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19강(눅23:8-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5. 04:08

누가복음 강해 219(23:8-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13()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로마총독 빌라도에 이어서 갈릴리의 분봉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을 심문하게 되다(23:8-12).

 

유대인들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이므로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가 신하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습니다(23:7c). 그는 갑자기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를 자신에게 송치하자 깜짝 놀랍니다(23:7b). 빌라도는 교활하게도 나사렛 예수가 갈릴리의 산골마을 나사렛 출신이므로 재판의 권한이 갈릴리 분봉 왕에게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자신에게 신병을 인도한 것입니다.

눈치가 빠른 헤롯 안디바는 의미를 즉각 알아채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내부의 교리적인 다툼에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정치적으로 휘말리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를 따라서 유대교의 지도자들,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와 산헤드린 대공회의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막후실세인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까지 모두 헤롯 안디바 자신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함께 보내어진 것입니다(23:10).

정치적으로 영리한 헤롯 안디바는 깊숙한 속사정까지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보나마나 유대교의 전면적인 개방과 일대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그들의 전통적인 유대교리를 위반한 이단으로 몰아 종교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를 것입니다. 그리고 사후처리를 위하여 현실적으로 사형집행권을 지니고 있는 로마총독 빌라도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의치 아니하므로 이제는 자신에게 부탁하기 위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이제는 헤롯 안디바가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안디바는 지난 3년간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나사렛 예수가 복음사역을 하였기에 그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헤롯 안디바의 관심사항은 마디로, 나사렛 예수가 세례 요한의 입장을 따르느냐 아니면 다른 입장을 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나사렛 예수는 다른 입장을 유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헤롯 안디바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위해가 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한 나사렛 예수를 자신이 사형에 처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헤롯 안디바는 나사렛 예수를 심문하는 흉내만 내고서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낼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23:9-11). 유대교 내부의 일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그로서는 상당히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갈릴리 출신들인데 그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는 비록 나사렛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하다가 체포를 당했으므로 그의 관할이 아니라고 발뺌을 것입니다.

참고로, 재판의 관할권과 관련하여 첫째, 사건의 발생지역이 예루살렘이며 둘째, 예루살렘 인근에서 체포가 되었으며 셋째,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예수를 로마총독에게 고발을 했다는 사실 등에 비추어볼 심문과 최종 재판의 권한이 당연히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는 로마총독에게 있습니다. 점을 헤롯 안디바가 분명히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신병은 다시 로마총독에게 인도가 되고 맙니다(23:11).

이상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23:8);

(1)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는 3년전에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잡아서 옥에 가둔 사람입니다(14:3-4, 3:19-20). 그리고 아내인 헤로디아의 살로메의 청을 들어주고자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을 참수한 장본인입니다(14:8-11). 그런데 세례 요한이 나사렛 예수에게 요단 강가에서 세례를 주고 유다의 백성들에게 메시아로 소개를 바가 있습니다(1:29-34).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와의 관계는 보통이 아닙니다. 사실을 알게 되자 헤롯 안디바는 혹시 예수가 갈릴리의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세례 요한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염려합니다(14:1-2, 9:7-8).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는 유대인 백성들의 반란의 움직임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는 인물입니다(14:5). 따라서 그는 수하들에게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의 현장을 은밀하게 감시하도록 합니다(9:9, “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니).

(2)   하지만 부하들의 정탐의 결과는 헤롯 안디바의 우려를 불식시켜주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세례 요한과 정치적인 노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흔히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이방인들의 왕가와 외세 로마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여 시온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선민사상이며 메시아사상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는 선민구원사상이 아니라 만민구원사상을 복음으로 설파하고 있으며 외세를 물리치자는 선동을 전혀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태여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을 방해하거나 그의 일행을 자극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마디로,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는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별로 우호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딱히 적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나사렛 예수가 그의 호기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최종재판을 앞두고서 잠시 자신에게 심문이 맡겨진 예수를 보자 마음 한편으로는 대단히 기쁘기도 합니다(23:8a). 어쩌면 예수가 시현하고 있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의 발현을 한번 직접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23:8c). 참고로, 헤롯 안디바가 정보국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내용이 다음과 같아서 예수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한 것입니다(23:8b); “나사렛 예수는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고치는 질병이 없으며 장애가 없다고 합니다(4:23). 그리고 세번이나 죽은 자를 살려내었다고 합니다(7:15, 8:55, 11:44). 갈릴리 지역에서는 수만명의 군중에게 하늘로부터 먹을 것을 만들어 제공한 적도 차례나 있습니다(14:20-21, 15:37-38)”. 그러한 이적의 자락을 혹시 수도 있을 것만 같아서 예수의 심문을 하게 것을 기뻐하고 있는 헤롯 안디바인 것입니다(23:8).

둘째로,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23:9-10);

(1)   헤롯 안디바는 자신이 나사렛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을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3:10). 그러므로 겉으로는 매우 진지하게 예수를 심문하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대교에 대한 예수의 입장이 무엇인지, 또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말로 선동을 하였는지, 나아가서 로마의 지배와 헤롯 왕가의 유대인 지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여러가지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23:9a)

(2)   그렇지만 헤롯 안디바의 관심사항은 애초에 그것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이번 기회에 자신의 오랜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문하는 척하면서 예수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네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누구나 사실을 인정할 있도록 자리에서 이적을 한번 시현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나 그러한 헤롯 안디바의 여러가지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디도 답변을 아니하십니다. 상대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제 십자가 처형이 결정이 되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되면 새로운 언약이 발동하게 것입니다(22:15-22).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그것 뿐입니다; “앞으로 세상의 온갖 유혹과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고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의 삶을 본받아 자신들의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게 되는 성도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하늘의 영광이 함께하게 된다는 놀라운 약속인 것입니다”(22:20, 28-30).

(3)   헤롯 안디바의 예수님 심문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은 속이 상하고 있습니다. 헤롯의 질문이 때로는 자기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흥미가 없어서 아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23:9). 여기서 유대교지도자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헤롯 안디바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료하게 밝혀주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갈릴리에서 오랫동안 복음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반역하고 헤롯 왕가를 몰아내려고 시도했다는 것이 심문의 결과 사실로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이 힘써 예수님의 범행사실을 분봉 왕에게 고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효과는 전혀 없습니다. 헤롯 안디바가 발을 빼려고 벌써 작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헤롯이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23:11-12);

(1)   자신의 여러가지 질문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아니하고 입을 다문 일체 답변이 없자 안디바는 인격적인 모욕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내기 전에 실컷 분풀이나 하려고 합니다.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23:11); 첫째,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합니다(23:11b). 하나님의 아들인 알았더니 볼일이 없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심문에 대하여 예수는 입도 하나 벙긋하지 못하고 있는 겁쟁이라는 모욕입니다. 그런 비겁자를 구태여 심문하고 재판할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군사들에게 예수를 끌어다가 로마총독부에 인계를 하라고 지시합니다(23:11ad). 그리고 가는 도중에 예수를 멸시하고 희롱해도 좋다고 나름대로 앙갚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23:11ab). 셋째, 겁쟁이 예수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놀리기 위하여 헤롯은 자신의 왕복 가운데 옷을 하나 꺼내어 입혀줍니다(23:11c). 보는 사람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혀를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을 은근히 놀리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헤롯 안디바라고 하겠습니다.

(2)   빛난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23:11cd-12)라고 하는 대목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구절의 내용만 따지고 보면 헤롯과 빌라도가 여전히 원수관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유대교의 내분에 휩싸이지 아니하기 위하여 머리를 써서 예수의 신병을 헤롯에게 인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도리어 자신의 관할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수를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자신의 의도가 헤롯에 의하여 좌절이 되었으므로 그를 좋아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사 누가는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23:12)라고 자신 있게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숨어 있는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1)      헤롯이 빌라도의 의도를 벌써 눈치를 채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언질도 없이 예수를 되돌려 보내게 되면 틀림 없이 화를 것이며 자신과 로마총독과의 관계는 더욱 나빠질 것입니다. 따라서 나름대로 사전에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빌라도가 유대교지도자들의 입김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서 예수를 처형하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후 점에 대하여 시리아 총독이나 로마황제로부터 사실규명이나 문책이 있게 되면 헤롯이 책임을 지고 빌라도를 변명해주겠다고 하는 언질인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갈릴리 분봉 왕의 은밀한 입장표명이 있었기에 빌라도는 헤롯 안디바와 친구처럼 지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자면, 헤롯의 입장에서는 세례 요한과 모종의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처리를 해버리는 것도 나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로서는 만약의 경우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소원을 어쩔 없이 한번 들어주게 된다면 훗날 자신의 임기 동안에 보답을 나름대로 받을 있을 것으로 정치적인 속셈을 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체포 심문 그리고 처형의 전체 과정에서 추악한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유대교의 규정을 따르고 로마의 만민법을 따르는 것으로 보이지만 속에는 이기적인 기득권유지와 정치적인 힘겨루기가 숨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측면을 의사 누가가 놓치지 아니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음을 있습니다. 그의 복음서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때에 그것은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모습을 한번 비쳐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치적인 이해득실(利害得失, 이익과 손해 그리고 얻는 것과 잃는 )만을 따지지 말고 예수님처럼 고난을 감수하더라도 묵묵하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성도의 삶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