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8강(눅1:72-7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1. 4. 03:57

누가복음 강해 제18(1:72-75)

작성자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주후 2016 5 22(주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선민들을 어떻게 주의 앞에서 성결과 공의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1:72-75)

 

의사 누가는 제사장 사가랴의 예언을 통하여 메시아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1:72-73). 그 맹세는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고 한평생 사는 동안 주의 앞에서 성결하게 공의를 행함으로써 두려움이 없이 영생토록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1:74-75).

실제로 그러한 맹세가 모세오경의 어디에 적혀 있는지 찾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다만 창세기 제17장 제1절과 제50장 제20-21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20-21).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일을 여호와 앞에서 여쭈어보고 그 말씀을 따라서 실천하는 것입니다그것은 한 마디로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은 종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그런데 그것이 영 쉽지가 않습니다그 이유는 자기의 뜻대로 한 평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자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그 반면에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창조주 여호와는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종이 언제나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사람들의 이기심과 하나님의 공의가 늘 갈등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경외에서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22:10-14). 그들의 하나님신앙은 여전히 선민구원사상과 현세구복사상을 보여주고 있지 결코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에 이르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떻게 선민들의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이키실 것이며(1:15-17), 아울러 창조주의 공의를 실천하는 인생으로(26:52-54바꾸어주시는 것일까요?

그 답을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 제1장에서 제시해주고 있습니다세례 요한과 메시아의 탄생에서부터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와 같은 기본적인 인식을 가지고 이제부터 본문말씀의 각 구절을 검토해보고자 합니다그리고 말씀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그 거룩한 언약 기억하셨으니(1:72); 한 마디로출애굽의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내용입니다세상제국 애굽의 치하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엽게 생각하십니다(2:23). 그리고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에 대하여 기억하십니다(2:24-25). 그 결과 출애굽의 역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그러한 옛날 이야기는 의미상 다음과 같이 확대가 되고 있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선민 이스라엘 백성만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이방인들도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그러므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따라 선민의 조상만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요컨대 만민이 모두 구원의 대상입니다.

(2)  선민 이스라엘만 고쳐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선민과 원수지간(怨讐之間원수의 관계)이 되고 있는 애굽과 앗수르도 고쳐서 사용하실 것입니다그 사실은 벌써 이사야의 예언에서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그들을 고쳐주시리라(19:22), 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내 백성 애굽이여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19:24-25).

(3)  그러므로 세상제국인 애굽에 의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모든 세상의 사람들이 전부 경험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굴레에 대하여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사람들의 진짜 원수는 패권국이나 강대국 또는 침탈하는 이웃이 아닙니다그들은 깃털에 불과한 존재입니다진짜 원수 곧 원수의 뿌리가 되고 있는 실체는 사람들을 죄와 사망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는 사탄과 그의 부하들인 악한 영들인 것입니다(6:12).

(4)  따라서 그 원수의 실체를 어떻게 도려내어 사람과 분리시킬 것인가하는 문제가 구원문제의 본질이 되고 있습니다(3:15, 8:21, 9:11-17, 8:1-2). 그와 같은 맥락에서메시아가 오신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악한 영들의 머리인 사탄의 죄와 죽음의 권세를 박살내기 위하여 오십니다(3:15). 그래서 의사 누가는 순수한 여자의 후손으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다는 측면을 그의 복음서 제1장에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1:34-38).

(5)  여호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대하여 살펴봅니다그 주요한 특징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생을 살게 되면 그를 통하여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큰 복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12:1-3). 그러나 아브라함은 가나안과 애굽 그리고 블레셋의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그 시행착오를 보시고서 하나님께서 정답을 말씀해주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6)  해답은 이미 주어지고 있습니다그런데 문제는 매사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묻고 정확하게 그 뜻을 깨달아서 일을 처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그 이유는 ①첫째사람은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의식이 강한 존재입니다그래서 하나님에게 묻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행하기를 좋아합니다②둘째모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터 살고자 하는 이기심이 먼저입니다③셋째영생보다는 현세에서 당장 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7)  그와 같은 사람의 심성을 어떻게 하면 완전하게 고칠 수가 있을까요그렇게 행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그 해답이 메시아이며 성령님이십니다그와 같이 행하는 인생을 메시아가 자신의 일생으로 보여주십니다(16:24-28, 22:28-30, 15:1-5, 16:33).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성도들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능력을 공급해주십니다(1:8). 그러한 해결책에 대하여 특히 의사 누가의 글인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많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우리가 원수 에서 건지심을 받고(1:73-74);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원수의 손’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선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합니다그런데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에 국한이 되고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아브라함은 8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삭입니다(21:1-7). 그리고 이삭도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입니다(25:21-26). 그 가운데 야곱이 훗날 하나님의 대 족장의 칭호 이스라엘을 가지게 될 뿐입니다(32:28, 35:10).

(2)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만 자신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이삭의 장남인 에서의 후손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그리고 첩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16:15-16그의 자손들(25:12-18), 또한 후처 그두라가 낳은 6아들과(25:1-2그들의 후손들이(25:3-6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그와 같은 의미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선민과 이방인의 조상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3)  원수의 손’은 원수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동원하고 있는 용어입니다여기서 원수’는 사탄과 그의 부하인 악한 영들’이라고 이미 설명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그렇다면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그것이 죄와 사망의 권세입니다왜냐하면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4)  본문에서 사가랴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1:74)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그 의미가 바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사족을 더하자면그 작업은 메시아와 성령님의 합작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총지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 말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 () 두려움이 없이 (영생토록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1:75);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요의사 누가는 제사장 사가랴의 예언 가운데 그 해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첫째인생의 목적은 종신토록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1)    흔히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화의 과정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그것은 처음부터 성도가 만족스러운 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조금씩 거룩해진다는 의미입니다기본적으로거듭난 성도가 영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그 속사람 속에 성전이 마련이 됩니다(고전6:19). 그러면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성도의 영이 활성화되어 영적인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고전6:20). 그렇지만 처음에는 내주하신 성령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거나 지배적인 것이 아닙니다왜 그럴까요?

2)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제3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볼지어다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0-22). 두 가지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3)    첫째아버지 하나님 또는 주님은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절대로 그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지를 아니하십니다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인간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1:26-27).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선택권과 자유의지를 무시하시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형상과 모습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그와 같은 맥락에서아무리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 시급하다고 하더라도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면서 그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65:2, 10:21).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이며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서 그 문을 기꺼이 열 때까지입니다.

4)    둘째그 문을 열지 말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세력들이 있습니다인간의 이기주의와 현세구복사상을 부추기고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사람들은 그 세력과 싸워서 이기기가 참 어렵습니다왜냐하면 그들의 논리는세상의 창조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진리를(1:1근본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만 빼고 보면모두가 이치에 맞으며 현실타당성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모릅니다이에 따라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이며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인정하기를 자꾸만 늦추고 있습니다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현실적인 이론과 해석을 지니고 있는데 구태여 보이지 아니하는 창조주의 종 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    참고로창조주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는 세력들인지라 그들 나름대로 세상적인 진리와 이치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10:1-3). 그렇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창조주의 의도와 능력을 부인하면서 자력갱생과 구원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피조물의 노력에 불과합니다따라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그리고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기에는 한 마디로 족탈불급(足脫不及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그 재주나 역량이 상대방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함)이라고 하겠습니다.

(2)  둘째인생의 목적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공의(公義righteousness)를 실천하는 것입니다공의는 본래 창조주의 것입니다왜냐하면그 의미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고 공평하게 그 삶을 돌보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대하여 마치 자식을 사랑하듯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렇게 행할 수가 있습니다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그 이유는 이 세상이란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고 생존경쟁이 치열한 곳이므로 자기살기에도 급급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어떻게 모두가 함께 살자고 하는 이상론(理想論idealism)을 마냥 부르짖으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할 수가 있겠습니까?

2)   혹자는 도()를 깨달아 그렇게 실천하는 한 평생을 살아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하지만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의 마음을 완전히 깨닫고 완벽하게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피조물은 그 자신 창조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만약에 그 구분이 사라지거나 그 분별이 무시가 되어버린다고 한다면그것은 유신론(有神論, theism, 이 세상을 만든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이론)이 아니라 이미 무신론(無神論, atheism, 신이 없다고 하는 사상)이거나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 물질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하는 이론)이라고 하겠습니다그러므로 스스로 인간이 공의의 정신을 실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론상 피조물이 지켜야 하는 법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그것은 이미 하나님신앙이나 하나님경외의 삶을 이탈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따라서 작은 결론을 맺어보자면창조주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공의를 실천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실 때에 한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그러한 마음과 능력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얻고 있는 자들이 누가복음 제1장에서는 세례 요한과 메시아 그리고 제사장 사가랴 부부와 처녀 마리아 등이라고 하겠습니다참고로창조주를 섬기는 그 마음으로 이웃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라고 가르쳐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한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3)  셋째그리하면 죄와 사망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    메시아가 오심으로 사탄과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던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어집니다(8:2).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 마리아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십자가 대속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인간을 사로잡고 있던 사탄의 정죄함을 없애버리시기 때문입니다(3:15, 8:1).

2)    하지만 그 사실을 영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필요합니다(14:26-27, 16:13, 20:22, 8:2). 따라서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을 믿고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만이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시는 마음속 평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4:14, 20:21).

3)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대속의 십자가 제사와 무덤 속 부활이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그것은 성도가 자신의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일생 가운데 이미 하나의 모범답안으로 제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6:19-20). 그 뜻을 따라 성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은 놀라운 미래를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22:28-30).

(4)  넷째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게 됩니다;

1)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사상은 바리새인들의 부활사상과 상당히 다릅니다예수님과 베다니 마르다와의 대화 가운데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이르되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이것을 네가 믿느냐?(11:24-26).

2)   사람이 죽고 나서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입니다그 가르침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마르다입니다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상당히 다릅니다그리스도가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믿는 자는 살아서도 영적으로 부활을 경험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고 아버지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성도들은 이미 부활의 영을 모시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그와 같은 놀라운 인생을 이 세상에서도 경험하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이십니다그 가르치심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6)고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강조하십니다.

결론적으로, 메시아가 하나님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실천하는 인생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사갸랴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1:72-75).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성장을 하시지만 사람의 공통적인 약점인 이기심과 현세구복사상을 극복하십니다그리고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서 자신에게 보내어주시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몸을 대속의 산제물로 희생하십니다.

그와 같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메시아가 오신 것이라고 세상사람들에게 소개를 하고자 사가랴의 아들로써 세례 요한이 탄생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사장 사가랴는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게 된다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 언약이 메시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왜냐하면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과 더불어 이방인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모두 구원하고자 메시아를 보내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성도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로 끌고 들어가던 원수들이 이제는 궤멸이 되고 말 것입니다성도들은 메시아로 말미암아 평생 주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게 됩니다그 결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평강을 누리며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1:72-75 의역).

아무쪼록 사가랴가 예언하고 있는 그 언약의 성취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