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39강(눅13: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29. 02:16

누가복음 강해 139(13: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9 20()

 

천재지변과 인재(人災, 사람이 만든 재해) 넘어서는 엄청난 하나님의 전면심판을 깨닫고 미리 회개를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13:1-5)

 

의사 누가는 선민 유대인들이 품고 있는 가지의 생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변하고 계시는지를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로마총독인 본디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상수도공사를 하는데 사용하겠다는 명분으로 예루살렘성전의 헌금을 가져갔습니다. 이를 반대한 유대인들이 항의시위를 벌였습니다

1)      그러자 로마군인 출신인 빌라도가 강력하게 대처를 했습니다. 로마군인들에게 칼을 사용하지 말고 몽둥이로 유대인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때문에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사람의 갈릴리 사람도 자리에서 희생이 것으로 본문에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13:1).

2)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친 자신들의 헌금을 지키고 아울러 선민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외세가 폭력을 행사하고 선민의 신앙을 모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어째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러한 로마총독의 만행을 그냥 두고 보시는지 심히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유대인이 죽게 사건입니다(13:4);

1)      어째서 그러한 천재지변이 선민의 땅에서 발생했으며 또한 그곳에 있던 선민들이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정확하게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을 분명하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렇지만 문제는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다음과 같이 현세적인 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에 따라 결과가 있으며 반드시 현세에서 보응을 받는다는 ) 사상을 믿고 있는 이방인들의 사고방식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너지는 망대에 깔려서 죽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수가 없는 죄가 여호와 앞에 있어서 숨긴 죄때문에 인과응보로 하나님의 처벌을 받은 것입니다”.

(3)   결국 정리를 해보자면 가지의 의문사항입니다; ①첫째, 선민은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며 세상에 선민의 제국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데 어째서 현실을 반대인가? 하는 것입니다. ②둘째, 어째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보호하지 아니하시고 망대가 무너지는 천재지변으로 18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하도록 방치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위의 두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면서 한번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때 마침 두어 사람 와서 빌라도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그들의 제물에 섞은 예수께 아뢰니”(13:1);

(1)   그때 마침 두어 사람 와서”(13:1a); 의사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은 로마 2 황제인 티베리우스 재위 15년이 되는 주후 28년경으로 보입니다(3:1).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36개월은 주후 28 10월경부터 32 4월까지로 추정이 됩니다;

1)      그런데 로마총독으로 불리고 있는 본디오 빌라도의 재임기간은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입니다. 따라서 빌라도의 통치전반기 6년이 예수님의 공생애와 겹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게 되면 전반기에 2차례, 후반기에 1차례 도합 차례나 유대인들과 마찰을 크게 빗게 됩니다. 가운데 번째의 사건이 본문과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2)      번째의 사건은 군인출신인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로마총독으로 들어오면서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의 초상을 깃발에 달고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유대인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싫어하시는 형상을 가지고 들어올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에 반발합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는 유대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3)      이유는 가지입니다; ①첫째, 티베리우스 황제는 총독들이 현지에서 백성들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②둘째, 예루살렘 총독은 시리아 총독의 감독을 받는 하급 총독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수만 명에 달하는 로마의 군단은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 땅에서 빌라도가 지휘할 있는 군대는 많지가 못합니다. 500명의 기병을 제외하면 500명에서 1,000 사이로 구성이 되는 부대가 5 불과합니다. 그것으로는 수백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둘째 사건은 본문에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13:1). 그러므로 주후 31년경에 발생한 사건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주로 복음사역을 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유대 땅으로 남하를 하고 있는 시기가 주후 31년경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총독 빌라도는 예루살렘성전의 헌금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명분은 예루살렘에 상수도공사를 하는데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5)      그것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시위가 발생합니다. 며칠이 지나도 반대시위가 수그러들지를 아니하자 빌라도는 로마군인들에게 몽둥이로 강력하게 진압을 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때문에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갈릴리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오고 있습니다(13:1a). 유대 땅으로 들어온 갈릴리 사람 사람이 시위현장에서 로마군인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서 성전 가까이에서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6)      셋째 사건은 주후 32년경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예수님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의 통치말기인 주후 36년에 발생한 사마리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이유는 옛날 성전이 있던 자리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전 2세기에 예루살렘의 하스모니안 왕조가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이 있는 그리심 산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170년의 세월이 흐르자 갑자기 당시의 보물이 산에 묻혀 있다고 하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7)      그래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물을 찾겠다고 그리심 산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소문을 들은 빌라도는 급히 군대를 파견합니다. 빌라도의 목적은 가지입니다; ①첫째,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그곳에서 혹시 로마반대시위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②둘째, 보물을 차지하고 싶은 생각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곳에서 로마군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게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로마총독 빌라도의 만행에 대하여 로마황제와 시리아 총독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하게 됩니다. 결과 황제는 시리아 총독에게 명령을 내려서 빌라도를 로마로 소환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빌라도의 정치적 운명의 마지막입니다.

(2)   빌라도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그들의 제물에 섞은 ”(13:1b);

1)      예수님을 찾아온 2-3 사람의 갈릴리 고향사람들은 격분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친지가 오래간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로마군인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서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일이 발생한 장소가 예루살렘성전 앞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보고 계신 성전 앞에서 감히 침략자인 로마군인들이 선민 유대인들의 피를 흘려서 제물로 바친 셈이므로 그것은 불경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는 주장입니다(13:1b).

2)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일부러 찾아와서 복음현장에서 일을 거론하고 있는 것은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①첫째,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또는 아닌지 정확하게 파악을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라고 한다면 로마총독 빌라도의 만행에 대하여 격분할 것이며 로마반대의 봉화를 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로마제국의 군대를 유대 땅에서 몰아내어버릴 것입니다. ②둘째, 예수님의 집회장소에 엄청난 유대인들이 모여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리에서 로마군인들의 폭거에 대하여 거론을 한다면 많은 유대인들의 공분을 얻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이용하여 로마의 유대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시위를 이끌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3)    예수께 아뢰니”(13:1c);

1)      그들 두어 사람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집회현장에서 소리로 갈릴리 고향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시위현장에서 피를 흘렸다고 떠들고 있습니다(13:1c). 그것은 조용하게 예수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군중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2)      유대인들의 생각으로는 시위현장에서 발생한 일은 하나님께 바친 헌금 고르반을 외세로부터 지키고자 피를 흘린 것이므로 그것은 거룩한 헌신입니다. 그러한 헌신과 희생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것일까요? 계속 그렇게 선민들이 무죄한 피를 흘리도록 내어버려 두실 것인가요? 그들은 유대 땅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답변을 주실는지 한번 의견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둘째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갈릴리 사람들 이같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있는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13:2-3);

(1)   예수님의 답변이 집회현장에 모여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일은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가지의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1)      첫째, 시위현장에서 억울하게 죽거나 다친 사람에 대하여 혹시 인과응보적인 사상에 젖어서 사람들이 모르는 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로운 자와 죄인을 구별하는 세상적인 시각이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발언입니다(13:2). , 모든 사람들이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죄인이라는 발언인 것입니다.

2)      둘째, 그렇게 시위를 벌이고 외세에 저항을 하는 것이 의로운 행위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회개를 해야만 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외세를 몰아내겠다고 저항을 하게 되면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이 모두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3:3).

(2)   예수님의 답변은 듣기에 따라서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아주 섭섭한 말씀이며 민족의식이라든가 민족자결주의 정신이 조금도 없는 발언입니다. 그렇다면, 힘있는 세상제국이 식민지를 통치하고 있는 것을 계속 방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다만 폭력적인 방법으로 맞서게 되면 계속 피를 흘릴 것이며 세상의 역사는 피의 보복의 악순환을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은 훗날 자신이 병정과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끌려가는 현장에서도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전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12군단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2-54). 서로 피를 흘리고 있는 악순환의 인간역사를 끝내기 위하여 이미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이 예정이 되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피를 흘리겠다고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13:3).

셋째로, “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사람 예루살렘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있는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13:4-5);

(1)   워낙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므로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나의 예화를 동원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에 있는 실로암 가까이에서 발생한 망대의 붕괴사고입니다(13:4);

1)      당시 건물이 갑자기 붕괴가 되자 못가에 모여 있던 사람 가운데 18명이나 깔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국지적(局地的, 지리적으로 좁게 한정이 되는) 지진의 발생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두고서 무지한 백성들이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할 만한 잘못을 아마도 여호와 앞에 지은 죄인들이었던 모양이다”.

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인과응보적인 법칙이 세상적으로 적용이 사례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누구나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죽을 수가 있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생생한 교과서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천재지변을 보고서 빨리 회개를 하라고 하십니다(13:5). 종말의 심판이 그렇게 임하기 전에 자신들이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   무력으로 약한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하여 저항을 하고 투쟁을 하는 것을 흔히 민족독립운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정당성을 가지는 정당한 권리의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투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      하지만 예수님의 견해는 그것이 아닙니다. 무력으로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용서함을 받지를 못하는 악행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무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다가 피를 흘리게 되면 그것도 불행한 역사입니다.

2)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요? 인간의 방법으로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해법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3)      만약 원수 갚는 일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린다면, 빠른 시간내에 문제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의 섭리로 해결이 되는 것을 수가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용서하며 오히려 하나님께 죄를 사해 달라고 중보기도를 하게 되면 놀라운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23:34, 43, 24:5-6).

4)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성도의 기도는 대속의 죽임을 당하더라도 부활의 역사를 세상에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이 발생할 수가 있는지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성도들에 의하여 다시 발생할 수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12:14-21, 고전15:12-22).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의 신앙과 영생의 신앙이 없으면 도저히 현세에서는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설명입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맞아 들어가지를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억압을 물리치려고 하는 자의 투쟁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정당방위라고 하더라도 폭력은 역시 폭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종말심판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섭리가 어떻게 인생 가운데 임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생각보다 하나님나라가 빨리 임한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해주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끝에 자신의 몸을 증거자료로 바치시고 계십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체포하고 죽음에 처하려고 하는 자들을 용서해 주십니다(23:34). 그리고 그들을 회개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하여 자신의 몸으로 대속의 제사를 지내십니다(3:13-17). 결과 무덤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심판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좌정하시게 됩니다(5:24-29). 요컨대, 영생의 구원을 얻느냐 얻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처럼 인생을 살아가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고 있습니다(9:22-27).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부활과 영생의 미래를 얻기 위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실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