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창세기 제43장에서 야곱은 조부 아브라함의 여호와신앙을 계승하고 소자 베냐민을 맞이한 요셉은 제사 대신에 잔치를 베풀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4. 3. 15:38

제목; “창세기 제43장에서 야곱은 조부 아브라함의 여호와신앙을 계승하고 소자 베냐민을 맞이한 요셉은 제사 대신에 잔치를 베풀다”(43:1-34)

설교일; 주후 2024 4 14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4 8일 월요일 공개)

 

창세기 제12장에서 훗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되는 아브람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독자적인 가나안선교의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부자인 족장 데라의 장남인 아브람은 부친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 권리를 포기하고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하란을 출발하여 가나안으로 남행길에 나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 여호와께서 제시하고 계시는 4가지 축복의 언약 가운데(12:1-3) 첫번째인 자손의 번성이라고 하는 약속이 아브람 부부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12:2a). 아브람은 조강지처 사래가 불임 여성입니다(11:30).

그는 아내 사래만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2:20-25). 그러므로 75세의 아브람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한 형편이므로 부친 데라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하는 것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이 약속하고 계시는 자손의 번성이라는 축복이 더 절실한 것입니다.

참고로, 아브람의 부친 데라는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으며 하란 지역에서 신도시 개발에 바쁩니다(11:26, 31-32). 그러므로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145세의 데라를 먼 훗날 집사 스데반은 한마디로, 영적으로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31-32, 7:4).

어쨌든 데라는 같은 해에 아들 3명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있는 자이며(11:26) 그가 애써 개척한 성읍은 훗날 차남에게 상속이 되어 나홀의 성으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24:10).

아브람 부부는 가나안에 들어와서 10년 동안이나 여호와신앙인의 모범을 보이고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여호와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메섹 출신으로서 충성심이 남다른 청년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고서 헤브론의 아성을 물려주고 아브람은 가나안 땅의 구국의 영웅으로서 여생을 편히 지내고자 합니다(15:2, 14:13-16).

기도로 여호와의 허락을 구하자 신탁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아브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아들이 그 뒤를 잇게 된다는 것입니다(15:4). 그와 같은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듣자 가부장 고대사회의 전통에 젖어 있는 안방마님 사래가 자신의 위신과 체면을 내려놓고 몸종 하갈을 남편에게 씨받이 첩으로 제공하여 아들을 얻고자 시도합니다(16:1-3).

그 결과 아브람 나이 86세에 서장자 이스마엘을 얻고(16:16) 아들이 13살이 되자 여호와께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고자 허락을 구하게 됩니다(17:18).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신앙이 없는 애굽여인 하갈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17:19a).

그리고 99세인 아브람과 89세인 사래의 몸에서 믿음의 후계자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17:16, 19b, 18:10). 동시에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 부르십니다(17:5-6, 15-16).

그들 부부의 새로운 이름에는 수많은 자손을 이 세상에 남기는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여호와의 축복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 부부는 자신들의 늙은 몸과 평생 불임이었던 사라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우스워서 슬며시 웃고 있습니다(17:17, 18:11-12).

그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약속의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이삭으로 사전에 작명하여 주신 것입니다(18:13-15, 17:19). 장차 적자 이삭이 90세의 불임여성 사라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면 자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아브라함 100세에 조강지처 사라의 몸에서 기적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고 있습니다(21:1-7).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난 것은 온전히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18:14). 왜냐하면, 예언을 성취하시는 여호와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먼저 불임여성 사라의 태를 여시고 동시에 늙은 부부의 몸을 젊은 몸으로 만들어주어 합방하게 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17:1-2, 20:17-18, 21:1-3);

그리고 세월이 지나자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준 두번째의 축복의 언약의 내용을 성취하십니다. 그 장소가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블레셋의 연맹 왕이며 비옥한 그랄 평야의 주인 아비멜렉이 군대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일부러 변경 브엘세바로 아브라함을 찾아오고 있습니다(21:22-23).

그 이유는 그랄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계속 빼앗았기 때문입니다(21:25). 만약 아브라함 가족이 변경 브엘세바를 벗어나서 가나안 지경으로 들어가게 되면 큰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블레셋의 땅에서 우물을 빼앗기는 등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한 아브라함 부부가 여호와께 호소하게 되면 전능한 능력의 하나님에 의하여 블레셋 땅에 저주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2:3a, 20:7, 18).  

아비멜렉은 한해 전에 아브라함의 아내인 줄 모르고 사라를 후궁으로 취하고자 왕궁으로 데리고 왔다가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개입으로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밤 그의 꿈속에 나타나신 여호와께서는 당장 사라를 그녀의 남편이며 여호와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이 죽음을 당할 것이며 왕궁에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20:3).

실제로 그날부터 하나님의 능력으로 왕궁 여인들의 태가 일시에 닫혀버리자 블레셋의 연맹왕 아비멜렉이 혼비백산하고 있습니다(20:18). 크게 놀란 아비멜렉이 여호와의 선지자 아브라함에게 잘못을 사죄하고 기도를 간구하자(20:7) 그제서야 왕궁여인들의 태가 다시 열리게 되는 이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20:17).

그러므로 아비멜렉은 브엘세바를 은밀하게 방문하여 드디어 아브라함11’로 대등하게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맺게 됩니다(21:31).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그는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행복하게 블레셋 도성으로 되돌아갑니다(21:32).

그것을 보고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름을 연맹왕 아비멜렉 만큼 높여준 여호와의 언약의 성취를 생각하고서 깊은 생각에 빠집니다(12:2b). 그 결과 큰 깨달음을 얻은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새로 얻게 된 우물가에 뿌리 깊은 에셀나무(tamarisk tree)를 심고서 엄청난 믿음의 고백과 놀라운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21:33).

그 내용이 바로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에게도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과 목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소원한 것입니다(21:33). 그 의미는 유한한 인생을 부디 불쌍하게 여기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제4장 말미에서 아담부부의 셋째아들 이 자신의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하고도 약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는 에노스라고 부르면서 부디 여호와께 영생을 달라고 간구하던 그 모습이 아브라함에 의하여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4:25-26).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핵심사항이기에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이 과연 확고한 것인지를 한번 시험해보고자 하십니다(22:1).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그 귀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22:2).

그 의미는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서 이룩한 자신의 모든 성취와 후계자인 이삭까지 여호와께 바치더라도 부활과 영생의 축복만은 반드시 얻고 싶어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자 하신 것입니다(11:17-19).

그 엄청난 시험을 아브라함과 이삭이 통과하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여호와께서는 사자를 급히 내려 보내어 창조주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자 이삭의 목을 내리치고자 하는 아브라함을 얼른 말리고 있습니다(22:11-12a).

그리고 아브라함에 대하여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칭찬하시고 이삭 대신에 번제물로 사용하도록 여호와께서는 숫양을 제공하여 주시는데 그것이 곧 여호와 이레의 은혜입니다(22:12b-14).

그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훗날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대속자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제1장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선포에 따르면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1:29, 36).

그런데 그와 같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내용을 오늘의 본문말씀 창세기 제43장의 전반부에서 다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가나안 땅 야곱의 가정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대()족장 이스라엘 곧 야곱이 자신의 생명같이 여기고 있는 막내아들 베냐민을(44:22, 30-31)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4)는 절박한 심정으로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가는 아들들의 손에 그것도 특별히 4남 유다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다(8-15);

 

요컨대, 그것은 여호와신앙인 이스라엘이 자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이 가장 귀히 여기고 있는 막내 아들 베냐민을 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민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여호와의 아가페 사랑을 그대로 닮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자 친동생 베냐민을 애굽에서 만나게 된 요셉 총리가 너무나 속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친 야곱의 일대기를 보면 그 옛날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집 벧엘에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35:7).

그와 달리 요셉의 경우에는 형제들을 모두 총리공관으로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43:16, 31-34).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이 땅에서의 죄사함의 제사나 화목의 제사보다 더 귀한 것이 요셉이 베냐민을 만난 그 기쁨의 식사자리에 오롯이 담기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소자를 살리고 구원하기 위하여 일한 성도를(25:40) 훗날 천국잔치에 초대하여 소자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25:44-46, 22:28-3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여전히 곡식과 목초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는 것임), 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곡식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야곱이 베냐민을 내놓지 아니하려고 버틴 것임, 42:38) 그 아버지가 그들(9명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애굽총리 사브낫바네아)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베냐민)가 너희와 함께 (애굽으로)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애굽총리를 만나야 양식을 살 수가 있다는 것임, 41:55),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베냐민)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나안에 남아 있던 베냐민임, 42:34, 20, 15)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똑같은 말을 2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그 사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임). 6. 이스라엘(야곱, 35:10)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애굽총리)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7. 그들(애굽에 다녀온 9명의 아들들, 42:24-26, 19)이 이르되, 그 사람(애굽총리)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애굽총리의 질문이 대단히 사적이며 구체적임을 생각할 때 잘하면 그가 그 옛날의 요셉임을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임. 그러나 이복형들의 선입견은 십중팔구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애굽에서 죽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임. 따라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음),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베냐민)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장자 르우벤의 경우와 달리 유다는 자신의 목숨으로 베냐민의 안전을 보증하겠다고 맹세함, 42:37. 그만큼 르우벤보다는 유다가 훨씬 진실한 인물임).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영원히 용서받을 수가 없는 죄인이 된다는 의미이며 유다의 맹세는 영이신 하나님을 두고서 맹세한 것임, 12:31-32, 4:24). 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2번 갔다 왔으리이다(가나안 헤브론에서 애굽의 멤피스 남부 수도 이트즈토위까지 왕복하는데 넉넉잡고 2달이 걸린다고 보면 벌써 4달이 지난 것임을 유추할 수가 있음). 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애굽으로) 내려가서(여호와를 섬기는 야곱가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을 높이고 이방인이 살고 있는 애굽 땅을 낮추고 있으므로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용어를 은연중에 사용하고 있는 것임), 그 사람(애굽총리)에게 예물로 드릴지니(고대사회에서는 왕이나 선지자를 방문할 때에 예물을 드리는 것임, 왕상10:10, 왕하5:15, 2:11) 유향 조금과 조금과 향품몰약유향나무 열매 감복숭아이니라. 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42:28, 잘못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을 되돌려주고자 하는 것임. 그러므로 새로 양식을 사는 돈과 합하여 전번의 2배가 됨. 그로 미루어 보아 이번에 사오고자 하는 양식의 양이 지난번과 같은 양임을 알 수가 있음).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혹시 일방적으로 도둑으로 몰리지 않을까 두렵다는 것임). 13. 아우(베냐민)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 다시 그 사람(애굽총리)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17:1, 엘 샤다이) 그 사람(애굽총리)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시므온)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이것은 야곱의 절실한 기도제목임).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전적으로 뒷일을 전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있는 여호와의 선지자 이스라엘의 당당한 모습임, 그것은 마치 여호와신앙을 회복한 훗날의 에스더 왕비와 같은 것임, 4:16).15. 그 형제들이(베냐민 포함하여 10명임) 예물을 마련하고(11) 갑절의 돈을(12)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13) 애굽에 내려가서 (총리인 사브낫바네아) 요셉 앞에 (돈을 주고 곡식을 사기 위하여) 서니라”(43:1-15);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여전히 곡식과 목초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는 것임), 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곡식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야곱이 베냐민을 내놓지 아니하려고 버틴 것임, 42:38) 그 아버지가 그들(9명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애굽총리 사브낫바네아)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베냐민)가 너희와 함께 (애굽으로)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애굽총리를 만나야 양식을 살 수가 있다는 것임, 41:55),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베냐민)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나안에 남아 있던 베냐민임, 42:34, 20, 15)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똑같은 말을 2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그 사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임). 6. 이스라엘(야곱, 35:10)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애굽총리)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7. 그들(애굽에 다녀온 9명의 아들들, 42:24-26, 19)이 이르되, 그 사람(애굽총리)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애굽총리의 질문이 대단히 사적이며 구체적임을 생각할 때 잘하면 그가 그 옛날의 요셉임을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임. 그러나 이복형들의 선입견은 십중팔구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애굽에서 죽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임. 따라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음),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43:1-8);

1)    연속 흉년이라고 하더라도 주곡에 있어서 작목에 따라 일년에 두차례 수확이 가능합니다. 먼저 수확하는 작목이 보리입니다. 훨씬 나중에 수확하는 작목이 밀과 쌀보리입니다(9:31-32, 애굽의 경우와 가나안의 경우가 비슷한 것임). 그리고 여러 종류의 목초에 있어서도 성장기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2년째 흉년이 들고 있는데 먼저 익는 작목이 흉작이고 나중에 수확하게 되는 작목 역시 흉작입니다(1). 이제는 가나안의 대()족장 이스라엘도 더 이상 버틸 여유가 없어지고 맙니다.

2)    가축을 차례로 잡아먹는다고 하더라도 곡식과 야채를 겸하여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사온 양식이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2a). 따라서 이스라엘이 애굽을 다녀온 바 있는 9아들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그들(9명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2b). 장남 르우벤이 부친을 설득하는데 있어서 이미 실패를 하였기에(42:37-38) 이번에는 형제들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는 4남 유다가(37:26-27, 38:26) 부친의 설득에 나서고 있습니다(3a).

3)    유다는 막내 베냐민을 애굽의 총리에게 데려가지 못하면 일체 곡식을 사올 수가 없다는 사실을 두번이나 부친 야곱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3b-5). 유다의 설명을 듣자 야곱은 새삼 애굽에 다녀온 아들들이 원망스럽습니다. 공연히 가나안 부친의 집에 막냇동생 베냐민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애굽총리에게 해서 이와 같은 곤경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넋두리를 하고 있습니다(6). 그 모습을 보고서 애굽을 다녀온 9명의 아들들이 똑같은 사연을 거듭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4)    그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애굽총리가 우리들을 정탐꾼이라고 우기고 있기에 어쩔 도리가 없어서 신상정보를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적인 질문을 하면서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다음에 결론적으로 가나안에 남아 있는 막냇동생을 데리고 옴으로써 증거를 제시하라고 말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7). 유다가 마지막으로 부친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막내 베냐민만 애굽총리에게 데리고 가면 만사형통이라는 것입니다. 가뭄과 흉년 가운데 양식을 사올 수가 있으며 모든 식솔들의 목숨을 살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8).

5)    당시 유다의 설명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복음의 말씀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창조주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작은 자 소자를 살리고 인간 대접해주는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길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10:33-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참조);

6)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여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성도들이 떳떳하게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28:18-20).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예복이라고 하겠습니다(22:11-13, 19:8).  

(2)  9. 내가 (베냐민)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장자 르우벤의 경우와 달리 유다는 자신의 목숨으로 베냐민의 안전을 보증하겠다고 맹세함, 42:37. 그만큼 르우벤보다는 유다가 훨씬 진실한 인물임).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영원히 용서받을 수가 없는 죄인이 된다는 의미이며 유다의 맹세는 영이신 하나님을 두고서 맹세한 것임, 12:31-32, 4:24). 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2번 갔다 왔으리이다(가나안 헤브론에서 애굽의 멤피스 남부 수도 이트즈토위까지 왕복하는데 넉넉잡고 2달이 걸린다고 보면 벌써 4달이 지난 것임을 유추할 수가 있음). 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애굽으로) 내려가서(여호와를 섬기는 야곱가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을 높이고 이방인이 살고 있는 애굽 땅을 낮추고 있으므로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용어를 은연중에 사용하고 있는 것임), 그 사람(애굽총리)에게 예물로 드릴지니(고대사회에서는 왕이나 선지자를 방문할 때에 예물을 드리는 것임, 왕상10:10, 왕하5:15, 2:11) 유향 조금과 조금과 향품몰약유향나무 열매 감복숭아이니라. 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42:28, 잘못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을 되돌려주고자 하는 것임. 그러므로 새로 양식을 사는 돈과 합하여 전번의 2배가 됨. 그로 미루어 보아 이번에 사오고자 하는 양식의 양이 지난번과 같은 양임을 알 수가 있음).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혹시 일방적으로 도둑으로 몰리지 않을까 두렵다는 것임). 13. 아우(베냐민)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 다시 그 사람(애굽총리)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17:1, 엘 샤다이) 그 사람(애굽총리)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시므온)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이것은 야곱의 절실한 기도제목임).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전적으로 뒷일을 전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있는 여호와의 선지자 이스라엘의 당당한 모습임, 그것은 마치 여호와신앙을 회복한 훗날의 에스더 왕비와 같은 것임, 4:16).15. 그 형제들이(베냐민 포함하여 10명임) 예물을 마련하고(11) 갑절의 돈을(12)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13) 애굽에 내려가서 (총리인 사브낫바네아) 요셉 앞에 (돈을 주고 곡식을 사기 위하여) 서니라”(43:9-15);

1)    유다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 말의 의미가 부친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려세우고 있습니다(13-14). 그 말은 유다 자신이 담보가 되어 막냇동생 베냐민을 애굽에 데리고 가서 반드시 살려서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약속입니다. 만약 그 일이 잘못되게 되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치겠다는 언약입니다(9). 그것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신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2)    창조주 하나님이 예비하신 속죄의 어린양 그 대속의 희생의 의미를 아는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남은 인생을 그 종이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1:26, 2:36-42). 그에 따라 회개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성화에도 힘써야 합니다(16:24, 28:18-20). 죽어가는 심령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고 소자의 생명을 돌본 그것이 성도의 착한 행실이 되어 훗날 천국 잔치자리에서 훌륭한 예복이 되어줄 것입니다(19:8).

3)    야곱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제는 자신이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 막내아들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고자 합니다(10절과 13). 그리고 그곳에 잡혀 있는 차남 시므온도 구출해내고자 합니다(14a, 23). 게다가 무슨 영문인지 지난번 양식을 사올 때에 지급한 돈이 그대로 다시 자루 속에 들어 있는데 그것을 차제에 그대로 되돌려 주고자 합니다(12).

4)    그리고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하여 애굽총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무사히 애굽에서 양식을 사와서 흉년 가운데 식솔들이 굶어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8). 따라서 아들들과 함께 애굽에 갈 수가 없는 부친 야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애굽총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예물들입니다.

5)    구체적으로, 유향(balm) 조금과 (honey) 조금과 향품(gum), 몰약(resin), 유향나무 열매(pistachio nuts), 감복숭아(almonds) 등입니다(11). 여기서 몰약을 위시하여 유향과 향품은 애굽에서 시신을 미이라로 만드는데 있어서 주 재료이기에 그 가치가 큽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완벽한 조치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신앙인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그 완전한 대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6)    그것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에 애굽에서의 모든 일을 이제는 전부 맡긴다는 것입니다(14a, 17:1). 또 하나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 막내아들 베냐민의 미래까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에 맡긴다는 것입니다(14b). 가나안의 대족장 이스라엘의 기도와 더불어 모든 준비가 끝나자 베냐민을 데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가장 빠른 길로 애굽의 수도 이트즈토위로 갑니다.

7)    그들의 종자들이 호위무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나귀에 실려 있는 짐들을 돌보면서 주변을 엄중하게 경계합니다. 양식을 살 수 있는 돈을 많이 가지고 가는 걸음이라 도중에 약탈민족을 만나게 되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야곱의 아들들이 무사히 멤피스에 도착합니다. 애굽총리가 원하고 있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왔기에 그들은 안심하고 다시 사브낫바네아 총리 앞에 서게 됩니다. 과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둘째로,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요셉의 동생인 소자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그 형제들이 모두 총리공관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임. 그것은 주님이 눈여겨보시는 형제를 대접하고 구원하고자 하였기에 성도들이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과 닮아 있는 것임, 25:40, 45-46),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그 옛날 아브라함이 사람으로 현신하여 헤브론을 방문한 여호와와 2천사를 대접한 장면과 닮아 있음, 18:7-8). 17.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 도다(여전히 세상적인 돈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심성임).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9.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 즉, 각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23. (요셉집의 청지기)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야곱의 여호와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요셉이 부친 야곱의 집안사람들을 구휼하고자 양식을 준 것임).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전번에 양식을 사러 왔을 때에 요셉의 청지기에게 돈을 주고서 양식을 산 것이 맞음),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요셉의 청지기가 수하에게 명령하여 구금되어 있는 시므온을 데려오도록 한 것으로 보임. 그러므로 여기서의 청지기는 가정총무라고 하겠음, 39:4), 24. 그들(베냐민과 10명의 이복형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그 옛날 아브라함의 종에게 라반이 행한 손님대접과 비슷한 것임, 24:32).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37:7, 9절 요셉이 꾼 그 옛날 꿈의 실현임을 다시 말하고 있는 대목임),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너무 직접적인 물음이므로 요셉이 슬쩍 너희 이야기를 듣고서 내가 알고 있는 내용에 불과한 것으로 각색하고 있는 것임)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부친 야곱의 사랑을 크게 받고 이스라엘의 여호와신앙을 물려받은 요셉이기에 그의 첫번째 관심은 부친의 안부임, 37:3, 39:2)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43:16-28);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요셉의 동생인 소자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그 형제들이 모두 총리공관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임. 그것은 주님이 눈여겨보시는 형제를 대접하고 구원하고자 하였기에 성도들이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과 닮아 있는 것임, 25:40, 45-46),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그 옛날 아브라함이 사람으로 현신하여 헤브론을 방문한 여호와와 2천사를 대접한 장면과 닮아 있음, 18:7-8). 17.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 도다(여전히 세상적인 돈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심성임).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9.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 즉, 각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23. (요셉집의 청지기)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야곱의 여호와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요셉이 부친 야곱의 집안사람들을 구휼하고자 양식을 준 것임).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전번에 양식을 사러 왔을 때에 요셉의 청지기에게 돈을 주고서 양식을 산 것이 맞음),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요셉의 청지기가 수하에게 명령하여 구금되어 있는 시므온을 데려오도록 한 것으로 보임. 그러므로 여기서의 청지기는 가정총무라고 하겠음, 39:4)”(43:16-23);

1)    애굽총리 사브낫바네아 곧 요셉이 그들에게서 당장 베냐민을 발견하고 있습니다(16a, 41:45). 그의 주된 관심사가 친동생 베냐민을 다시 만나는 것이기에 그토록 만나기를 소원하던 그를 22년만에 보자 자기도 모르게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얼른 고개를 자신의 청지기에게 돌리고 짧게 지시합니다;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43:16b). 그리고 그는 집안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2)    청지기가 주인 사브낫바네아 총리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합니다. 그는 손님들을 우선 집안 대기실로 인도하여 잠시 기다리도록 조치합니다. 그리고 주방에 들러 하인들에게 짐승을 잡고 잔치에 버금가는 성대한 오찬을 준비하도록 지시합니다. 어느 정도 식사준비가 되는 것을 보고서 청지기는 대기실로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을 안으로 인도합니다(17).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갑작스러운 애굽총리의 환대에 엄청 불안하여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모았습니다(18).

3)    따라서 그 집의 청지기를 따라가면서 요셉의 이복형들이 그에게 요령껏 이야기합니다(19); 지난번 양식을 사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곡식자루를 여관에서 점검해보니 지불한 돈이 그대로 다시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저히 모르고 있습니다. 즉시 되돌려주지 못하고 그만 가나안으로 가서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식솔들부터 먼저 구했습니다. 이제서야 도로 가지고 왔으니 저희들의 진심을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양식을 사기 위하여 충분한 돈을 또 가지고 왔습니다”(20-22);

4)    그 말을 듣자 청지기가 참으로 의미심장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번에 곡식대금을 받고 주인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여러분들의 하나님이 그 돈을 돌려주라고 하셨다면서 몰래 되돌려준 것입니다. 그렇게 아세요”(23a&b). 그 다음에 청지기의 명령을 받았는지 그 집의 하인들이 시므온을 석방하여 오찬장소로 이동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합류를 시키고 있습니다(23c). 참으로 일의 처리가 분명한 애굽총리의 집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요셉의 형제들은 매우 긴장하여 옷깃을 여미고 있을 뿐입니다.

(2)  24. 그들(베냐민과 10명의 이복형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그 옛날 아브라함의 종에게 라반이 행한 손님대접과 비슷한 것임, 24:32).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37:7, 9절 요셉이 꾼 그 옛날 꿈의 실현임을 다시 말하고 있는 대목임),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너무 직접적인 물음이므로 요셉이 슬쩍 너희 이야기를 듣고서 내가 알고 있는 내용에 불과한 것으로 각색하고 있는 것임)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부친 야곱의 사랑을 크게 받고 이스라엘의 여호와신앙을 물려받은 요셉이기에 그의 첫번째 관심은 부친의 안부임, 37:3, 39:2)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43:24-28);

1)    그날 요셉의 이복형들과 친동생을 접대하는 그 집 하인들의 준비가 철저합니다. 먼저 발 씻을 물을 줍니다(24a). 그 다음에는 그들의 나귀들을 외양간으로 데리고 가서 충분한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24b). 나귀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가나안에서 형제들이 데리고 온 종들과 호위무사들을 요셉의 집에서 별도로 대접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철저한 준비와 환대를 보고서 형제들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아니하고서 총리에게 줄 예물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25).

2)    그날 정오가 되자 정확하게 식당에 애굽총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얼른 그에게 준비한 예물을 바치고 절부터 합니다(26). 그 모습을 보고서 사브낫바네아 총리가 질문합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가나안에 살고 계시는 부친은 평안하시냐?”(27). 그들은 얼른 그렇다고 답변하면서 집안 어른의 안부를 물어준 총리에게 사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28);

셋째로,29. 요셉이 눈을 들어(요셉이 의자에 앉아서 눈을 들어 보는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대목은 25세의 동생 베냐민의 키가 39세의 형 요셉보다 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 자기 어머니(라헬)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여전히 요셉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베냐민을 알아보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음)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소자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것은 25:40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고 있음).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북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몸에 병이 들고 장애가 있거나 생계수단이 없어서 이 세상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눈 여겨 보시고 그들을 사랑하여 가장 먼저 고쳐 주시며 성도들에게 그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심, 5:5-9, 7:12-16, 16:20-22, 25:40),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32. 그들이(요셉의 종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엄격한 고대 서열사회임),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4:9,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거리감과 같은 것임. 그러나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에 있어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있어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 10:33-37. 곧 여호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가 만든 모든 창조물을 하나같이 사랑하고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임, 3:4, 12:30-31). 33. 그들(11명의 형제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이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요셉이 나이의 순서대로 앉히도록 사전에 종들에게 그 서열을 전해준 것임),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베냐민을 빼고는 연년생인 그들이기에 그 나이순서를 제대로 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움, 29:32-35, 30:6-24. 그런데 자신들이 미리 말해주지도 아니하였는데 정확하게 나이순서에 따라 자리가 배치되어 있으므로 심히 이상한 것임). 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5배나 주매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지만 그날 잔치자리는 워낙 음식이 풍성하므로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들이(이복형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그 장면은 성도들이 훗날 주님과 더불어 먹는 잔치자리와 비슷한 것임, 3:20, 22:28-30)”(43:29-34);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29. 요셉이 눈을 들어(요셉이 의자에 앉아서 눈을 들어 보는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대목은 25세의 동생 베냐민의 키가 39세의 형 요셉보다 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 자기 어머니(라헬)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여전히 요셉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베냐민을 알아보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음)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소자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것은 25:40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고 있음).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북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몸에 병이 들고 장애가 있거나 생계수단이 없어서 이 세상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눈 여겨 보시고 그들을 사랑하여 가장 먼저 고쳐 주시며 성도들에게 그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심, 5:5-9, 7:12-16, 16:20-22, 25:40),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43:29-31);

1)    애굽총리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아직 형제들이 모르고 있으므로 처신하기에 편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부친의 안부를 물은 다음에는 식당에 들어와 있는 젊은이를 보고서(29a) 시침을 뗀 채로 질문합니다; “이 젊은이가 너희들이 말하던 그 막내 아우인가?”(29b). 일동이 즉시 고개를 끄떡이면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정확하게 요셉은 자신의 친동생을 22년만에 만난 것입니다.

2)    3살때 헤어졌는데 어느 사이에 늠름한 25세의 청년입니다. 없어진 요셉 자신을 대신하여 부친 야곱이 참으로 막내 베냐민을 사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요셉 총리가 한마디를 합니다;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29c). 요셉의 그 한마디는 묘하게도 먼 훗날 예수님의 한마디와 흡사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3)    그 소자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요셉의 잔치자리에 초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서열이 가장 밀리고 있는 그 작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인간대접을 해주며 구원하여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성도들이 예복을 입고서 주님의 잔치자리에 참석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6:19-21,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와 같은 것임).

4)    요셉총리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격정을 억제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눈물을 흘린 다음에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아서 다시 식당으로 들어옵니다(30-31a). 그리고 이제는 식사를 차리라고 청지기에게 지시합니다(31b). 일단 명령이 떨어지자 청지기가 하인들을 지휘하여 3군데에 따로따로 식사를 마련합니다. 그 모습을 가나안에서 온 형제들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2)  32. 그들이(요셉의 종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엄격한 고대 서열사회임),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4:9,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거리감과 같은 것임. 그러나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에 있어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있어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 10:33-37. 곧 여호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가 만든 모든 창조물을 하나같이 사랑하고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임, 3:4, 12:30-31). 33. 그들(11명의 형제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이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요셉이 나이의 순서대로 앉히도록 사전에 종들에게 그 서열을 전해준 것임),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베냐민을 빼고는 연년생인 그들이기에 그 나이순서를 제대로 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움, 29:32-35, 30:6-24. 그런데 자신들이 미리 말해주지도 아니하였는데 정확하게 나이순서에 따라 자리가 배치되어 있으므로 심히 이상한 것임)”(43:32-33);   

   

1)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이 서로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33. 그들(11명의 형제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이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요셉이 나이의 순서대로 앉히도록 사전에 종들에게 그 서열을 전해준 것임),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43:33). 물론 여기서는 애굽의 총리인 사브낫바네아 곧 요셉이 형제들의 신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에 그 서열에 맞추어 식사자리의 배정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날 총리공관의 성대한 식사대접에 정신이 팔려 있는 형제들은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2)    요셉의 형제들은 본래 그 조상이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 살다가 가나안 땅으로 건너온 셈족입니다(11:31). 동방에 살던 셈족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서쪽 함족의 땅 가나안 또는 애굽에 와서 거주하게 되면 히브리인이라고 불려지면서 인종차별을 받게 됩니다. 그 방법의 하나가 여기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은 히브리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32c). 그러므로 애굽사람인 청지기와 요셉의 하인들이 따로 식사를 합니다(32b). 게다가 그 집의 주인 요셉총리의 상은 상석에 따로 차려지고 있습니다(32a). 그것이 무서운 고대서열사회의 식사법인 것입니다.

(3)  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5배나 주매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지만 그날 잔치자리는 워낙 음식이 풍성하므로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들이(이복형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그 장면은 성도들이 훗날 주님과 더불어 먹는 잔치자리와 비슷한 것임, 3:20, 22:28-30)”(43:34);

1)    마치 잔치자리와 같이 풍성한 그날 애굽총리 관저의 오찬입니다. 겉으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애굽총리의 일방적인 환대이지만 요셉 나름대로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22년만에 친동생을 다시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7살의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올 때에 친동생 베냐민은 겨우 3살짜리 아기였습니다(35:16-20, 37:2, 28). 이제는 어엿하게 25살의 청년으로 성장하여 있습니다.

2)    그 늠름한 모습을 보게 되니 친형 요셉의 가슴은 감격으로 벅차 오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온 공로를 생각하여 그 옛날 무자비하게 요셉 자신을 노예로 팔아 치웠던 이복형들에게도 엄청난 특혜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34). 그날 애굽총리가 주인의 자리에 별도로 차려져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을 형제들에게 덜어주면서 특히 베냐민에게는 5배나 많은 음식을 덜어주고 있습니다(34a). 그것이 상당히 이상하지만 그날 워낙 좋은 대접을 흡족하게 받고 있기에 그 자리에서 이복형들은 그 의미를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입니다(34b).    

결론적으로, 애굽총리 사브낫바네아 곧 요셉이 베풀고 있는 그날의 오찬은 마치 천국에서의 잔치자리와 같은 시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22년 전에 헤어진 친동생 베냐민을 다시 만나는 감격스러운 자리입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고 있는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자리이며 동시에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있는 아버지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둘째, 22년전에는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상단에 노예로 팔아 치운 무자비한 이복형들이지만 이제는 가나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친동생 베냐민을 풍요로운 애굽으로 데리고 오는 큰 공을 세운 자들입니다. 그 공로로 총리공관의 오찬에 참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소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를 구원하여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에게는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기쁨과 영광을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