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08강(눅10:13-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12. 22:57

누가복음 강해 108(10:13-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20()

 

사마리아 지역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갈릴리 호수 북쪽의 도시 이름을 들면서 도시들이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두로와 시돈보다 회개를 하지 아니하고 있다고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10:13-16)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아예 숙박조차 못하도록 조치하고 있는 마을을 만나고 있습니다(9:53). 모습을 보고서 성격이 급한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아예 하나님께 부탁하여 불심판을 내려버리자고 제안을 합니다(9:5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를 하십니다. 심판에 대해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고 자신들은 다른 마을로 가서 복음사역을 계속하자고 하십니다(9:55-56).

그렇지만 마을에 대해서는 걱정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마을에 있게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이 그렇게 계속 복음을 거절하게 되면 끝내는 불심판을 당하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을은 사마리아인이 살고 있는 마을에 국한이 같지가 않습니다. 이미 지나온 갈릴리 지역의 여러 마을에 있어서도 그러한 동네가 상당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 동네에 대해서도 걱정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 있을진저 고라신아,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0:13-16).

위와 같은 본문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있을진저 고라신, 있을진저 벳새다,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 입고 앉아 회개하였으리라”(10:13);

(1)   갈릴리 지역의 중심도시는 가버나움이며 갈릴리 호수 북안(北岸, 북쪽 호숫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동북쪽으로 9.3km정도 진행하면 어부들의 마을 벳새다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버나움 북쪽 3km 위치에 고라신이라는 마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2)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열심히 복음사역을 했으며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지역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렇지가 않다고 평가하십니다; “이방인들이 바알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는 페니키아의 도시 두로와 시돈에서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와 같이 정도로 열심히 복음사역을 했다고 하면 그들 이방인들이 진작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모두 나아왔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갈릴리의 도시에서는 그와 같은 진지한 회개의 모습이 없었다는 평가입니다”(10:13).

(3)   그와 같은 예수님의 심경을 담고 있는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있기 800 전의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1)      요나는 멀리 동방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여호와의 지시를 어기고 서쪽으로 도망을 칩니다(1:1-3).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를 하고서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1:17, 2:10). 니느웨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하룻동안 예언을 합니다(3:3-4).

2)      그러자 놀랍게도 니느웨의 왕으로부터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크게 회개를 합니다(3:5-9).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3:10). 모습을 보고서 선민의 선지자인 요나가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선민사상에 젖어 있는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회개하는 이방인의 모습과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전부 생소합니다.

3)      따라서 요나는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지를 아니하고 니느웨의 외곽 동산에서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4:5).  그것은 니느웨의 백성들이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성읍이 망하는 광경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4:9-11). 그렇게 회개할 줄을 모르고 있는 요나의 모습은 이방인 니느웨 백성들의 모습보다 조금도 나아 보이지가 않습니다(12:39-41). 그와 같은 사실을 여기서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10:13).

둘째로,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0:4);

(1)   심판 때에 구원을 받는 순서가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보다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두로와 시돈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와 같은 사실은 훗날 사도 바울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1:11-12).

(2)   두로와 시돈 지역의 이방인들이 먼저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께 돌아오며 나중에 선민들이 회개를 하고서 여호와를 진심으로 섬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전개되는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재산을 도시에서 모두 탕진하게 됩니다. 거지가 되어 남의 돼지 떼를 키우면서 쥐엄 열매를 먹고서 살게 됩니다. 그때서야 회개를 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일꾼으로라도 살고자 합니다. 아들을 아버지는 팔로 안아서 기쁘게 맞이합니다. 아들의 지위를 회복해주고 동네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반면에 집에서 부친을 모시고 살고 있는 형은 불만이 가득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일찍 받아서 제멋대로 도시에서 탕진을 하고 이제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아서 동네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장자가 회개를 하고서 진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알아채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집으로 돌아온 회개한 탕자의 다음순서가 것입니다”(15:11-32).

2)      장남의 회개가 늦어지고 있는 이유는 스스로 아버지를 모시고 의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불효와 허물이 무엇인가를 빨리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나간 탕자를 염려하며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전혀 헤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3)      같은 취지의 설명을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1-3).

셋째로,가버나움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10:5);

(1)   갈릴리의 대도시 가버나움 사람들의 잘못이 사탄의 허물과 같다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의 모습이 사탄적인 교만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2)   사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거나 주인으로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설혹 여호와가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하더라도 경영권은 사탄 자신이 넘겨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4:5-6). 그래서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이 사탄 자신이므로 자신의 보좌를 가장 높은 곳에 두고자 합니다(14:13-15).

(3)   가능하다면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을 섬기는 종처럼 부리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갈릴리의 유대인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속으로 능력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자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성취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인 선민들의 구원과 현세적인 이득을 얻기 위하여 창조주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4)   그것은 마디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취지에서 갈릴리의 유대인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을 아시고 진작에 몸을 피하신 바가 있는 예수님이십니다(6:15). 그렇게 끝까지 우상문화에 젖어서 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답변은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10:5) 것입니다.

넷째로,너희 말을 듣는 자는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0:16); 예수님께서는 사도와 제자들을 복음사역과 전도여행에 내보내시면서 파송을 받은 일꾼의 자격과 신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   파송을 받은 일꾼은 마치 대사(大使, 국가와 국가 원수의 위임을 받아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교관) 같습니다. 파송을 하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현지에서 왕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전권대사의 말을 듣고서 현지인들은 그가 대표하고 있는 나라와 왕의 뜻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2)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전권대사와 같습니다. 그리고 사도와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들입니다. 사도와 제자들의 복음사역을 보고서 백성들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구속자이며 구원자로 영접을 해야만 합니다.

(3)   만약 사도와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치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부인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며 또한 우상으로 여기고 이용하고자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지고 것입니다(10:14-16).

결론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과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아니하고 있는 갈릴리 유대인들의 마을입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지역에서도 예수님의 숙식과 복음사역을 환영하지 아니하는 성읍이나 동네들이 있었음을 본문에서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옛날 선민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들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마냥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역사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멸시할 수가 없습니다. 소위 선민 유대인의 전통을 상당히 지니고 있다고 하는 갈릴리의 유대인 지역에서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과 유대 땅으로 가시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 일행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좋고 싫은 ) 뚜렷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종교적으로 정죄가 되고 로마총독에 의하여 십자가 처형이 되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장래의 여정을 미리 암시해주고 있는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유대인이거나 사마리아인이거나 두로와 시돈의 백성과 같은 완전한 이방인들이거나 모두가 그리스도 앞에서는 죄인의 모습들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대속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모두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본문말씀에 비추어 스스로의 모습을 성찰하고 회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