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97강(눅9:28-3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8월 9일(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으로 완성이 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미리 제자들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이유(눅9:28-32)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세상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을 쓰지 말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죽을 때까지 복음사역에 전념을 하라고 당부하십니다(눅9:18-25). 그리하면 영적인 삶을 살 수가 있으며 천국의 기업을 얻을 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눅9:26-27).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사도들이 완전히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으며 영적인 삶을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사도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아울러 한평생 이 세상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고 있는 믿음의 조상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취지에서 8일 후에 변화산상의 모습이 몇 명의 사도들 앞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눅9:28-32). 이제부터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8-29);
(1)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스승님이 가신 그 길이 구원의 길인 줄 알아 남은 평생을 복음사역의 길로 매진하게 되면 반드시 하늘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눅9:23-26). 그리고 몇 사람의 사도들에게는 생전에 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한번 보여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눅9:27). 예수님께서는 그 약속을 8일 후에 지키고 계십니다(눅9:28a).
(2) 예수님께서 평소처럼 수행비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3사람의 사도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눅9:28b). 그 산은 마태복음의 기록을 참조하면,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 있는 산으로 추정이 됩니다(마16:13 17:1). 그 지역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 헤롯 빌립이 다스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가나안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 헬몬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산지가 많은 고장이며 유대와 갈릴리의 세력이 미치지 아니하고 있는 곳입니다.
(3) 유대와 갈릴리의 바리새인들로부터 시달림을 많이 받으신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의 북쪽 지방 빌립보 가이샤라 지역으로 피신을 오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한동안 기도에 전념하면서 향후 복음선교의 방향을 재정립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갈릴리 지역에서의 복음사역의 결과를 평가하고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듣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의 믿음직한 신앙고백이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향후 자신이 앞장을 서서 유대 땅과 예루살렘 선교에 임할 것이며 목숨을 걸고서 그 일을 추진할 것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언을 하신 이유입니다(눅9:22).
(4)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나면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 뒤를 따라서 복음사역과 선교에 박차를 가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의 조치를 예수님께서 취하십니다; ①첫째, 예수님처럼 고난을 이기며 복음사역을 하게 되면 반드시 천국의 영광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눅9:23-26). ②둘째, 그 예언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몇 명의 사도에게 천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눅9:27). 예수님께서는 그 약속을 8일 후에 지키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8-29).
(5)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만 하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용모가 변하고 그 옷에서 광채가 나게 되는 변화는 자동형이 아니고 피동형의 표현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용모를 변화시키고 옷에 광채를 발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그러한 변화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발생하도록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6)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사역을 하고 선교를 하게 되면 그 결과를 창조주께서 평가하시고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며 영광의 보좌에 앉도록 조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도이며 제자들인 성도들도 동일한 믿음을 지니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쟁취하거나 성취하겠다고 함부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의 입장에서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보고서 배운 그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사역을 끝까지 감당하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연히 천국의 영광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둘째로, “문득 2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9:30-31);
(1) 사도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주후 1세기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주전 15세기의 인물이며 엘리야는 주전 9세기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800년 또는 1,400년 이전의 인물들이 살아서 등장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모습을 3인의 사도들이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눅9:30). 그와 같이 시공간을 넘어서고 있는 것은 영적인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공간에 갇혀 있는 물리적인 현실세계에 창조주의 영광이 비치고 있는 천국의 모습이 임하고 있습니다(계21:23-24, 22:5). 그러한 현상을 한 마디로 의사 누가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눅9:31a).
(2) 먼 옛날 이스라엘 역사 속의 인물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들의 화제는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별세하시게 된다는 영적인 비밀입니다(눅9:31b). 그것은 사도들이 8일 전에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예언과 동일한 것입니다(눅9:22). 그러므로 천국에서도 예수님의 고난과 대속의 죽으심이 화제인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 하나님의 관심사항도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만민의 구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2사람을 보더니”(눅9:32);
(1) 천국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을 육신의 눈으로 온전히 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을 잠재우는 조치를 하고서 은밀하게 천국의 모습이 변화산상에 펼쳐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동일한 현상이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창15:12-13).
(2) ‘온전히 깨어나’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눈을 떠서 천국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는 의미입니다(눅9:32a). 그 결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옷 입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눅9:32b, 요1:1-4, 14). 그리고 그 좌우에는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불리고 있는 엘리야가 예수님을 모시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눅9:32c).
결론적으로, 자신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창조주의 영광을 가지시고 서 계시며 그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서 예수님을 영광 중에 보좌하고 있는 모습을 3사람의 사도들이 영적인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그 광경을 보고서 그들은 얼마나 부러워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자신들도 모세와 엘리야 옆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계시는 스승님을 보좌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장래를 직면하게 되자면 앞으로 어찌하면 될까요? 그 비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사도들에게 가르쳐 주신 바가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네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3-24).
그것은 한 마디로, 살든지 죽든지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3사람의 사도들이 원하고 있는 그 자리에 누구든지 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성취를 얻으시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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