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2 과 (1:2-13) <OBS2-02>(손진길 작성)
[Q1] 구약시대 히브리 인들이 기다린 메시아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l 구약시대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 차례 기나긴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음; 첫 번째는 출애굽의 지도자를 기다린 것이며 두 번째는 종교개혁과 구원 그리고 정치적 해방을 함께 이루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임. 첫 번째의 기다림에 속하는 애굽 거주 430년과 두 번째 기다림에 속하는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BC 423년 무렵) 이후 중간시대 430년은 묘하게도 그 기다림의 기간이 비슷함.
l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린 지도자의 모습은 민족해방과 노예해방의 지도자 모세 그리고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주는 정치적 지도자인 메시아라고 말하고 있음. 그렇지만 느헤미야와 말라기 선지자의 글을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이 약간 다름; 역사적으로 BC 433년에 예루살렘에서 느헤미야의 마지막 종교개혁이 있었으나(느13:4-13) 십 년 후에 그 동안 느헤미야 총독을 지지해주고 있었던 페르샤의 아닥사스다 황제가 서거하고 나자 급격하게 개혁조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음. 그리고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들의 후손에 의한 종교적 타락 그리고 외세와의 연합에 의한 정치적 타락이 함께 전개되었음. 그러자 백성들이 십일조를 온전히 바치지 아니하게 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는 레위 인들도 생계가 어려워지고 말았음. 그 결과 레위 인들이 살길을 찾아서 지방으로 흩어지고 예루살렘은 하나님 신앙의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리고 말았음. 그러한 사실을 지켜본 말라기 선지자가 이 세상에 엘리야가 다시 오고 그 모든 잘못을 바로잡는 메시아의 시대가 열린다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임(말3:7-12, 4:5-6).
l 애굽에 이주한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본래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으므로 그들의 고향이 메소포타미아였음. 따라서 그들은 가나안에 있을 때나 애굽에 이주해갔을 때나 항상 “강을 건너온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히브리 인’이라고 불리고 있었음(창14:13, 39:14, 17). 그리고 이미 나일 강 유역에 정착하여 농업을 영위하고 있는 애굽 사람들은 격리된 고센 땅에서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창43:32, 46:34). 한 마디로, 히브리 인에 속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격리와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세월이 지나자 애굽 인들의 노예가 되고만 것임. 따라서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는 민족을 해방하고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전형이 되고 있음.
[Q2] 정치적 메시아 모세와 만민구원의 그리스도 예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l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는 민족을 해방하고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전형이 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그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음.
l 망국의 백성 유대인들이 아닥사스다 황제 이후 페르샤, 헬라, 로마의 식민지로 계속 지내오는 동안 모세와 같은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임.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처럼 종말론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음;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이 세상에 다시 와서 백성들에게 소개하는 메시아는 첫째,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시고 둘째, 제사장 나라를 회복하며 셋째, 거룩한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것임. 한 마디로, 온전한 구원주의 모습이었던 것임.
l 예수 그리스도는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메시아가 바로 자신임을 제자들에게 변화 산의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음(막9:2-8);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곳에서 예수의 모습이 주님의 모습으로 변형이 되면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을 보좌하고 있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준 것임.
l 그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9:7)는 하늘의 소리는 구원과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임을 정확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음(요5:24, 17:3).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기다린 모세와 같은 정치적 메시아는 사라지지만 만민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종말론적인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심판의 역사만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임.
[Q3]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무엇인가?
l 세 가지 시험의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나고 있음(마4:1-10, 눅4:1-12); 떡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고 있는 현세주의, 선민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도록 항상 뒷받침해주시는 종으로서의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 도구주의, 사탄을 경배하더라도 세상권력을 차지하고 율법국가를 유지하면 된다고 하는 타협주의가 바로 타락한 구약시대 유대교의 모습이었던 것임.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하나님 말씀의 뜻을 되찾아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현세주의, 도구주의, 타협주의에 물든 유대교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천명하고 계시는 것임.
l 한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차지하는 방법을 기술한 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은 가나안을 하늘나라로 바꾸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음. 그리고 구약이 ‘제로 섬’(Zero Sum) 게임의 법칙에 충실하고 있다고 한다면 신약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에 입각하고 있는 ‘플러스 섬’(Plus Sum) 게임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음.
[Q4] 세례 요한과 예수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l 첫째로, 다시 오는 엘리야로서 역시 선지자에 속하는 세례 요한은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며(옥한흠목사 지적)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님. 그렇지만 예수님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임.
l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례 요한은 인간 중 가장 큰 자이지만(눅7:28)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의 선지자이기에 가장 작은 깨달음의 은혜를 입은 자라고 볼 수 있음(마11:4-19).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보고 들었으며 모든 계시를 선지자를 통하여 이 세상에 전하여준 하나님 말씀의 주관자이심(요1:18, 5:19, 마11:27).
l 셋째로, 세례 요한은 금욕생활(Ascetic Life)과 고행의 모범을 보였지만 예수님은 경건생활(Life of Piety or Devotion)을 더 강조하고 있음. 금욕생활은 더욱 완전한 설명과 해답에 집착하는 끝없는 고행이며 그 본능적 지혜와 지식추구욕이 집요하게 나타나고 있음. 그와 반면에 경건한 신앙생활은 먼저 죄인 된 삶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동시에 인간 추구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는 태도인 것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게 되면 하나님의 지혜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한없이 낮아진 물과 같은 야훼의 종에게 주어지는 증발력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영광의 나타남이라고 하겠음(사53:2-12).
[Q5]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l 첫째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새 언약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임(막1:9-11). 둘째로, 말씀이 성육신하여 완전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표시가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예수님이 받으심으로 증명이 되는 것임. 셋째로, 메시아를 이 땅에 소개하기 위하여 다시 오는 엘리야가 세례 요한인데 그가 예수님께 물 세례를 줌으로써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임(말4:5-6, 막1:7-8, 눅3:16-18).
l 넷째로, 예수님이 스스로 세례를 받는 모범을 보이심으로 그 후 제자들이 세례의식에 참여하고 있음. 예수님은 겸손하게 사람이 주는 물세례를 무시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섬김의 잔을 마시고 대속의 세례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를 지신 것임(막10:38,45). 그와 같이 죄 없는 예수님이 스스로 죄인의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다가 오셨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들은 이제 하나님께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게 된 것임. 끝으로, 인간의 세례를 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온유와 겸손이며(마11:28-30)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역사가 임하고 있는 것임. 따라서 인간에게 세례를 통하여 오늘 날도 동일한 은혜가 임하고 있다고 하겠음.
'마가복음 OBS교재(손진길 작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제6과(손진길 작성) (0) | 2020.12.22 |
---|---|
마가복음 제5과(손진길 작성) (0) | 2020.12.21 |
마가복음 제4과(손진길 작성) (0) | 2020.12.20 |
마가복음 제3과(손진길 작성) (0) | 2020.12.19 |
마가복음 제1과(손진길 작성) (0) | 2020.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