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46강(눅13:34-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4. 13:44

누가복음 강해 146(13:34-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9 27()

 

예수님 안에 임재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탄식하시는 말씀(13:34-35)

 

본문의 예수님 말씀에 대하여 성경학자들이 근거를 찾으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구약의 시대에 선지자로서 예루살렘에서 선민 유대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자가 누구일까요? 가장 뚜렷하게 구약에 근거가 남아 있는 선지자가 스가랴입니다. 그는 유다 요아스를 도와서 선정을 베풀게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입니다(대하24:2, 20).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고 나자 요아스 왕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려고 합니다(대하24:17-18). 그것을 보고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 스가랴가 예언을 하다가 그만 요아스 왕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성전의 뜰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대하24:20-21). 밖에 외세의 예루살렘 침입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왕이나 제사장 또는 선지자들이 있을 있지만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선지자가 별로 없습니다.

가운데 그래도 비슷한 경우가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기 직전에 예루살렘의 감옥 뜰에 갇히게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38:28).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신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자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서 석방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39:11-14, 40:1-4). 그후 선지자 예레미야는 미스바에서 유다에 남은 동족들과 함께 살다가 그만 ()애굽 성향의 유대인지도자들에 의하여 억지로 애굽으로 끌려가게 됩니다(43:5-7).

일설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애굽에서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고 있는 동족들에 의하여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선지자의 순교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경우를 구약에서 찾아보고자 애를 쓰고 있는데 선지자 스가랴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확실한 사례를 찾기가 힘이 듭니다. 요컨대, 히브리인들의 전승 가운데에서는 더러 있을 수가 있지만 히브리 정경에서는 직접적인 기록이 아주 드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증거는 근거가 없는 말씀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본문의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이어 복음사역을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성도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예수님 말씀은 일종의 예언이며 훗날 사도행전에서 그러한 사례들이 기록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7:54-60, 8:3, 12:2).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루살렘 예루살렘아 선지자들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일이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13:34);

(1)   예루살렘 예루살렘아 선지자들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 돌로 치는 자여”(13:34a);

1)      특이한 문장입니다. ‘예루살렘 의인화하여 예수님께서 이름을 차례나 부르시면서 한탄을 하고 있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루살렘 두차례나 부르시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잘못을 가지로 지적하고 계십니다. 가운데 하나는 선지자들을 예루살렘 사람들이 죽인 것입니다.

2)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성령의 감동으로 세운 말씀의 종이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선민들이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그들을 죽이는데 앞장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다 요아스가 선지자 스가랴를 죽이라고 명령을 하자 백성들이 돌을 던져서 그를 예루살렘성전의 뜰에서 죽여버린 사건이 그러합니다(대상24:20-21).

3)      선지자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첫째가 그리스도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복음으로 백성들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세상에 파송이 되고 있습니다.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입각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입니다.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약간 다른 의미에서 네게 파송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같습니다.

4)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인들로부터 당하게 되는 고초와 핍박은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시고(23:33, 46) 집사 스데반은 돌에 맞아서 죽게 됩니다(7:7:59-60). 사도 야고보는 칼에 찔려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12:1-2). 그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탄압을 하고 있는 자들이 소위 유대교 지도자들이며 수도인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2)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일이 번이냐?”(13:34b);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과 선민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지만 그래도 구속자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영생구원의 길을 마련해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모으고 품고자 하는 암탉의 마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13:34c);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발생하게 되는 예수님의 용서와 대속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도 선민 유대인들이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계속하여 사도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탄압하고자 합니다. 아예 유대 땅에서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믿는 성도들의 씨를 말려버리고자 합니다. 그렇게 계속 엇나가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둘째로,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3:35);

(1)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되리라”(13:35a);

1)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서 처형하게 됨에 따라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은 초읽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40년이라는 징계를 받듯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살고 있는 선민들은 40 동안에 회개하지 아니하게 되면 그들의 생업의 터전이 황폐화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는데 어떻게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수가 있으며 찬양의 대상이 수가 있느냐?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3)      더구나 인간인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하였다고 그의 제자들이 선전하고 있는 것은 혹세무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유대교인들은 떳떳하게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게 됩니다. 결과 집사 스데반과 사도 야고보의 순교사건이 예루살렘에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땅이 황폐화가 되고 맙니다.

(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3:35b);

1)      참으로 놀라운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는 시대를 경험할 것이라는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경우와 달리(21:7-9) 훗날 하나님의 권능으로 예루살렘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일은 예루살렘의 선민들이 간구함으로 말미암아 유대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예루살렘 성과 유대 땅에서 선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위격이라고 인정을 하고서 이름을 찬송하게 되는 때가 언제일까요? 때까지는 구속자를 얻지 못한 선민들이 영적인 황폐함을 경험하게 것입니다. 오늘날 주후 21세기에 들어와서 예루살렘의 영적인 회복을 기독교인들이 부르짖고 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한 주도적인 영적운동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예루살렘에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때까지에는 아직도 많은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선지자들 그리고 신약의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파견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민사상과 현세 축복사상에 심취하고 있는 유대교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결과 황폐함이 그들의 땅에 임하게 됩니다. 그것은 선민들의 땅에만 국한이 되고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천국복음으로 전하고 있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배척한 이방인들도 모두 그러한 운명에 처해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들의 운명이 바뀌게 될까요? 시기에 대해서는 자발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속자로 믿고서 자신들의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까지라고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으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은혜가 땅에 충만하기를 간구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