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37강(눅12:49-5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28. 05:31

누가복음 강해 137(12:49-5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9 18(주일)

 

악한 영에게 전면 심판을 원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심판 가운데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또한 원하시는 예수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하여(12:49-53);

 

본문의 말씀에 대한 풀이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가지고 개념을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12:49) 의미가 창세기 19장에 기록이 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등지의 불심판의 모습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천사가 롯의 가족을 심판 전에 구원해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까지 달려가지를 못하고 있는 롯의 가족을 일단 작은 소알에 들여보내고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 4성읍에 대하여 불심판을 시작합니다(19:20-25, 29:23). 어쨌든 심판 이전에 롯의 가족을 구출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 요한으로보터 침례를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3:21-22). 그런데 다시 받을 침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2:50). 그것이 무엇일까요? 의문에 대하여 어느 정도 답을 해주고 있는 구절이 로마서 6장에 다음과 같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3-4).

(3)   셋째, 하나님나라가 세상에 임하고 완전한 화평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분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알기 쉽게 말씀하십니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구원의 문제를 둘러싸고서 둘로 갈라지고 있습니다(12:51-52). 구원을 받을 있는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의 비율이 ‘3:2’ 또는 ‘2:3’입니다. 그리고 분쟁의 특징은 패역함이 가운데 엿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12:53).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본문의 구절을 검토하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내가 땅에 던지러 왔노니,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12:49);

(1)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18:21).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신 이유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 등지에서 발생하고 있는 무죄한 자의 부르짖음과 그들 주민들의 죄악상을 현지조사하시고자 하는 이유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사결과 들리는 간구의 소리와 같으면 그대로 심판을 내리실 계획이십니다(19:24-25).

(2)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시점은 아직 소돔과 고모라 등지에 심판이 임하기 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은 자신의 장조카인 롯의 가족이 살고 있는 성의 주민들을 구원하고자 열심입니다. 그는 길이 바쁘신 여호와 앞에서 무려 6차례나 질문을 하면서 심판보다는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18:22-33). 먼저 의인들을 구원해주시고 다음에는 비록 소수의 의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읍들에게 심판을 재고해 달라고 간절하게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이미 심판이 세상에 임하고 있으면 이상 구원의 문제를 거론하거나 중보의 기도의 필요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다윗 왕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와 밧세바 사이에 출생한 아들이 죽고 나자 즉시 금식을 끝내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22-23).

(4)   아이가 죽은 다음에는 울고불고해보아야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병자가 죽은 다음에 얻게 좋은 처방전) 같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아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구원해주실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금식을 하면서 살려 달라고 간구를 해야만 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의인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마음으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만민구원을 소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12:49, 3:12-18, 6:38-39).

둘째로,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12:50); 예수님께서 이미 받으신 침례와 앞으로 받으실 침례 가지가 있음을 시사해주시고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 이미 받으신 침례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요단 강가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받으신 침례입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께는 성령님의 강림과 임재가 있었으며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 하는 선언이 있었습니다.  

(2)   둘째, 예수님께서 장차 받으실 침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지입니다; ①하나는 대속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험하신 다음에 이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이 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6:3-4, 8:11). ② 하나는 성도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풀어 함께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14:16-20).

(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일과 부활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어 영적인 삶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장래의 일정에 대하여 그것을 빨리 이루시고자 심히 마음이 바쁘십니다. 그러한 절차를 아직 마치지 못하였기에 사도와 제자들의 영적인 삶이 가능하지를 못하고 어려움이 많습니다. 자꾸만 하나님신앙을 잃어버리고 실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능력도 부족하고 실천할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빨리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이 침례로써 주어져야만 합니다. 그것을 고대하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답답하다는 것입니다(12:50).

셋째로,내가 세상에 화평 주려고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이로다. 이후부터 집에 5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3 2, 2 3 하리니”(12:51-52);

(1)   본문의 예수님 말씀은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시대 홍수심판이 있고 가운데 노아가 만든 방주에 올라타 구원을 얻는 사람과 동물들이 있듯이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심판 때에도 구원을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비율이 쉽게 말하자면 ‘1:1’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예언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24:39-42).

(2)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는 자와 구원을 받는 자의 비율이 전체적으로는 ‘1:1’이라고 하더라도 과정에 있어서는 부분적으로 ‘3:2’ 혹은 ‘2:3’으로 나타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12:52b). 한편, 내부에 있어서는 멸망으로 가고 있는 무신론자와 구원으로 가고 있는 유신론자 사이에 알력과 갈등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12:51). 갈등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종교적 분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종교집단 간에 서로 반목하기도 합니다. 가장 딱한 경우는 가족구성원 사이에서 빚어지고 있는 종교적 신앙적 분쟁입니다(12:52a). 과연 누가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가족 모두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며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자일 것입니다.

넷째로,아버지가 아들, 아들이 아버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12:53);

(1)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구원을 얻기 위하여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만 할까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목에 대하여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으로 답변을 해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마디로, 법도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패역한 행위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12:53 의역).

(2)   멸망으로 인도가 되고 있는 사회와 가정에 있어서는 아래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반목하며 아들이 아버지에게 패륜적인 행동을 서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욕하고 대드는 것은 아예 인간적인 가정의 윤리 뿐만 아니라 같은 개념 위에 서있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의 법도가 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율법은 법도의 개념 위에 있습니다(26:4-5).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금기시가 되고 있는 것은 패역함을 행하는 것입니다(21:18, 20, 32:20);

1)      법도라고 하는 것은 주인과 사이에는 구분이 있으며 지켜야만 되는 분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라서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주인을 섬기는 종의 법도입니다.  만약에 종이 주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게 되면 종은 법도를 무시하고 분수를 몰랐기에 처벌의 대상이 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서도 주인과 사이의 법도가 적용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며 율법의 정신입니다.

2)      자식이 부모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지위와 신분을 힘으로 차지하려고 하게 되면 패륜과 반역행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인간이 아버지와 같은 창조주를 무시하고 자리를 편법으로 차지하고자 획책하게 되면 패역한 행위가 됩니다(3:2:17, 3:1-6). 그것은 하나님신앙이나 하나님 경외와 정면으로 맞서는 사탄적인 사고방식이며 행동의 양식입니다(14:13-17).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패륜과 반역이 가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빈발하며 특히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러하다고 한다면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러한 시대를 만나게 되면 성도들은 종말심판 가운데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시간이 빨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상명령 수행에 박차를 가해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영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