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32강(눅12:16-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26. 03:56

누가복음 강해 132(12:16-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9 13()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 앞에 부요하지 못한 자에 대한 비유(12:16-21)

 

창세기 33장을 읽어보면, 본문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있는 문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 날에 에서 세일 돌아가고 야곱 숙곳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세겜 성읍에 이르러 성읍 앞에 장막 치고 그가 장막을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100크시타에 샀으며 거기에 제단 쌓고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불렀더라”(33:16-20).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에서는 동생 야곱과 화해를 하고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처가가 있는 세일 산으로 되돌아갑니다(32:6, 33:16). 그는 그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지키는 호위대를 지휘하고 있습니다(36:2, 24). 나중에 에서는 그곳으로 이사하여 처가의 일족 호리 족속을 전부 아우르면서 에돔 족속을 형성하게 됩니다(36:6-9, 15-19). 그렇게 세상적으로 위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치는 에서입니다.

(2)   반면에 야곱은 숙곳에서 여러 양을 쳐서 더욱 부자가 되자(33:17)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애초의 그의 목적지는 하나님께 맹세한 대로 예루살렘 북방 19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벧엘입니다(28:19-22). 그곳을 찾아가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은 다음에 예루살렘 남방 30km 있는 아버지의 헤브론으로 가야만 합니다(28:16-22, 35:27). 그러나 그는 배신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예루살렘에서 북쪽 65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세겜 성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부자가 야곱은 요단 강을 건너오자 갈림길에서 벧엘을 찾아 남하를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 가나안 땅의 대도시 세겜 도시를 선택하여 북상을 하여 그곳에서 늘그막에 향락과 사치를 마음껏 즐기고자 하는 것입니다(33:18-34:3). 그래서 도시 세겜에서 여생을 안락하게 보내고자 가진 돈으로 교외에 땅을 사고 집을 짓습니다(33:18-19).

(4)   그러나 마음 구석에는 벧엘을 찾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자 맹세한 애초의 자신의 서원을 어긴 양심의 가책이 남아 있습니다(28:16-22, 31:3). 그래서 야곱은 편법을 동원합니다. 자신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세겜 가까이에서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33:20). 결과 여호와의 밖에 나게 야곱은 세겜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 집안이 가나안 원주민들에 의하여 전멸을 당할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34:30). 야곱의 이기적이고도 세속적인 선택이 호되게 하나님의 채찍을 맞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창세기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부자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곳간을 헐고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2:16-18);

(1)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생업이 주로 농업과 목축업입니다. 가운데 농업이 목축업보다는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훨씬 큽니다. 그러므로 들판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농토를 소유하고 있는 부자가 부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측면에서 천석꾼이나 만석꾼에 해당하고 있는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는 부자의 예를 들어서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2)   연이어 대풍이 들게 되면 평소의 곡식창고를 가지고서는 곡식을 쌓아 두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지주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이 곡식 저장창고의 증축입니다. 이왕 곡식창고를 짓는 김에 아예 곳간을 헐고 곡식을 많이 쌓을 있도록 2층으로 짓고자 합니다(12:18). 생각을 하면서 지주 영감은 얼마나 마음이 흡족한지 모릅니다.

(3)   그렇지만 부자는 가치가 있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1)      그것은 일찍이 지혜의 대왕인 솔로몬이 그의 설교집인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는 대목과 같은 것입니다: “너는 떡을 위에 던져라. 여러 후에 도로 찾으리라. 7에게나 8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11:1-2).

2)      세상의 재화는 일정하므로 많이 가진 자가 있으면 반대편에는 적게 가진 자가 반드시 있습니다. 가운데 너무 가진 것이 없어서 생계가 어려운 백성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떠돌이 나그네와 분깃이 없는 레위인들이 구제의 대상입니다(22:21-27, 10:9, 18-19).

3)      그러므로 잉여생산물이 많이 쌓이게 부자는 그것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며 구제에 나서야만 됩니다. 그것이 많은 재화를 풍작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세상에 심함이었더라”(41:56-57).

4)      부자는 전혀 그러한 생각을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좋은 이웃이 되어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그것이 영생을 얻을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는 전혀 모르고 있는 자입니다(10:25-29, 33-37, 1:27). 그러므로 선민이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내가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12:19);

(1)   부자의 선택은 풍작으로 인한 곡식을 넓은 곳간을 지어서 차곡차곡 쌓아 두고서 여생을 아주 행복하게 그리고 즐겁게 근심걱정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12:19). 그렇게 세상의 온갖 낙을 즐기면서 살아가자면 재물이란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그러하듯이 재물도 많으면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종같이 부리면서 세상 군림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러한 생각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제멋대로 살아간 인물이 바로 야곱입니다. 얍복 시냇가에서 숙적인 에서를 마주치게 되는 야곱입니다(32:6). 그때 야곱은 하나님께 살길을 열어 달라고 밤새도록 간구합니다(32:9-12, 22-26). 살려만 주시면 처음 서원한 장소 벧엘로 찾아가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길 것이라고 재차 맹세한 야곱입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이 바뀌고 형제 간의 화해가 하나님의 역사로 기적과 같이 이루어지고 나자 전혀 생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33:16-20).

(3)   야곱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 남행과 북행의 갈림길에서 벧엘이 아니라 대도시 세겜을 선택하고 맙니다(33:18). 북쪽의 향락의 도시를 찾아가서 남은 여생 실컷 돈을 쓰면서 호화사치와 향락을 누리고자 결심하고 그렇게 실행하고 맙니다. 그것을 보시고서 후에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징계가 소위 세겜 사건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부자의 경우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징계가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셋째로,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오늘 밤에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준비한 것이 누구의 되겠느냐? 하셨으니”(12:20);

(1)   야곱의 경우에는 세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야곱이 집안을 살리기 위하여 길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다시 매어 달렸기 때문입니다. 결과 야곱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우상을 버리고 벧엘로 남하하여 그곳에서 애초의 서원대로 실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35:1-5). 말씀대로 행동한 결과 야곱이 위대한 하나님의 족장 이스라엘로 바로 서게 되는 은혜를 얻고 있습니다(35:7-15).

(2)   그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비유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비록 부자가 재물을 많이 벌어서 앞으로 여생을 즐기고자 이기적으로 생각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목숨을 당장 거두어 가신다면 결과는 허망할 뿐이라는 것입니다(12:20).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여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구원을 얻을 있는 방법입니다”(12:16-21).

넷째로,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이와 같으니라”(12:21);

(1)   하나님께서는 생계가 어려운 자가 이웃을 돕는다고 출혈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본문에서 있듯이 이은 풍작으로 식량창고가 부족할 정도로 풍성한 곡식을 얻게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잉여농산물은 자신의 여생을 즐기고자 하는데 사용할 것이 아니라 생계수단이 막막한 고아와 과부 그리고 분깃이 없는 나그네와 레위인을 도와주는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한 자이므로 천국의 시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2)   반대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남은 인생을 사치와 향락으로 일관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재물과 달란트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므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게 것입니다(25:26). 그리고 영혼이 영생을 얻지를 못하고 영벌에 처해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25:45-46). 그러한 의미를 본문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이와( 영혼을 밤에 거두어 가는 것과) 같으니라”(12:21)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욥의 깨달음의 마디가 새삼 생각이 나고 있는 본문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그러므로 본문에서 뜻밖의 재물을 풍작처럼 주시는 경우에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미리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재물이 아닌 알고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행한 불의한 종도 때문에 오히려 칭찬을 받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장에서 강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6:1-12).

   끝으로, 다음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 친구 사귀라. 그리하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의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6:9-12).

  마디로, 세상에서 사람들이 얻고 있는 것은 전부 아버지 하나님께서 임시로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시고 참된 영원한 것을 성도들에게 자신의 분깃으로 천국에서 주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영생의 은혜를 누리시기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