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95강(눅9:18-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3. 1. 08:42

누가복음 강해 95(9:18-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7(주일)

 

깊이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예수님의 가지 질문과 가지 당부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언에 대하여(9:18-22);

 

죽은 회당장의 딸을 되살려내고(8:49-56)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2만명의 회중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복음사역이(9:13-17) 널리 알려지게 되면 어떠한 결과가 발생할까요? 가장 먼저 예상할 있는 것은 갈릴리 백성들과 유대 땅에 있어서 화제의 주인공 요즘 말로 하면, 검색어1위가 예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선지자 나사렛 예수가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궁금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다음 행보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우신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한동안 사도와 제자들을 이끌고 한적한 곳으로 떠나셔서 기도생활에 전념하시게 됩니다(9:18a).

그러한 예수님의 행보에 대하여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게 무리들이 아예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공론을 모으고 있습니다(6:15a). 예수님만 임금으로 모신다면, 평생 배고픔을 경험하지 아니해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백성의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일을 해결하셨으니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을 만한 것입니다. 그러한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얼른 산으로 피신을 하신 것이라고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습니다(6:15b).

(2)   둘째,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결과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심사가 달리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 마태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을 조심하라고 사도와 제자들에게 누룩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자꾸만 그들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에 사로잡혀서 세상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을 배불리게 해줄 있는 방법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16:5-12).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끌고 갈릴리 백성들이 따라올 없는 지역 북쪽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떠나십니다(16:13a). 그곳에서 한동안 사도들과 조용하게 생활을 하십니다. 그때에 사도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을 하시고 있습니다(16:13b). 사도 마태의 기록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의사 누가는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을까요? 누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우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적에 관하여 자연스럽게 스토리 텔링을 하면서 가운데 절묘하게 자신이 전해주고 싶어하는 진리를 숨겨두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적어도 다음 가지의 대목을 의아한 질문과 관련하여 본문에서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를 하시다가 갑자기 제자들에게 세상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계시는 것일까요?(9:18)

1)      기도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평판을 떠나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고 거룩함을 힘입는 방법인데 어째서 그와 어울리지 아니하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은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는 그러한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깨닫기를 원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마디로, 선민들이 왈가왈부하고 있는 그러한 평판에 귀를 기울이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의 평판에 계속 좌지우지되고 있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사역을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가 들어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의 그리스도론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9:20).

(2)   둘째, 제자들의 답변이 묘하게도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가 신하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는 내용과 같습니다(9:7-8, 19). 어떻게 그렇게 백성들의 생각이 똑같이 정보화되고 있는 것일까요?

1)      그것은 사도들의 정보수집능력이 분봉왕 헤롯의 정보조직만큼이나 정확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유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백성들이 어떠한 평가를 하고 있는지 반응이 궁금하여 평소에 엄청나게  정보수집을 하고 또한 결과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어째서 백성들의 반응이 그렇게나 궁금한 것일까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9).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함께 다윗의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그것이 그들 사도와 제자들의 관심사항입니다.

3)      그러한 메시아의 나라가 유대 땅에 건설이 되면 자신들이 어떠한 자리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지 그것에 관심이 많은 제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관심사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도가 훗날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10:35-39). 나머지 사도들도 입장이 별로 다르지가 않습니다(10:40-41).

(3)   셋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함구를 하라고 당부하십니다(9:21). 그리고나서는 곧바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장차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죽으신 다음에 다시 부활하실 것임을 예언으로 들려주십니다. 그러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그것은 묘하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되살리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선보였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함구를 하라고 하신 대목과 닮아 있습니다(8:56). 그때 그러한 조치를 하신 것은 회당장인 야이로와 아내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렇다면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실은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는 그러한 유대인의 메시아가 아니고 만민구원을 위하여 오신 어린양이라고 제자들이 미리 증거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복음사역과 공생애는 생각보다 훨씬 짧아질 수가 있습니다. 배신감에 선민 유대인들이 일찍 예수님을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환난과 핍박이 그만큼 일찍 찾아올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본래의 일정 그대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시고 부활하실 때까지는 함구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지를 지켜보아야만 합니다. 결과 새로운 시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부활하시는 그때를 기다려서 그때부터 만민구원을 위한 어린양이었음을 세상에 알리는 소위 예수님의 증인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24:44-49).

이제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본문의 구절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예수님이)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9:18-19);

(1)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를 하시다가 갑자기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세상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와 같은 세속적인 평가에 대하여 질문을 하시는 것은 무척 예외적인 경우로 보입니다(9:18). 오늘날에도 세상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기를 원할 때에는 성도들이 따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모범을 보이고 계시는 예수님이야 오죽 그러하시겠습니까?

(2)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평가에 신경을 쓰고 계시니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질문에 즉시 제자들이 세상사람들의 평가를 정확하게 답변드리고 있는 것을 보면(9:8-9, 19) 평소 그들의 관심사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백성들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무척 관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평가에 따라서 자신들의 거취가 결정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3)   만약 백성들이 예수님을 칭송하고 자신들의 왕으로 섬기겠다고 나서게 되면(6:15), 선민들이 하나같이 바라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 옛날 다윗제국의 재건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도와 제자들인 자신들은 크게 자리를 차지하게 것입니다(10:35-41). 생각만 해도 청운의 푸른 꿈이 무지개처럼 무르익고 있는 그들입니다.

둘째로,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9:20);

(1)   이제 사도와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세속적인 질문을 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나는 누구라고 여기면서 신앙생활에 힘쓰고 있는가 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시고 있습니다.

(2)   그와 같은 예수님의 의도에 기이하게도 사도 베드로가 정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9:20). 말의 뜻은 선민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는 유대인의 다윗제국의 재건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실천하시는 구속자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참고로, 그러한 놀라운 깨달음은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사도 마태가 증거하고 있습니다(16:17).

셋째로,경고하사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버린 되어 죽임을 당하고 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9:21-22);

(1)   사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함부로 세상사람들에게 선전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단단히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9:21). 그렇다면 언제 함구령이 효력을 상실하고 제자들이 세상에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라고 선전을 해도 되는 것일까요? 그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입니다(24:44-49). 그와 같은 취지에서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바로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처음으로 예언을 해주시고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9:22). 예언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활하신 다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여기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버린 되어 죽임을 당하고”(9:22)라는 기록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성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성모독죄로 정죄가 되시고 사형이라는 종교적인 판결을 받게 되십니다(26:57-6822:66). 물론 사형집행권이 유대인들에게 없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켜달라고 요청을 하게 됩니다(18:31). 그러한 일을 행하게 되는 산헤드린 공회의 유대교지도자들은 그룹으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첫째, 대제사장과 장로로 구성이 되어 있는 사두개인들입니다. 둘째, 랍비 가운데 이름난 자들이 율법학자인 서기관으로 공회에 진출해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예를 들면, 가말리엘이나(5:34) 니고데모(3:1)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19:38) 등이 그러한 인물들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란 사전에 누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때와 기한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1:7). ,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권한에 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성령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대로 그리고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 대로 그것을 가지고 신실하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복음서를 신앙생활의 교과서로 삼으면 됩니다. 복음서의 내용을 제멋대로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교훈으로 그리고 일생으로 보여주시는 복음서의 영적인 삶의 모범을 넘어서서 제멋대로 사유를 하거나 극단적인 주장과 선택을 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통하여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정도면 성도의 신앙생활로 충분하다고 그렇게 삶과 죽음으로 직접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록을 무시하고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종의 도리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어디까지나 성도들은 여호와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에 불과합니다(15:20). 그러므로 주인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님의 경지를 넘어서는 일을 해보겠다고 그렇게 거창하게 함부로 일을 떠벌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디로, 과대포장이며 과장선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머리이신 예수님을 경외하는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겸손한 신앙인들이 모두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