에서 살펴보면너무나 정치(精緻)하고 과학적인 것입니다방대한 지식과 지혜가 수반되고 있습니다그것이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말씀의 세계입니다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3-2.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4a)

 

명령은 간단합니다그러나 그 명령을 실현시키는 하부조직의 작업은 복잡하며 어렵고도 힘이 듭니다예를 들면대통령의 명령은 간단합니다그렇지만 그 지시를 수행해야만 하는 정부부처는 매우 바쁘고 힘이 듭니다그와 같은 노작(勞作)을 거치는 작업임을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첫날의 창조작업이 마무리가 되자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창조의 역군들을 칭찬하시고 있습니다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4)입니다물론 창조의 결과물을 보시고 좋다’(good!)고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그 평가를 듣는 순간 하나님의 종들은 얼마나 기쁨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기쁨을 세례 요한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3:29). 피조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의 신부와 같습니다(54:5, 62:5). 마찬가지로 교회와 성도는 그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습니다(5:22-25, 21:2, 9).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기쁨이 좋다!”는 것입니다그 기쁨을 신랑의 들러리가 모두 함께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3-3.         빛을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어둠과 밤을 만들고 계시는가?(1:4-5)

 

성경기록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성경을 읽고 세상을 사는 방법을 고쳐 나가야 되는 자들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들입니다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그들이 먼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그 다음에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8:19),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8:21).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서를 저술하여 성도들에게 전해주도록 섭리를 하고 있습니다성경의 기록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빛의 창조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맞도록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자신의 창조가 수혜자인 피조물에게 불편하도록 역사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사람들과 생물들의 생활리듬을 고려하여 빛이 비추는 시간대와 그 빛이 가려지는 시간대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빛이 직선으로 비추이는 시간대가 낮입니다야행성 동물이나 식물을 제외하고 모든 동식물들이 낮 동안에 활기차게 신진대사를 하고 활동을 합니다빛이 가려지는 밤 시간대에 휴면을 하게 됩니다그것이 생활의 리듬입니다

피조물의 편의를 위해서라면그토록 빛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호를 내려놓고 그 빛의 비추임을 가려주기도 하시는 것입니다참으로 고마우신 창조주이십니다마치 아기를 달게 잠재우기 위하여 사면을 고요하게 만드시고 숨소리조차 줄여 주시는 부모님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낮과 밤의 구분’은 하나님의 세상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결론적으로창세기의 기록은 사람들을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4.      가운데에 궁창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1:6-8)

 

무질서한 카오스 세계를 하나님께서 물의 으로 뒤덮고 계십니다(1:2). 우주 바깥으로 혼돈과 흑암의 세력들이 팽창해 나오는 것을 틈이 없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둘째 날의 창조를 통하여 악한 세력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물과 사이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감옥과 같은 공간을 이름하여 궁창’(穹蒼, 보이는 하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6-8). 사도 바울과 장로 유다가 적고 있는 서신서가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때에 너희는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따랐으니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상대함이라”(6:12), “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1:6). 캄캄한 감옥과 같은 궁창에 악한 영들을 가두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지 의문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하늘 아름답고 찬란하기가 그지 없는데 장로 유다는 흑암의 세계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하늘이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에는 많은 하늘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 바라볼 있는 하늘은 태양계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그곳은 핵융합반응을 계속 일으키고 있는 태양의 빛으로 인해서 밝게 빛나며 따뜻한 열기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아름답고 찬란하며 땅은 동식물이 살기에 적당한 온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태양계를 벗어나게 되면 캄캄한 하늘이 계속됩니다. 물론 태양계와 같은 항성이 있는 곳도 많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체 우주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주의 대부분은 캄캄한 하늘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천사들이 악한 영들이며 그들을 캄캄한 궁창이라는 감옥에 가두었다 풀이를 해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악령들이 사람이 살고 있는 밝은 거주공간까지 침투하여 악한 세력을 넓혀가고 있으므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6:12). 인간사회에 영적인 어두움이 존재하고 있기에 악한 영들이 어두움을 매개로 하여 얼마든지 침투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과 귀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장로 유다가 본래 천상의 존재인 천사장과 천사였다는 히브리 인들의 전승(傳承,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 그대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전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다음 글도 기술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과 위에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 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구덩이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14:12-15). 천상의 존재가 창조주의 자리를 탐내다가 지상으로 추락이 되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장이 사탄입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의 말로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년이 차매 사탄이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20:7-10).

사탄과 악한 영들이 최후를 맞이하는 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아래, 천하(天下) 사람이 살고 있는 지상(地上)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궁창이라고 하는 감옥이 아닙니다. 그들은 궁창에서마저 쫓겨나서 흔히 지옥으로 묘사되고 있는 불과 유황 에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20:10). 참고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의 중심부에도 용암으로 가득 있습니다. 모든 것이 녹아버리는 태양과 같은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하겠습니다.

조금 본문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물로써 악한 영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을 둘러싸버렸기에 그들은 기껏해야 하늘 아래에 살고 있는 피조물들에게만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뿐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놓게 되면 그것을 결코 탈취할 수가 없게 됩니다(10:27-29).

둘째,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만물을 모두 창조하십니다. 항상 하루 동안의 창조가 끝나면 창조물을 보시고서 스스로 좋다 평가를 하시고 만족해 하십니다. 그러나 둘째 궁창’을 만드시고는 유일하게 아무런 평가도 아무런 만족함도 없습니다(1:4, 8). 그럴까요? 이유는 궁창 악한 영들을 가두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도망을 없도록 물로써 완전히 감싸버렸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결계이며 금제입니다. 마치 결박과 같은 것입니다. 감옥입니다. 안에서 악한 영들은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사람들도 감옥을 지어놓고서 거창하게 준공식을 하거나 축하잔치를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필요악이 되는 창조물, 감옥인 궁창을 만들어 놓고서는 결코 좋다라는 평가를 아니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5.  중력(重力) 법칙’(the law of gravitation) 만드신 하나님(1:9-10)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튼이 소위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불리고 있는 중력의 법칙’(the law of gravitation) 발표한 것이 주후 1687년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3,000 전에 모세는 중력의 법칙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창세기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9).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천상의 물과 땅을 뒤덮고 있는 천하의 물이 궁창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둘째 날까지 창조된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팽창을 막고 있는 천상의 물에 대해서는 중력의 법칙을 적용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다만, 천하의 물은 중심으로 모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결과 지표면을 덮고 있던 물이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물이 줄어들자 땅이 드디어 모습을 수면 위에 드러내고 있습니다(1:9). 뭍이 드러나자 그것을 하나님은 이라 부르시고, 땅과 사이에 고여 있는 물을 바다라고 부르시고 있습니다(1:10a). 지구만 보더라도 5대양(五大洋,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극해, 북극해) 6대주(六大洲,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어울려져서 조화로운 풍경을 연출하게 됩니다. 물만 가득 있는 공간을 보다가 가운데 섬이 두둥실 있는 광경을 보게 되니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10b) 평가가 다시 나타납니다.

 

5-1. 식물(植物) 창조, 생명을 키워낼 있도록 황폐한 땅을 풍요롭게(Greenland) 만드시는 하나님(1:11-12)

 

하나님은 아름다운 풍경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1:16). 생명을 살리고 돌보기 위하여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육지를 창조하신 날에 당일 모습을 드러낸 황폐한 땅을 녹색의 , 풍요의 땅으로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1:11).

마디로, 각종 각색의 식물을 생산할 있는 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땅은 식물을 생산하고 장차 그것을 먹이로 하는 동물을 가질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풍요로운 땅의 모습을 대하게 되는 하나님의 마음은 기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자평(自評, 스스로 평가) 하고 있습니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1:13).

풀과 채소와 과일나무를 땅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실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채소와 과일나무에 대해서는 디자인을 다양하게 했습니다.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도록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2:9).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풀에 대해서는 디자인이 적습니다.

풀은 짐승과 새들에게 먹거리로 주기 위한 것입니다(1:30). 그러나 채소와 과일은 사람들에게 주기 위한 것입니다(1:29). 본능적인 생존만을 추구하고 있는 동물들의 경우와, 생존을 넘어서서 생활의 , , 까지 추구하고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먹는 식물의 다양성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림을 그려보더라도 다채로운 채소가 밭에서 자라고 유실수가 각양각색의 과일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풍경이 보기에 좋습니다. 사이에 푸른 풀이 초원을 형성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이미 폭의 좋은 그림입니다.

풍경화에서는 구태여 풀의 종류까지 상세하게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식물도감을 보게 되면 풀의 종류가 상세하게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류가 채소나 과일의 종류에 비해서는 그렇게 다양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5-2.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1:13)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동안에 일을 하고 밤에는 잠을 잡니다. 그러므로 하루 가운데 중요한 시간대는 활동을 있는 시간입니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자정을 지나서부터 하루가 시작이 되는 것으로 카운팅을 하고 있지만 밤중은 자는 시간으로 그냥 여기고 맙니다.

그렇지만 히브리 인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루의 시작은 해가 지고 나서 저녁이 되고 나면 때부터 카운팅이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해가 떠오르고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게 되면 하루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그와 같은 하루의 시간 가운데 시점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저녁시간입니다. 둘째, 아침 시간입니다. 점을 영어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있습니다;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the third day”(Genesis1:13, NIV).

일터에서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저녁식사를 가족과 함께 즐깁니다. 하루 시간 동안에 발생했던 일들에 관하여 여러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나서 개선점을 발견합니다. 결과 다음 날이면 시행착오를 줄이고 나은 인생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저녁시간 식탁자리에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사람들이 도란도란 하루의 일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면 놀라운 일이 발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드릴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다음 인생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깊은 밤에 성도는 단잠을 자게 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안식(安息, rest, Sabbath)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아침에 눈을 뜹니다. 놀라운 기적의 현장과 마주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서 성도가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역사를 하시도록 맡겨드렸기 때문에 밤새 일을 완성하신 것입니다(19:30, 23:46). 그래서 다음 아침은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날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저녁시간과 새로운 역사의 현장을 깨어서 보게 되는 아침시간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러한 관념을 담고 있는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1:13).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겠다고 날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안식의 이치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불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6.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 하늘에 광명체들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인가?(1:14-15)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오대양 육대주를 만드시고 물위에 솟아난 황량한 대지에 식물이 자라나도록 조치를 하셨습니다(1:9-13). 식물은 생의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씨앗이 발아를 하면 식물의 모양을 제대로 갖추고서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정해진 기간 열심히 신진대사를 하여 열매와 씨앗을 맺습니다. 때가 되어 일생을 마치게 되면 씨앗이 다시 새싹을 틔우게 됩니다.

그것은 동물이 생로병사(生老病死,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 과정을 밟고 세대가 교체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생활의 리듬과 신진대사를 조절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장치를 하늘에 만들고 계십니다. 빛을 생산할 있는 광명체들을 천공(天空, 하늘) 배치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빛들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립니다. 마치 엑스레이 같은 우주의 광선들은 식물의 줄기세포와 DNA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빛에 조사(照射) 받게 되면 식물들의 생활리듬이 영향을 받습니다. 마치 방사선에 쪼이게 세포와 같습니다.

결과 유전자가 활성화되거나 쇠퇴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14).

낮과 , 계절의 변화에 따라 우주에서 오는 광선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모든 생물들의 유전자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신진대사가 달라지고 줄기세포의 활동에 변화가 생깁니다. 마침내 향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디로, 하늘의 뜻에 따라 땅에 살고 있는 것들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고대사회에서는 천체를 관측하여 농사의 풍흉을 점치거나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38:31-33, 2:1-2).

 

6-1.    특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구의 낮과 밤을 주관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1:16-19)

 

낮을 비추는 환한 발광체로서 해를 하늘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햇빛을 받아서 반사해줄 있는 거울을 하늘에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입니다. 그리고 드넓은 천공을 보석처럼 빛나게 있도록 영롱한 별무리를 배치하셨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달과 함께 지구의 밤을 신비롭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광명체를 만드사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1:16-19).

 하나님은 땅을 경작하기 위하여 사람을 만들었습니다(2:5). 그리고 사람을 지구상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기에 적당하도록 햇빛과 비를 조절하고 있습니다(38:26-27, 33, 5:24). 너무 해가 지구에 가까우면 식물이 죽을 것입니다. 너무 멀면 추워서 얼어 죽을 것입니다. 가장 적절한 거리와 궤도를 자로 듯이 정확하게 지키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사장 욥에게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과 자연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배려에 힘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없으면 모든 것이 다시 카오스상태로 되돌아 갑니다. 영적인 암흑도 다시 찾아 옵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자리를 지키도록 만들고 있는 하나님의 힘이 지금도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살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7.      동물에 대한 창조와 인간에 대한 창조의 차이점(1:20-26)

 

하나님께서는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동물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여섯째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동물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주요한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동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그저 디자인을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26). 그래서 그런지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형상을 물려받고 있으므로 마디로, ‘영적인 어르신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면, 동물과 인간은 같은 육신’(肉身, 육으로 만들어진 )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모양이 다릅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디자인이 되어 있어야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 하나님의 영이 강림을 하여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재하고 있습니다(2:1-4). 때부터 보혜사 성령님은 평생 동안 성도를 떠나지 아니하고 내주하여 진리의 영으로서 역사하십니다(14:16-17). 그렇지만 동물들은 영을 오래 내주시킬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잠시 사탄의 화신으로 나타나거나 귀신의 숙주가 수는 있지만 분리가 됩니다(3:1, 5:13).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세상에 현신을 하신다고 하면, 모습은 영락없이 사람의 모양일 것입니다(18:1-2, 1:14-18, 9:4-6).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고 있다고 모세가 기록하고 있습니다(18:1).

 그런데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육체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게 되자 생령(living soul) 탄생하고 있습니다(2:7). (, soul) 탄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적으로 육체인 사람에게 임하자 발생한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평생 사용하고 나면 훗날 하나님께서 영혼을 회수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지혜의 대왕인 솔로몬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흙으로 돌아가나니,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18-21).

둘째로, 동물들의 디자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사이에 오랜 토론과정을 통하여 합의를 도출하여 동물들을 창조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1:20-25). 그렇지만 인간의 창조 때에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모두 반영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니고 있는 독생자와 성령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합의를 도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만은 적어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특이하게 합의과정을 통하여 걸작을 만드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식과 같은 존재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창조를 끝으로 하여 이상의 창조를 하지 아니하고 일곱째 날은 온전히 하나님이 자식과 같은 사람과 안식하는 일정으로 잡고 있습니다(2:2). 여기서의 안식의 의미는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경영의 방법을 전수한다는 뜻입니다(2:3). 마디로, 청지기의 교육을 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냥 먹고 쉰다는 개념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2:15-17).

 

7-1. 동물의 창조의 시작과 (1:20-25, 2:19-20)

 

흔히 동물의 종류를 알기 쉽게 , , 공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땅의 , 바다의 , 그리고 하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운데 가장 먼저 창조가 동물은 해군입니다. 하나님이 바다의 물고기를 먼저 창조하고 다음 같은 다섯째 날에 하늘을 나는 새를 창조하고 있습니다(1:20). 해군과 공군 모두 종류대로 다양하게 디자인하고 있습니다(1:21a).

위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다양한 동물들을 바라보고 하늘을 힘차게 날고 있는 여러 종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21b) 평가가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번성의 복을 마음껏 주시고 있습니다(1:22).

다만, 여기서 하늘을 나는 새들에 대해서는 땅에서 번성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날개를 가진 새라고 하더라도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는 터전은 여전히 하늘이 아니고 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모세의 표현은 세밀한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째 날에 드디어 육군의 창조에 나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24). 하나님이 땅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땅이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육신의 소재인 흙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은 동물들의 모집단이라고 수가 있습니다.

종류별로 디자인을 다양하게 했습니다. 땅에 기는 , 달리는 , 그리고 사람의 주위를 맴도는 모양이 다르고 습성이 다른 것들이 지상을 채우고 있으니 창조주의 마음이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시 생명체를 사랑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죽어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12:27). 그러한 표현이 역시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25).

하나님은 육군에 해당하는 위의 동물들을 창조하시고서는 번성의 축복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같은 뒤를 이어서 바로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바라보게 되면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상투적인 번성의 축복만이 아니라 특별하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1:27-28). 사람이 하늘을 날고 위를 걸어 다닐 수는 없겠지만 위를 걷고 달릴 수는 있습니다.

육군은 가장 사람 가까이에서 살고 있으며 사람들의 정복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숫자는 인류의 번성의 정도에 따라서 조절이 되는 종속변수입니다. 결과 육군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번성의 복을 주지 아니하고 지배자인 사람들이 알아서 하도록 위임이 것으로 보입니다.

여섯째 날에 창조된 육군과 인류 가운데 하나님 앞에 의미를 가지는 동물들과 인생들이 창세기 2 에덴동산에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창조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과 어떤 동물들이 에덴동산으로 옮겨져서 살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일곱째 이른 안식 의미와 깊숙하게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2:2). 하나님은 안식을 취하시면서 자체를 복되고 거룩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2:3). 하나님의 안식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함께 지내시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2:7-8, 19).

많은 인류를 이미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1:26-28). 그러나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데리고 와서 함께 안식을 누릴만한 존재는 쉽게 발견을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창조주의 뜻을 받들어서 땅을 경작하고 동물들을 사랑으로 관리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 복을 나누어 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인생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있는 아담 특별히 선택하여 그를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것으로 보입니다(2:7-8). 아담만이 하나님의 영이 살아서 숨쉬고 있는 living soul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아담과 더불어 친구가 되어 함께 살면서 평화를 누릴만한 가축의 종류가 에덴동산으로 들어오게 됩니다(2:18-20). 그들이 이른 애완동물’(pet)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만으로서는 만족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름을 서로 부르며 친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그들 애완동물들에게는 역시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필적할 있는 신앙인 여자 하와’(woman) 만들어서 아담에게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중매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2:21-25).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최초의 가정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아담 하와입니다. 그들은 평생 동안 서로를 아끼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 monogamy) 유지합니다.

에덴동산 바깥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2-6).

힘과 권력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취하는 무서운 세상입니다. 힘이 없는 자는 결혼도 수가 없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사회입니다. 힘이 있는 용사들만 군림하는 약육강식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짐승의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모세의 오경에도 이름을 기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짐승처럼 왔다가 짐승처럼 살고 가는 자는 하나님 앞에 이름이 없으며 생명책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모조리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담의 이름이 나타나는 주전 4,114 이전의 인류문화에 대해서는 일부 두개골과 뼈가 발굴이 되고는 있으나 그들의 문화의 흔적은 신기하게도 완전히 사라지고 없습니다. 의문에 대해서는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8.      사람이 모든 동물을 다스릴 있는 이유(1:26-30)

 

사람은 기타 생물들과 다르게 다음 3가지의 차이를 가지고 창조가 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고 있습니다(1:26-27). 둘째, 다른 생물들을 다스릴 있는 권세를 부여 받고 있습니다(1:26, 28). 셋째, 푸른 풀만 먹거리로 얻고 있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은 채소와 과일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한 고급의 ()재료를 공급 받고 있습니다(1:29).

위의 가지의 내용을 묵상해보면, 사람이 모든 동물을 다스릴 있는 이유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지배력을 행사할 있도록 고급의 양식을 제공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사람은 다른 짐승들에 비하여 육체적인 힘이 강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강한 이빨도 없으며 손톱과 발톱도 약한 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있는 것일까요? 비결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천부적으로 주신 지혜와 지식 때문입니다. 지식은 창조의 이치를 파악하고 이해할 있는 이성적인 능력입니다. 반면에, 지혜는 하나님의 뜻대로 지식을 활용할 있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쉽게 설명을 하자면, 창조물에 대한 연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지식으로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과 의도 그리고 세상경영의 철학에 대한 파악은 영성과 지혜로서만 가능합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지식은 학습의 결과 풍성해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갈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얻을 있는 영적인 선물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형상이 이미지’(image)이고 모양이 닮음’(likeness)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미지가 같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내부에서 풍겨 나오는 성품과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이 이미지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분위기가 사람에게만 전이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내부에 저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창조주만이 피조물을 통찰할 있습니다. 그리고 포용하며 어루만질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능력이 지혜로서 사람에게 주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을 비슷하게 분해하고 조립할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듯이 사람이 비슷하게 공작을 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뜻은 하나님을 닮아서 비슷하게 무엇인가 만들 있는 능력의 부여를 받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점에 유의하여, 일찍이 마르크스와 같은 학자는 사람을 공작하기를 즐거워하는 ’(homo faber)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인간의 천부적인 공작의 즐거움을 빼앗고 오로지 상품생산의 노예로 사람을 부리고 있기에 악한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어쨌든 결론을 맺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형상은 통찰력을 가지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양을 닮도록 했다는 것은 비슷한 공작물을 만들 있는 지식을 인간에게 주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었기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생활을 수가 있게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기에 인간은 영적인 에너지 뿐만 아니라 두뇌를 원활하게 가동할 있는 에너지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그것은 푸른 풀만으로는 얻을 없는 고단백 높은 칼로리의 양분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맛있는 채소와 영양이 풍부한 과일을 먹거리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먹고 신진대사를 해야만 사람의 머리가 영민하게 돌아갈 것입니다. 결과 지식이 풍부해지고 영성 또한 맑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이성적인 활동과 영성 생활이 모두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에 비로서 다른 모든 생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돌볼 수가 있게 것입니다.

 

8-1.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서 창조를 하신 이유(1:27)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복잡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할 때에 절대선(絶對善)으로 행사가 있는 것임을 엿보게 해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도 어느 한편에게만 전부를 부여해줄 수가 없습니다. 마디로, ‘싱글로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복수인 남자와 여자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나누어져서 부여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남자와 여자에게 나누어져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8).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일이 남자만으로는 아니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만 가지고서도 아니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창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께 협력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와 성격이 완전히 다른 편과 하나가 되어서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복의 이치를 하나 수가 있게 됩니다; 나와 의견이 틀리고 모양이 틀리며 성품이 다른 자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사랑하며 하나가 때에 하나님의 복을 세상이 누리게 됩니다. 생육과 번성의 축복 그리고 올바른 세상의 경영은 모두 공존공영(共存共榮) 상생(相生) 정신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8-2. 엄청난 축복을 그들에게 주신 이유와 ‘integrity’ 의미(1:27-31)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 실로 엄청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까지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첫째, 창조물을 통찰하고 다스릴 있는 혜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의 모양을 모방하여 비슷하게 각종 도구와 공작물을 만들고 문명을 일으킬 있는 능력도 부여하신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몸에도 좋고 식욕도 돋울 있는 각종 채소와 과일까지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 기쁘고 즐겁게 있는 환경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있는 최선의 것을 모두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엄청난 축복을 선물로 받은 인간이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기준이 본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מְאֹ֑ד טֹ֖וב, very good).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1:31).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으신 모든 것들을 눈에 보고 계십니다. 우주와 천체, 오대양 육대주와 각종 식물들, 육해공군의 동물들, 마지막으로 사람들, 그렇게 일렬로 보고 계십니다. 모든 것들이 생명을 주고 받으며 사랑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생기와 하나님의 복이 풍경 속에 고스란히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은 안식을 하시고 대신하여 인간들이 선한 청지기가 되어 경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래서 극히 만족한 평을 하고 있습니다; “심히 좋았더라!(it was very good!)”(1:31).

인간의 사명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것입니다. 자연환경을 살리고 돌보는 것입니다. 서로가 공존하면서 번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integrity 개념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선한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일을 담당할 만한 자가 바로 아담입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거를 하면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종으로서의 분수를 지키며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을 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배우는 시간이 안식’(安息, sabbath) 일곱째 날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만물을 복되고 거룩하게 유지하고 관리할 수가 있는지를 배웁니다(2:3). 그래서 배운 그대로 실천을 합니다. 그리하면, 만물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그대로 심히 좋은 상태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