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09강(눅22:24-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1. 09:00

누가복음 강해 209(22:24-2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3()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에 대하여(22:24-27);

 

마가와 사도 마태는 그들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하셨다는 사실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식사 도중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시는 소위 세족식 시행하셨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의사 누가는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상고(詳考, 자세하게 고찰함)해보면 어째서 예수님께서 세족식을 시행하셨는지 그리고 섬김의 모범을 보이셨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이유를 먼저 살펴보고서 본문검토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1)   첫째,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두고서 12사도들의 마음은 엄청난 기대감으로 부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선보이고 계시는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시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실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누가 총리가 되고 대제사장이 되는 것일까요? 1인지하 만인지상의 높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친척인 사도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스승님께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10:35-37). 그러자 다른 사도들의 미움과 견제를 받게 됩니다(10:41).

(2)   둘째, 모습을 보시고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게 되면 유대교의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예언하십니다(26:1-2, 18:31-34). 그러나 11사도들은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 들으면서 여전히 정치적 메시아의 관념 속에 빠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꿈꾸고 있는, 이른바 세상적인 엄청난 성공과 출세라는 환상을 쉽게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의 동쪽 근교마을 베다니에서 죽은 4일이나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십니다(11:39-44). 그러므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외세를 물리치시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실 것이라는 그들의 신념은 더욱 투철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11사도들 뿐만 아니라 베다니와 예루살렘의 주민들까지 선민의 해방자 메시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토록 열렬히 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12:12-18).

(3)   셋째, 그러나 머리가 영리한 가룟 유다만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이 사실이라고 눈치를 채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사전에 살길을 모색합니다. 그는 과감하게 스승이신 예수님의 위기를 자신이 유대교내에서 출세할 있는 기회로 삼고자 산헤드린 공회를 찾아갑니다(26:14-16). 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와 막후 실세인 안나스를 만나서 자신이 예수님을 유대교의 배신자로 고발하고 그를 은밀하게 체포할 있도록 협조를 터이니 돈과 더불어 유대교내에서 자리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한 가룟 유다의 속셈을 예수님께서 벌써 알고 계십니다(22:21). 그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성찬식 제도를 마련하시면서 뜻을 저버리고 있는 가룟 유다와 같은 세속적인 타락자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결코 얻지 못하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2:22). 예언 그대로 가룟 유다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출세도 한번 못해보고 회한과 통탄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27:3-5).

(4)   넷째, 선민우월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교인들 그리고 예수님께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민의 제국을 재건해주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해법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치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있도록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새로운 백성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성도를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는 먼저 완전한 속죄의 제사가 있어야만 합니다. 제사의 온전한 제물로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미 작정이 그리스도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22:22).

(5)   다섯째, 그런데 문제는 영적으로 둔감한 11사도들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줄 수가 있을까요? 남은 인생동안 결코 잊지 아니하고 명심하게 해줄 있는 하나의 의식과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에서는 세족식 제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13:4-17). 그리고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의 말씀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2:24-27).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사도) 사이에 누가 ? 하는 다툼 난지라”(22:24);

(1)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사건을(22:24, “ (사도) 사이에 누가 ? 하는 다툼 난지라) 치리(治理, 하나님말씀의 이치에 따라 다스리는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1)      이미 모두(冒頭, 머리말)에서 말씀을 드린 그대로, 12사도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서로 높은 자리를 얻겠다고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시는 메시아로 철석같이 믿고서 지난 3 이상 공생애를 함께하면서 스승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2)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인 야고보와 요한이 선수를 칩니다(10:35-37). 외세를 물리치시고 선민의 나라를 회복하시게 되면 자신들에게 가장 높은 좌우 정승의 자리를 달라고 하는 청탁입니다. 광경을 지켜본 기타의 사도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습니다(10:41). 그때부터 그들은 복음사역을 위하여 합심하고 협력하는 동역자가 아니라 이미 논공행상을 둘러싸고서 경쟁을 하며 서로 미워하고 있는 다툼의 관계입니다.

3)      그러므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도 서로 은근히 견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승을 파는 적의 동조자가 자리에 있다는 말씀을 하시자 서로 상대방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습니다(22:21-23). 그것은 스승이신 예수님 앞에 자신들의 의로움과 충성심을 과시하고자 하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2)   마디로,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곳과 사도들이나 제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미 차례나 예언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끝내시고 다음날 작정된 고난의 길을 가시게 됩니다(8:31, 9:31, 10:33-34, 22:15, 22).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길은 결코 사도들이나 제자들이 바라고 있는 외세의 축출이나 다윗의 제국의 재건이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유대교의 이단으로 정죄가 되고 로마의 총독에 의하여 로마황제에 대한 역적으로 처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26:65-66, 19:12-16). 그렇게 되면 사도들과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저버리게 것입니다(14:27, 50). 기대가 컸던 만큼 그들의 배신감과 좌절은 엄청날 것입니다.

2)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서 사도와 제자들은 세상의 끝을 절망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시선이 고난 다음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17:1-5, 8:18). 먼저, 하나님의 신성(神性) 머물고 있는 자신의 몸으로 제사를 드리고 대속의 피를 흘려야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희생하고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린 목적이 바로 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들이 그때부터 회개의 자리로 나아 오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깨닫는 자들은 선민 이방인 구별이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함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3)      그러나 성도들이 사함의 은혜를 매일 같이 누리면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의 시험과 유혹, 오랜 세월 익숙한 전통과 관습, 세상적인 이치와 방법론 등의 지배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육신이 연약한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한 선물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성도들에게도 부활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고전15:22). 하나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24:49, 14:16-17).

4)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내주 역사하시게 되면 육신적인 삶이 영적인 삶으로 변화하게 됩니다(8:1-11). 구체적인 변화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때부터 유대교인들이 기독교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둘째, 선민우월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을 버리게 됩니다. 셋째,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여 이방인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야심을 버리게 됩니다. 넷째, 이제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영적인 메시아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섯째, 메시아의 나라가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믿고서(고전15:24) 나라에서 영생의 영광을 누리고자 합니다(22:28-30).

둘째로,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 (신하) 주관하며 집권자들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 지니, 너희 중에 젊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22:25-26); 구절을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 (신하) 주관하며 집권자들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22:25); 먼저,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방나라 임금들이 어떻게 신하들을 다스리고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22:25). 그것은 봉건사회의 은급관계’(恩給關係, 왕이 신하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고 반대급부로서 충성을 받는 ) 같은 것입니다. 주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하들이 임금을 은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토지와 권세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에게 많이 충성한 자일수록 많은 토지와 권세를 배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공로보다 엄청나게 것이기에 은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      임금은 신하들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충성의 서약을 받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임금의 토지를 그들이 나누어서 경작을 해주고 전쟁이 발생했을 때에는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임금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2)   너희는 그렇지 않을 지니, 너희 중에 젊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22:2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적인 은급관계를 가지고 사도와 제자들에게 일종의 논공행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임금의 나라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12:31);

1)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을 힘으로 지배하고 있는 그러한 세상적인 왕국이나 제국이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사람들을 마음속으로부터 회개시키고 구원하여 형성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참여를 하자면 예수님처럼 세상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하여 마치 그들의 종과 같이 세상사람들을 섬기고 자신을 희생하여야 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내려놓고 세상에 육신을 입고서 태어나신 목적이 그것입니다(3:13-15, 2:8).

3)      그것은 주인이 종이 되어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3:16-17). 이방인나라의 임금들이 그러하듯이 주인의 권세를 휘둘러서는 도무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이 되어 사람들의 고난을 이해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람들을 섬겨 나갈 때에 사랑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4)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창조주의 아들이 신분을 내려놓고 종의 멍에인 육신을 태어나면서부터 입고자 하신 것입니다(2:5-8). 결과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후에 무덤 속에서 부활하시게 됩니다(16:6). 종의 몸인 육신을 벗고서 그때부터 하나님 아들의 영광의 형체를 다시 입게 되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새언약의 핵심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종으로서 사람들을 섬기지 아니하면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형체인 육신을 입고서 태어나셔서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십니다. 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길을 가야만 합니다. 셋째, 고난 다음에 영광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과 신분회복의 영광입니다.

6)      예수님께서 얻은 영광을 사도 바울이 얻기 위하여 이방인 사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3:10-12). 그리고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자기가 예수님을 본받는 것과 같이 자기를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고전11:1, 3:13-16).

7)      따라서 너희는 그렇지 않을 지니, 너희 중에 젊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22:26) 의미는 다음과 같이 풀이가 됩니다; 첫째, 하나님나라에서 영광을 얻고자 한다면 세상에서 마치 젊은 사람처럼 상머슴이 되어 힘있게 열심히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을 섬겨야만 합니다. 둘째, 하나님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12지파를 다스리는 자가 되자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있을 때에는 복음을 위하여 사람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진심으로 섬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종의 신앙의 자세입니다.

셋째로,앉아서 먹는 크냐? 섬기는 크냐?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섬기는 너희 중에 있노라”(22:27); 부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앉아서 먹는 크냐?”(22:27a); 옛날의 귀족과 양반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좌식계급’(坐食階級, 앉아서 밥상을 받아 먹고 생산적인 일에 직접 종사를 하지 아니하는 상층부의 계층)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왕국시대에 지배자이며 백성들의 상전입니다. 마디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세상나라의 경영의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시면 그러한 상층부에 좌식계급으로 자리를 잡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섬기는 크냐?”(22:27b);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와 제자들의 생각과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좌식계급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섬기는 자로 성실하게 살아온 자들이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사실을 믿을 수가 있을까요? 세상에서는 그러하지가 않기 때문에 믿기가 힘이 듭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섬기는 너희 중에 있노라”(22:27c); 그렇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을 보게 되면 금방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세상에 오셨지만 사명을 감당하시자 창조주의 위격(位格)으로서의 신원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스승이시지만 그들을 섬기는 종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이른바 세족식’(洗足式, 제자인 사도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의식)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사람들을 섬기는 모범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마치 어린양처럼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3)      결과 예수님께서는 종의 몸을 벗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몸인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승천하시게 됩니다(24:50-51). 그것이 인생 가운데 예수님처럼 섬기는 종의 자세로 신앙생활을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팔아서 살길을 모색하는 가룟 유다와 같은 자가 되지 아니하자면 성도들이 어떠한 신앙자세를 가져야만 할까요? 가룟 유다는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권력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에게 스승을 팔고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것입니다.

요컨대, 가룟 유다와 반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것은 출세를 하고 권력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종의 자세를 가지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지를 말고 서로 종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나라에서 놀라운 보상이 주어지게 됩니다. 종으로 섬긴 만큼 영광과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믿을 있도록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례를 남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앉아서 먹는 크냐? 섬기는 크냐?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섬기는 너희 중에 있노라”(22:27). 아무쪼록 자신의 신앙의 자세를 한번 점검하여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