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16강(눅1:63-6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1. 3. 21:30

누가복음 강해 제16(1:63-67)

작성자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주후 2016 5 20()

 

제사장 사가랴가 자신의 후사를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하여 바치고자 할 때에 말문이 터지고 성령의 충만함을 얻게 되다(1:63-67)

 

사람이 자신의 후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여호와의 종으로 바치고자 결심하게 되면 어떠한 기적이 이 세상에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의사 누가는 본문에서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사장 사가랴가 늘그막에 기적적으로 얻게 된 아들을 자신의 후사로 사용하는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하는 여호와의 종으로 사용하도록 바치고자 합니다그래서 자신의 이름자를 물려주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1:63).

바로 그 때에 몇 가지의 놀라운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1)  첫째사가랴가 벙어리 신세를 면하고 갑자가 혀가 풀리며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1:64a).

(2)  둘째말문이 열린 사가랴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일을 할 수 있는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1:64b).

(3)  셋째사가랴의 결단과 그에게 발생하고 있는 일이 이웃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나갑니다(1:65).

(4)  넷째많은 사람들이 제사장 사가랴와 세례 요한의 미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1:66).

(5)  다섯째제사장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하게 됩니다(1:67).

이상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그가 현지를 방문하여 제사장 사가랴의 이웃과 친족들로부터 수집한 증거와 자료들을 가지고 알기 쉽게 꾸민 이야기로 보입니다그렇다면그 이야기를 통하여 의사 누가가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이제부터 본문말씀을 한 구절씩 검토하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메시지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가 서판을 달라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1:63);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고 한 것은 그가 아직 벙어리 신세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그는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글을 적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1)  그런데 제사장 사가랴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겠다고 의사표시를 하고 있습니다그 서판의 글을 읽고서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사가랴가 자신의 제사장 신분을 잇는 후사로 아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2)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의 반열에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레위 인으로서 참으로 명예스러운 일입니다그런데 그 제사장의 신분을 세습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가랴는 자신의 아들을 달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게 할 것이라는 뜻으로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3)  요한’이라는 이름자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그렇다면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입은 자는 더 이상 혈통적인 선민의 제사장으로서만 살아가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것일까요그 뜻은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혈통과 할례 등을 앞세워 선민의 특권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만의 속죄와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며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선민들은 이방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결코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며선민의 제사장들은 이방인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자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주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그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3:16-17).

둘째로, 이에 그 이 곧 열리고 가 풀리며 을 하여하나님을 찬송하니(1:64); 자신의 후사를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해달라고 결단하였을 때에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1)  여기서는 제사장 사가랴의 입과 혀가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그러자 사가랴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1:64). 늘그막에 준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다고 데려가시는 것이 섭섭한 것이 아닙니다도리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구원을 베푸시는데 자신의 늙은 몸도 그리고 자신의 아들도 모두 요긴하게 사용하시고 있으니 그 은혜를 진실로 찬송한다는 것입니다그것은 제사장 사가랴가 온 세상의 구원자로 오시는 메시아의 시대를 진심으로 앙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그러므로 온 세상에 구원의 큰 복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가문을 사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그렇게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참고로그것은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발생했던 일과 동일한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75세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옵니다(12:1-5).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세 가지 축복의 약속을 언약으로 주십니다①첫째자손의 번성 ②둘째그의 이름의 창대함 ③셋째천하의 모든 족속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해주는 것 등입니다(12:1-3). 그 예언 그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십니다(21:1-7). 그것은 첫 번째 약속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훗날 블레셋의 왕중왕인 그랄 왕 아비멜렉과 브엘세바에서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게 됩니다(21:22-32). 그것은 아비멜렉과 대등한 자격으로 맺은 평화조약입니다따라서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함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그것이 두 번째 약속의 성취입니다그 사실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으며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21:33).

3)    아브라함이 과연 자손의 번성이나 자신의 이름의 창대함이라고 하는 세상적인 형통함과 세속적인 축복에만 감격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아니면 진실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생의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아브라함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이 있게 됩니다(22:1-2). 그것은 천하만민에게 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세 번째 약속의 성취와 관련이 되고 있는 시험입니다.

4)    무모하게도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준행하고 있습니다칼로 이삭의 목을 내리치는 그 순간을 보시고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게 놀라신 것으로 보입니다얼른 하늘에서 사자를 급파하시면서 그 장면을 멈추게 하십니다(22:11-12a).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선언하십니다; 진실로 아브라함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야 알겠다”는 것입니다(22:12b).

5)    아브라함이 깨닫고 실천하고자 하는 하나님신앙은 그 본질이 유한한 에노스적인 자신의 인생을 드리고 무한한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4:26).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세상적인 통념을 넘어서고 있는 신앙의 경지입니다자신이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는 신앙고백이며 장차 메시아를 만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자 하는 신앙입니다(1:12-13, 5:24-29, 11:13-19, 26).

6)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도 세상적인 형통함도 나아가서 세속적인 축복도 오로지 창조주 여호와 안에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그 바깥에서는 그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리는 안개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우상을 섬기는 것이 허망하듯이 그러한 세상적인 가치에 집착하고 있는 것도 허망하다는 결론입니다요컨대그러한 세상적인 것들이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이 되어야만 한다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셋째로,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1:65); 제사장 사가랴에게 발생하고 있는 일은 벙어리가 말문이 열린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서 이웃사람들과 친족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위적인 역사가 임하는 것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1)  그와 같은 현상은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에만 나타나는 현상임을 그들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그 마을에는 아론의 후손들인 제사장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들 레위 인들은 히브리정경과 전승을 통해서 이미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가 제사장 사가랴의 집안에서 발생을 했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다행히 사가랴의 경우에는 그를 벙어리로 만들어버리신 여호와께서 다시 치유하시고 그 입과 혀를 회복시켜주셨지만 그러하지 아니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만약 그들이 입을 잘못 놀린다면 벙어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는 여호와의 능력입니다그러므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고 그냥 두려워하면서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3)  그렇지만 발 없는 말과 소문이 천리를 간다고 하듯이 그러한 신기한 현상에 대한 이야기는 삽시간에 널리 퍼져나갑니다.  그래서 그 옛날 스불론 지파에게 속하던 갈릴리 서쪽 산악지대 산골마을에 그 소식이 두루 퍼지고 있습니다여기서 의사 누가가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현장과 그 지역을 방문하였을 때에 그 자료를 풍성하게 수집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능력을 선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그것은 질병과 장애도 주실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마치 그 옛날 모세에게 잠시 보여주셨던 나병의 발생과 즉시 치료와 같은 것입니다(4:6-7). 그러므로 질병과 장애가 나타났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을 말끔하게 치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하겠습니다.

(5)  사족을 더하자면불치의 질병과 장애로 마냥 한 평생을 희망 없이 살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것을 말끔하게 고쳐서 거듭난 삶을 살게 만드시는 것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3:13-17).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언제 어떻게 하실지 구체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만 합니다.

넷째로, 듣는 사람이 다 이 말 마음에 두며 이르되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이는 주의 손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1:66); 사가랴의 아들 요한이 자라나고 있습니다그를 바라보는 친족들과 이웃사람들은 한 가지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이미 출생 당시부터 보통아이가 아닙니다불임이었던 늙은 어머니와 늙은 제사장 사가랴에게서 기적적으로 출생한 아이입니다사가랴는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고 요한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붙여주고 있습니다앞으로 제사장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의 일을 할 요한입니다그가 자라서 과연 어떠한 하나님의 일을 실행할까요그것이 친족들과 이웃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1:66a). 특히 요한이 자라날수록 지혜가 뛰어나고 글을 빨리 깨쳐서 정경 두루마리를 찾아서 읽기 열심입니다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이 그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1:66b).

다섯째로,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1:67); 친족들과 이웃사람들의 궁금증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요한의 부친인 제사장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장래의 일에 대하여 예언을 해주고 있습니다그래서 사가랴의 친척과 이웃들이 그 예언을 기억하게 됩니다의사 누가가 훗날 그 동네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들은 그 예언의 상당부분을 암기하고 있습니다그 덕택에 오늘날까지 제사장 사가랴의 예언이 남아 있습니다그 예언의 요지는 메시아의 사명과 세례 요한의 사명에 관한 것입니다(1:68-79).

결론적으로적어도 본문말씀에는 두 가지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1)  첫째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입은 자는 더 이상 혈통적인 선민의 제사장으로서만 살아가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메시지입니다성도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서야만 합니다먼저 그들에게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달라고 중보기도를 합니다그 다음에 하나님말씀을 전합니다그리고 회개하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어야만 합니다.

(2)  둘째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능력을 모두 지니고 계시는 두려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고난도 주시고 영광도 주십니다질병도 주시고 치유함도 주십니다장애도 주시고 정상으로 회복도 시켜주십니다왜 그렇게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지니고 계시는 것일까요그 이유는 사람을 영원히 구원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  예를 들면사람들은 교도소가 없는 이상사회를 원하고 있습니다그러한 사회를 만들자면 모두가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도 정의를 구현해야만 합니다모두가 그러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교도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마찬가지입니다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그러므로 성도들은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그 옛날 모세의 권면과 같이 생명과 사망복과 저주 가운데 생명과 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창조주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30:19-20).

(4)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항상 치유와 회복만을 주시는 그러한 하나님을 상정하고 있는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그것은 사람의 중심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안목이 아닙니다오직 사람들의 제한된 판단에 불과한 것입니다따라서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이제는 좋으신 하나님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려우신 하나님도 동시에 생각을 해야만 하겠습니다아무쪼록 고난과 헌신의 의미까지 깊이 생각하시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살롬!