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90강(눅8:49-5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2. 27. 16:12

누가복음 강해 90(8:49-5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8 2()

 

12 혈루병 여인이 낫게 경우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는 사례가 어떻게 닮아 있는가?(8:41-56)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능력은 사람의 질병과 장애를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정도의 것일까요? 정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12해된 혈루병 여인의 경우처럼 세상에서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고칠 있는 방법이 없었던 지병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즉각 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8:43-44).

그렇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주의 부활의 능력입니다. 사실을 믿을 있도록 혈루병 여인이 낫게 되는 사건에 이어서 본문에서는 죽은 소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리시는 예수님의 기사를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의사 누가는 7장에서 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무엇인가 혈루병 여인이 낫게 경우와 함께 사건을 살펴보아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의사 누가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조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12 혈루병 여인보다 사람들이 보기에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병이 낫고 장애가 떠나갈 있도록 해달라고 어필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간청하면서 서로 먼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얻겠다고 몸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8:42). 그들은 때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아 끌면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8:45). 부디 자신을 돌아보시고 나음을 달라고 하는 간절함이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형편에서는 그렇게 행동을 한다는 )입니다.

(2)   그렇지만, 그렇게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밀고 당기고 하던 사람들이 나음을 얻게 것이 아닙니다. 12 혈루병 여인처럼 결코 공개적으로 남들과 몸싸움을 없는 병자나 장애자가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이며 장애자가 그러합니다(5:2-9). 나인 성의 과부의 죽은 아들이 그러합니다(7:11-16). 그리고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혀서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예수님 앞으로 끌려나와 있는 여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8:3-11). 모두 세상에서는 생존경쟁을 수가 없고 운명이 저주를 받고 있는 자와 같습니다.

(3)   그러한 자들에게 구속자이신 예수님의 눈이 향하고 있으며 더구나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눈이 사람을 먼저 감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33:18-19, 8:39). 그래서 그러한 자를 선택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어주시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내게로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7-39).

(4)   그러한 사실을 12 혈루병 여인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녀의 병을 낫게 해주실 것으로 믿고서 살며시 예수님의 옷자락에 자신의 손을 대고 있습니다. 결과 마지막 소망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두고 있었던 그녀의 믿음이 응답을 얻고 있습니다. 고맙게도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선언을 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딸아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8:48).

정리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녀는 남들의 눈에 공개적으로 띄게 되면 돌팔매를 맞게 되는 부정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남의 눈을 피해서 살그머니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둘째, 그러한 형편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정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디 헤아려달라고 마음 속으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그녀의 영적인 믿음의 기도가 긍정적인 응답을 얻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와 같은 경우가 하나 본문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12 짜리 외동딸의 사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8:42).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당시의 고대사회에서는 평균 14 정도가 되면 처녀로 여김을 받고 혼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해만 지나면 혼인을 하고 자신의 가정을 이루며 자녀를 생산할 있는 연령입니다. 마디로, 꽃다운 나이입니다. 그런데 꽃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중병이 들어서 생사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만큼 병에서 낫고자 하는 그녀의 간구가 절절합니다. 자신도 병이 나아서 혼인을 하고 남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러한 평범한 소원이 너무나 간절한 소망이 되어 있습니다.

(2)  둘째, 자신의 병을 낫게 해줄 있는 방법이 세상적으로는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용한 의원을 데리고 와도 모두가 고개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가 회당장의 권위와 지위를 모두 내려놓고서 젊은 나사렛 예수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서 통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친을 예수님께 내어보내고 자신은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는 처지가 참으로 비참합니다. 자신이 몸을 움직일 있으면 기어서라도 예수님께 나아갈 터인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사람의 진심을 헤아리시는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창조주의 능력으로 살려주십시오”.

(3)  셋째, 병석에 누워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딸의 기도는 참으로 절실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부디 창조의 놀라운 능력으로 저를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시면 여호와를 진심으로 섬기면서 평생 여종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서 창조주를 찾다가 그녀가 그만 죽고 맙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세상에서 끝나고 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그녀를 살려주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알게 해주십니다.

요컨대, 예수님께서는 죽음 다음에 부활이 있으며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있도록 소녀를 살려서 눈으로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려서 부활과 영생에 대하여 미리 보여주시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11:23-44).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8:50) 예수님의 말씀과 증거에 대하여(8:49-56);

 

위와 같은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 얻으리라 하시고”(8:49-50);

(1)   죽으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이 끝나고 만다는 것이 선민인 유대인들의 상식이고 이방인들의 상식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되면 모두 살아나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관념을 하나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부활사상을 베다니의 마르다가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2)   그러한 유대인들의 관념에 대하여 근본적인 수정을 예수님께서 가하시고 계십니다; “사람이 죽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는 믿음은 영생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절망하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는 죽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벗고서 창조주 앞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50 의역).

둘째로,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8:51);

(1)   부활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되살려내는 광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것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러한 때가 당도하지 아니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비서를 겸하고 있는 3명의 사도와 죽은 소녀의 부모님만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시고 있습니다.

(2)   그렇다면 언제 부활의 소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려줄 수가 있을까요? 그때는 부활의 열매가 되시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고난 다음입니다(고전15:20-24). 그때까지 부활의 소식을 크게 공개하지 아니하시는 것일까요?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영생의 구원을 보여주고 있는 부활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지(24:46-48) 결코 야이로의 딸이나(8:53-55)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이나(7:14-15)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음에서 되살려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1:41-44).

(3)   예수님의 부활만이 영생할 있는 부활의 몸을 입고서 승천할 있는 것입니다(20:17, 24:50-51, 1:9). 반면에 다른 사람들을 죽음에서 되살린 경우는 역시 유한한 것입니다. 다시 병이 수가 있으며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모두가 다시 무덤 속에 들어가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불완전한 부활의 소식을 영생의 구원이라고 만백성에게 구태여 대대적으로 선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광경을 수행비서 3인과 부모에게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8:51).

셋째로,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8:52-53);

(1)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자 집에 많은 조문객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일찍 죽게 소녀를 위하여 울며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8:52a). 그것은 소녀의 요절을 애도하는 통곡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미리 슬퍼하고 있는 애곡입니다. 조문객들은 자리에서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운명을 느끼고 있습니다.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너나없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이별의 슬픔을 모두가 느끼며 공유하고 있기에 슬픔은 자꾸만 커지며 누룩처럼 집에 번지고 있는 것입니다.

(2)   슬픔의 누룩을 제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영적인 진리의 말씀을 자리에서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죽은 것을 아는고로 비웃더라”(8:52b-53). 단순히 슬픔에 빠져 있는 야이로의 가족과 조문객들을 위로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이 육신적으로는 죽었는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잠을 자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야이로의 집에서는 아무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8:53). 따라서 그들에게 사람이 죽은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소녀를 살려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고 실제로 소녀를 죽음의 잠에서 깨워내시게 됩니다(8:54-55).

넷째로,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영이 돌아와 아이가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8:54-55);

(1)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영이 살아서 육신을 움직여나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음의 잠에서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음식을 먹어야 에너지를 얻어서 육신이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야이로의 가족들과 조문객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이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에는 죽는 것과 자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서 예수님을 비웃고 있습니다(8:53).

(3)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은 소녀를 살리기 위하여 방으로 들어가시면서 방문을 닫아 버리십니다(8:51). 세상적인 통념을 절대시하고 있는 자와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불신하고 있는 자들은 복음사역에 있어서 방해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나인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려내는 장면을 목격한 있는 제자 3사람과 소녀를 살리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부모님만을 데리고 방안에 들어가서 소녀를 살리고자 하십니다.

(4)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8:54). 말씀에 창조주의 능력이 실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즉시 몸을 빠져나간 영이 도로 들어오고 있습니다(8:55a). 곧바로 소녀가 침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8:55b). 놀라고 있는 부모님에게 예수님께서 지시하십니다; “먹을 것을 주라!”(8:55c).

다섯째로, 부모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8:56);

(1)   생전 처음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광경을 보고서 야이로와 그의 아내가 엄청나게 놀라고 있습니다(8:56a). 죽은 자신들의 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정말 반갑고 기쁜 일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정도인 줄은 처음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로써만 그동안 천지의 주재시요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찬양을 드리고 신앙고백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창조주의 능력을 사람의 능력보다 약간 나은 정도로 제한하고 있었던 그들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이제 철저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2)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예수께서 경고하사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8:56b). 방에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3명의 수행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함구를 것입니다(8:51). 3명의 사도가 함구를 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전부 눈치를 채게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려내시는 장면을 모두 목격한 바가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7:11-17).

(3)   그렇다면 예수님의 당부는 회당장인 야이로와 아내가 친지들과 조문객들에게 공식적으로 자초지종을 밝히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들의 딸이 죽음에서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고만 말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일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신 사실을 밝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회당장 야이로 부부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선전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4)   그러한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세력이 대두하게 것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산헤드린 지방 공회가 가만 있지를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와 적극 공조를 하여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철저하게 감시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할 것입니다(5:17).

(5)   유대교지도자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되고 것입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까지 마음대로 선을 보이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선민만의 구원사상을 부인하고 만민구원사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2)      둘째, 원수를 사랑하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치면서 외세인 로마제국과 헤롯왕가를 배격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정서에 일체 호응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3)      셋째,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마디로, 선민들의 종교인 유대교의 기반과 외세를 배격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선민들의 소망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자입니다.

(6)   그와 같은 상황의 전개를 예상하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함구를 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안을 보호해주고자 하시는 세심한 배려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함구를 한다고 하여 소문이 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침묵을 유지할수록 소문은 널리 퍼져나가고 마는 법입니다. 그와 같은 일은 훗날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도 그대로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예루살렘으로 번지고 있으며 때문에 예수님을 해치고자 하는 유대교지도자들의 논의가 적극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11:45-53, 12:9-11).

결론적으로, 야이로의 초상집 모습은 훗날 베다니 나사로의 죽음을 문상하고 있는 마르다의 집의 모습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가지 점을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제자들이 여전히 깊이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는 것이 완전한 죽음이며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잠을 자는 것에 불과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1:11-14).

(2)   예수님과 동행하며 제자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부활과 영생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길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3)   말씀으로 가르쳐주시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눈앞에서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것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적이며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적을 눈앞에서 있는 비결이 바로 믿음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11:39-40).

그러므로 전능하신 창조주의 능력을 좁은 인간의 안목으로 제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믿고서 자신의 부활과 영생까지 보게 되는 영광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